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35
앤마리는 귀족 가의 영애답게 곧은 자세와 분명한 발음, 그리고 카르오 대공의 이모답게 점잖은 태도로 테오도르에게 충고했다.
“넌 이제 그저 후계자가 아니라 카르오 대공이야. 승계작업 중인 지금이 가장 중요할 때고. 남의 이목도 있고 하니, 슬슬 정리해야 하지 않겠니?”
테오도르의 손이 다시 움직여, 서류를 모았다. 테오도르가 그것을 챙기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탓에 앤마리는 그의 눈빛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순간적으로 얼마나 서늘한 눈빛을 했는지, 싸늘한 표정을 지었는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지금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살짝 밟아버렸다는 것 또한 알지 못했다.
“떠나기 전,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서류를 봉투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테오도르가 입을 열었다.
“말하렴.”
“아직 제가 정식으로 승계식을 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부인의 말씀대로 카르오 가문을 이끌 가주이자, 대공입니다. 엘부르 부인께서 저를 조카로 친밀하게 여기시는 것은 이해하나, 앞으로는 그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앤마리는 그 말을 하는 테오도르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입꼬리에는 은근한 미소를 달고 있었지만, 눈빛은 서늘했다.
하지만 표정은 읽을 수 없을지언정, 테오도르가 하는 말은 분명했다.
감히 카르오 대공인 나에게 그따위 가당찮은 충고는 앞으로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
“제 말, 아시겠습니까?”
그녀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테오도르는 은근히 대답을 종용하기까지 했다.
‘새끼 사자인 줄 알았더니, 이미 다 자란 사자였나?’
앤마리는 똑똑한 여자였다. 또한, 남편의 바람을 단박에 알아챌 만큼 눈치 빠른 여자이기도 했다.
그녀는 테오도르가 지금 한 말이 감히 주제넘게 카르오 대공인 자신에게 간섭할 생각 따위는 하지 말라는 것임을 깨달았다.
어쩌면, 테오도르의 눈치는 외가 쪽의 재능일지도 몰랐다.
“결례를 범했다면, 죄송합니다. 말씀대로 죽은 언니의 핏줄이라는 생각에 제가 대공님을 너무 친밀하게 생각했습니다. 앞으로는 카르오 대공으로 깍듯하게 대할 터이니, 염려치 마십시오.”
앤마리는 재빨리 물러났다.
“감사합니다, 엘부르 부인. 저 역시 어머니는 돌아가셨다고는 하나, 엘부르 가문은 저의 외가이니 변함없이 자주 오가며 지냈으면 합니다.”
테오도르는 그녀의 무례를 너그러이 용서하며, 앞으로도 가문 간의 우호를 약속했다.
“그러신다면 영광입니다, 카르오 대공님.”
그리고 앤마리 또한, 그 우호를 받아들였다.
그날, 인스트의 연설대로 새로운 카르오 대공은 평화를 원했다. 누군가 그를, 그리고 그의 여자를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 * *
“오늘도 바쁘셨나 봐요?”
씻고 나온 테오도르를 보자 내가 물었다. 따뜻한 김이 아직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는 조금 피곤해 보였고, 또 나른해 보였다.
“조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서류 더미에 둘러싸였고, 만나야 할 사람 역시 산더미 같이 있었으며,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 역시 한참이나 남아 있는 것을 내가 아는데, 테오도르는 그저 웃으며 조금이라고 대답했다.
자신의 힘듦을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테오도르를 향해서 나 역시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머리를 말려 드릴까요?”
“괜찮아. 그런 일은 네가 하지 않아도 돼.”
“저는 원래 그런 일을 하는 하녀인걸요.”
“하지만…….”
“그리고 제가 하고 싶기도 하고요.”
테오도르는 만류했지만, 나는 마른 수건을 들지 않은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아 의자로 이끌었다.
잡은 테오도르의 손은 막 씻고 나와서인지, 평소와는 다르게 촉촉했고 매끄러웠다.
“바보 같은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를 자리에 앉히고, 의자 뒤에 서서 아직 젖어 있는 테오도르의 검은 머리카락을 닦기 시작했다.
“다른 여자가 테오도르 님의 몸에 손을 대는 건 싫거든요.”
포근한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토닥토닥 두드리고,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기분 좋은 듯, 테오도르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바로 내가 원한 것이었다.
따뜻한 물로 씻고 나서 누군가가 머리를 말려주면, 얼마나 노곤한지, 언니에게 몇 번 당해본 나는 그 기분을 잘 알았다.
나는 온종일 일하느라 바쁘고, 힘들었을 테오도르가 그렇게 노곤함을 느끼고, 편안하게 쉬었으면 했다.
“내 목욕시중을 드는 건, 하녀가 아니라 하인이야.”
눈을 감은 채, 편안한 표정으로 테오도르가 중얼거렸다.
“…….”
그 대답을 들은 내 손이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남자…… 였나? 보통 소설에서는 다 여자가 목욕시중을 들고, 단장을 해주길래 나는 테오도르도 그런 줄 알았지!
“나도 너 말고, 다른 여자가 내 몸에 손을 대는 것은 싫거든.”
슬쩍 눈을 뜨고, 내 얼굴을 쳐다본 테오도르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 안다는 듯, 혹은 지금 내가 한 말에 퍽 부끄럽고, 또 안심했다는 것을 안다는 것 같은 미소에 나는 그만 얼굴을 붉히고야 말았다.
“레나티스.”
어떠한 뜻을 담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그리고 그것과 비슷한 뜻을 담은 손길이 나를 향해서 뻗어왔다.
구불구불한 분홍색 머리카락의 사이로 들어온 손이 내 뒤통수를 지그시 누르자, 나는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내 아랫입술이 그의 윗입술에 닿았고, 그의 아랫입술이 내 윗입술에 닿았다.
입술이 입술을 머금고, 서로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자, 그저 보드라웠던 키스는 어느새 농밀해졌고, 침착했던 숨결은 어느새 가빠져 있었다.
나는 항상 테오도르와 키스를 할 때면, 머리가 멍해져서 언제 숨을 쉬어야 하는지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흐읏…….”
내 입술에서는 오늘도 어김없이 가쁜 숨이 나왔고, 벌어진 입술의 틈새에서는 신음이 나오고야 말았다.
작게 새어 나온 신음이 신호라도 되듯이, 테오도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저기!”
테오도르가 성급하게 나를 끌어당겨 껴안으려던 순간, 나는 한 걸음은 그를 향해서 내디디고 말았지만, 남은 한발은 힘을 줘서 버텼다.
“아직…… 이야?”
테오도르의 물음에 나는 살짝 얼굴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내 팔을 잡았던 손에는 순식간에 힘이 풀렸고,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살짝 풀 죽은 것이 느껴졌다.
인스트가 말한 새로운 카르오 대공이 밤마다 하녀를 침대로 불러들인다는 소문은 반은 사실이었고, 반은 거짓이었다.
본채로 온 첫날밤. 나는 근육통으로 온몸이 아프다고 호소했다. 다정한 테오도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의사를 불러오겠다고 했다.
나는 근육통으로 무슨 의사를 부르냐고, 그냥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라며, 테오도르를 다독였다.
그날 우리는 그야말로 손만 잡고 잤다.
다음날, 결국 나는 무려 카르오 대공 가의 주치의에게 진료를 받았고, 일시적인 근육통일 뿐이며 별다른 이상은 없으니 쉬면 나을 거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 결과를 듣고 나서야 테오도르는 안심하는 듯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나? 아니, 사흘이 지났었나?
침대에서의 키스가 평소보다 진득하다고 느꼈다. 아니, 진득정도가 아니라 찐득인 게 맞겠다.
테오도르는 키스 후에 아주 자연스럽게 손을 내 치마로 가져갔다. 그리고 나는 그 손을 다급하게 잡았다.
그야말로 의아함을 가득 담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테오도르에게 나는 살짝 고개를 돌리며, 대자연의 섭리에 의하여 현재 잠자리를 가질 수 없노라며 말했다.
테오도르는 배가 아프지는 않냐며, 컨디션은 괜찮냐며, 먹고 싶은 것은 없냐며 캐물어서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그날도 우리는 손만 잡고 잠을 잤다.
그때로부터 며칠이 지난 것이 바로 오늘이었다. 아마도 테오도르는 이제 내 월경이 끝났으려니 하고 물은 것이리라.
하지만 나는 아직 테오도르와 잠자리를 할 수 없었다.
“저기…….”
그의 청을 몇 번이나 거절한 것이 미안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테오도르를 부르자, 테오도르가 웃는 것이 보였다.
그 미소를 보자 나는 더욱 미안해졌다.
“손으로 해드릴까요?”
“괜찮아, 그게 네 마음대로 조절…….”
서로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리고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아니면, 내 제안에 테오도르가 입을 다물어버렸거나.
“아니면, 입으로……?”
내 제안이 너무 파격적이었을까? 테오도르는 놀란 표정으로 눈만 끔벅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용감하게 뒤로 물러나 있던 발을 앞으로 내밀어 테오도르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러자 테오도르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결심을 굳혔다. 테오도르가 물러난 만큼 더 다가갔고, 진정하라는 듯 양손을 든 테오도르를 툭 밀어버리기까지 했다.
테오도르는 조금 전 내가 수건으로 머리를 말려주기 위해서 앉았던 의자에, 다시 앉고야 말았다.
‘좋아. 할 수 있다!’
나는 의지를 다졌다. 어쨌든 전생의 기억으로 이론적으로는 완벽했다. 그러니까, 혀를 잘 사용하고, 이가 닿으면 안 되며, 가능한 한 깊게.
혀를 어떻게 잘 사용하는 건지는 모르겠고, 어떻게 하면 이가 안 닿는지 모르겠으며, 가능한 깊게 하는 요령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하다 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나는 테오도르의 허벅지를 지그시 누르며 그의 앞에 꿇어앉았다.
슬쩍 고개를 들어 테오도르를 올려다보자, 여전히 당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의 얼굴이 보였다.
천천히 허벅지에 놓여있던 손을 쓸어올리자 테오도르의 허벅지가 단단하게 굳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허리춤에 내 손이 닿자, 앞으로 마주할 것에 대한 긴장으로 마른침이 저절로 꼴깍 삼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