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34
“뭐, 당연하지. 이제 카르오 대공이잖아? 그냥 후계자일 때보다야 할 일이 어마어마하게 많지. 덕분에 나도 이전보다 일이 늘어서 귀찮아.”
인스트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전 오히려 사람들이 절 너무 피해서 심심할 지경인데요.”
“그것도 당연하지. 그 눈에 띄는 분홍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활을 들고 그날 밤 테오도르의 곁에 있었잖아? 거기다가 카르오 대공의 시체에서 화살이 나왔고. 네가 카르오 대공을 끝장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알 거야.
그 카르오 대공이더라도 저택의 주인이었고, 그를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던 사람들도 있었으니 그런 고용인들은 널 싫어하겠지. 싫어하지는 않더라도 찜찜해하는 사람도 제법 될 거고.”
이번에도 매우 당연하다는 듯이 그는 말했다. 나는 그런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인스트는 예상했던 것 같았다.
“인스트 님도 그래요? 혹시 다른 사병들이나 기사들에게?”
“조금. 일명 ‘주인을 문 개’라는 거지.”
“그건 조금이라고 하기에는 심한 말 아닌가요?”
“별로. 애초에 굳이 말하자면 나는 카르오 대공의 개가 아니라 테오도르 님의 개였으니, 오히려 충실한 개라고 생각하니까.”
인스트는 매우 쿨했다.
“거기다가 넌 별채에 있을 때부터 소문의 주인공이었으니 더 그렇겠지. 엄청 특별대접을 받았잖아? 아무리 쉬쉬해도 그런 소문은 빨라. 그런데 테오도르 님이 본채에 오고 나서는 아예 대놓고 너한테 집적거리고 있잖아.”
“집적거린다기보다는…….”
“저택의 주인이 하녀를 불러서 아침, 점심, 저녁을 함께 먹고, 오후 내내 티타임이라며 하녀가 집무실에서 나오지 않고, 밤이면 밤마다 주인이 그 하녀를 제 방으로 불러들이는 걸, 보통은 집적거린다고 하지.”
너무나 사실이라서 나는 반박할 말을 잃었다. 동시에 어렴풋이 짐작했던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이유를 매우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전 주인을 죽인 배은망덕한 하녀인데다가 현 주인에게 꼬리치는 불여우 같은 애. 그게 바로 나였다.
…… 나 같아도 수군거리겠네.
“신경 쓰지 마. 그러다 말겠지, 뭐.”
“딱히 신경 쓰는 건 아니지만, 신경 쓰인다고요.”
“그건 무슨 말이야?”
“별채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하하 호호하면 지낸 건 아니고, 굳이 모두 함께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는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제가 고용인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더라도 별 상관은 없어요.”
“그럼 문제가 될 것이 없잖아?”
“하지만 테오도르 님이 있잖아요. 아니, 카르오 대공이 저와 연관되어 있잖아요. 카르오 대공이 마녀의 머리카락을 가진, 자기 아버지를 죽인 하녀와 정분이 났다고 하면…….”
나는 문장을 굳이 완성하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욕을 할지는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스텔라 언니의 말을 듣고 나서 나도 나름대로 테오도르의 위치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 테오도르의 위치가 더욱 높아졌으니, 나는 더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문제가 있긴 하겠네. 그래도 뭐 어쩌겠어? 머리를 염색한다고 소문이 달라질 것도 아니고,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도 없는데.”
인스트는 이번에도 매우 쿨하게 반응했다.
저렇게 세상 쿨한 사람은 이런 겨울에도 난로가 필요 없을 텐데, 오늘 밤에 확 인스트의 방 난로에 물을 부어 버릴까 보다.
“그렇다고 둘이 헤어질 것도 아니잖아?”
“…….”
인스트가 말한 것은 현실적으로는 가능했지만, 감정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았다.
“안 되는 일을 붙잡고 끙끙거리지 말고, 활이나 더 쏴. 아니, 도대체 비거리가 이렇게나 좋은데, 왜 못 맞추는 거야?”
“아무리 비거리가 좋아도, 저렇게 먼데 못 맞추는 게 당연하죠.”
나는 너무 멀리 있어서 콩알만 해진 나무토막을 보며 투덜거렸다.
이제 움직이는 것도 제법 맞추고, 정자세가 아닌 자세에서도 그럴싸하게 자세가 나오자, 인스트는 이제 거리를 늘려보자고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이 이렇게나 무지막지하게 늘려보자는 말인지는 몰랐다!
“할 수 있어. 단기간에 움직이는 것도 맞춰낸 너잖아.”
인스트는 격려의 말과 함께 어깨를 툭 쳤다.
“그 팔 그렇게 움직여도 돼요?”
“다친 거지, 잘린 게 아니라서 괜찮아.”
인스트는 그날 다쳤던 자기 팔을 두고, 퍽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저게 바로 전장의 경험이 있는 노련한 기사의 패기일 지도 몰랐다.
“네가 엄호해주지 않았다면, 잘렸을 수도 있겠다. 아, 맞네. 그러고 보니 은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안 했네. 고마워, 레나티스.”
“아, 아뇨. 뭘요!”
나는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나보다 훨씬 고생한 인스트에게 그런 인사를 받는 것은 옳지 않아 보였다.
“아니긴. 네 덕분에 본채를 돌파하기가 한결 수월했어. 속도도 빨라서 피해도 적었고. 나름 대규모 전투였는데, 사상자는 다섯 명뿐이니 아주 적은 거지. 아, 전 카르오 대공을 합하면 여섯 명인가?”
다섯이라는 숫자도 작지는 않았지만, 인스트의 말대로 제법 많은 인원이 동원된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사상자는 적은 편이었다.
그 점이 내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랐다.
“자, 어쨌든! 빨리 쏴 봐. 오후에는 이 팔을 하고서도, 테오도르 님의 외출에 동행해야 한단 말이야.”
인스트의 재촉에 나는 다시 활시위를 당겼다.
* * *
“네가 카르오 대공이 되다니, 언니도 하늘에서 기뻐할 거야.”
앤마리의 말을 들으며, 테오도르는 오히려 델마가 저세상에서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동생의 기억과는 달리 테오도르에게 델마는 천국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 지옥에 있을 사람이었고, 제 아들의 행복을 빌어줄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늘 뵙자고 한 것은, 이전에 말씀하셨던 약조에 관한 것입니다.”
“물론 그 약속을 지키려고 온 것이겠지?”
앤마리는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가 테오도르의 반란에 가담한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언니인 델마의 복수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앤마리는 델마의 죽음을 니제르의 죽음으로 갚으려 했다.
하지만 동시에 앤마리는 매우 노련한 전략가였다. 그녀는 개인적인 원한을 채움과 동시에 물질적인 무언가도 얻기를 바랐다.
앤마리는 테오도르에게 카르오 가문에서 가지고 있는 광산중 하나를 넘겨주기를 요구했다. 물론, 테오도르는 흔쾌히 승낙했다.
“물론입니다. 약속은 지켜져야지요.”
테오도르는 가지고 온 광산 소유권 이전에 관한 서류를 내어놓았다. 앤마리는 웃는 낯으로 서류를 살펴보았다. 뭐하나 걸리는 바 없이 깔끔한 서류였다.
“후계자 수업을 잘 받은 모양이구나. 서류가 아주 완벽해.”
앤마리는 웃으며 서류에 사인했다. 엘부르 가문에서 부족함 없이 지내고 있는 그녀였지만, 자신의 앞으로 번듯한 재산이 생기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다른 가문들과의 약속도 잘 이행되고 있겠지? 중간에 내가 다리를 놓은 것이니, 만약에 그쪽의 문제들이 잘 처리되지 않으면 내가 곤란해져.”
“물론입니다. 세르빌 가문에는 빌리야 공국과의 오해를 풀어주었음을 물론이고, 카르오 가문에서 가지고 있던 5년 독점권을 넘겨주었습니다. 디엣트 가문이 원한 바르디원 영지의 소유권도 곧 문서화하여 양도할 생각입니다.”
“아깝지는 않니? 바르디원은 제국에서도 비옥하기로 소문난 땅이고, 빌리야 공국에서만 나는 향신료는 금보다 비싸서 그 수익이 적지 않았을 텐데?”
“전혀요. 제가 얻게 된 것에 비하면, 그 둘은 아주 저렴한 것들이죠.”
앤마리는 자신이 한 질문이었지만, 그것이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카르오 대공이라는 이름에 비하면 그 둘은 아주 저렴한 것이었다.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테오도르가 말한 자신이 얻게 된 것은 카르오 대공이라는 이름과 직위, 그리고 그에 딸린 재산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레나티스를 생각했다.
그녀와의 식사, 함께하는 티타임과 잡은 손의 온기, 한 침대에서 잠이 들고,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그녀의 얼굴을 보는 기쁨은 어떤 물질적인 것과도 비견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세간에는 그가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라고, 가만히 있으면 어련히 물려줄 자리를 강제로 빼앗은 탐욕스러운 자라고 말했다.
심지어 황실에서는 그런 테오도르를 카르오 대공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고 들었다.
하지만 어떤 욕을 듣고, 어떤 손가락질을 당해도 테오도르는 상관없었다. 레나티스만 곁에 있다면.
“그리고 네가 원한다면, 엘부르 백작을 네 부관으로 들이는 것은 어떻겠니?”
“……삼촌을 말입니까?”
앤마리는 마치 제삼자를 말하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그녀가 추천한 사람은 그녀의 동생이자 죽은 델마의 동생이었으며, 테오도르의 삼촌인 엘부르 백작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 혈육이니 든든할 것이고, 나이가 있으니 연륜으로 네 뒤를 보좌하기도 좋지 않겠니?”
솔직히 말해서 그는 카르오 대공의 부관으로 적절하지 못했다.
엘부르 백작 가를 유지하는 것에 자신의 재능을 다 쏟아도 모자란 판국에 누군가의 부관까지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카르오 대공 가에 간섭을 하고 싶다는 거로군.’
앤마리의 말대로 후계자 교육을 잘 받은 테오도르는 단박에 그녀의 뜻을 파악해냈다.
어쩌면, 후계자 교육이 아니라 애정없는 부모들 사이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테오도르의 본능이 그런 눈치를 만들어냈는지도 몰랐다.
“안 그래도 부관을 구하고 있었는데, 엘부르 백작도 제 부관의 후보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테오도르는 앤마리의 생각을 짚어내지 못한 척을 하며, 그녀의 사인을 확인했다.
엘부르 백작이 부관이 되는 일은 없을 테지만, 그걸 굳이 지금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소문에 네가 아주 예뻐하는 하녀가 하나 있다고 들었어.”
서류를 챙기던 테오도르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