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32
……새로운 미래가 이런 식일 줄은 진짜로 전혀 몰랐었다.
잠에서 깨어 천장을 보고 있은 지 어언 10분이 넘게 흘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미치겠네.”
몸을 좀 일으켜보려고 했지만, 내 부름에 화답한 것은 손가락이 조금 까닥거릴 뿐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중지가.
어젯밤에 얼마나 무리를 한 것인지 목에서부터 발끝까지 근육통이었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몸이 비명을 질렀다. 거기다가 몸살이라도 난 건지,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아마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몇 날 며칠을 연습하느라 몸을 혹사하고, 잠도 못 자고 계획을 세우고, 걱정으로 밤을 지새웠었다.
그렇게 힘들게 준비한 일이 드디어 끝이 나자, 긴장이 풀린 몸이 비명을 지르는 중이었다.
“아니! 이 바보 멍청이 몸뚱이야!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할 것 아니야!”
강력하게 파업을 주장하는 몸을 향해서 나는 소리를 질렀다.
“아! 움직인다!”
역시 인간은 좋은 소리로 하면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니깐!
나는 드디어 몸이 좀 움직여지자 뿌듯했다.
……아니다. 잠깐만. 이거 뿌듯해야 하는 것 맞나? 어쩐지 내가 욕 들은 기분인데…….
“으윽!”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나오긴 했지만, 찜찜한 기분으로 일단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앉자, 저절로 눈에 들어온 것은 맞은 편에 있는 커넥팅 룸의 방문이었다.
“테오도르는 괜찮으려나?”
궁금했지만, 당장 확인할 수는 없었다.
테오도르는 지금 본채에 있었다. 어제 사람이 죽은 카르오 대공의 침실에 있지는 않을 것 같지만, 새로운 카르오 대공이 된 그는 본채에 있어야 했다.
본채의 주치의가 테오도르의 어깨 상처를 살피고, 오르디와 리타 부인이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을 보고 나서, 나는 별채의 내방으로 돌아왔다.
드물게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스기엔을 껴안고, 나는 거의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이었다.
“일단 밥을 먹고, 오르디에게 물어보면 안부를 알 수 있을까?”
겨우겨우 옷에 팔을 꿰며 생각했지만, 답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오르디도 못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르오 가문의 집사가 되는 것이 오르디의 꿈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본채에는 따로 집사가 있을 듯했다.
하지만 이제 카르오 대공인 테오도르에 대해서 더 잘 아는 것은 오르디일 테니, 당장 집사가 되지는 않겠지만 본채의 소속이 되어 그곳에 머물지도 몰랐다.
그리고 어쩌면 리타 부인도 마찬가지일지도 몰랐다. 테오도르가 어렸을 적부터 유모라고 했으니까, 누구보다 그를 잘 알겠지.
“그럼 별채에는 누가 있는 거지?”
낑낑거리며 겨우 옷을 다 입고, 어기적거리며 아래로 내려갔을 때, 나는 그 답을 찾았다.
“레나티스!!”
그래. 클레어는 여전히 별채에 있었구나.
아니, 근데, 잠시만? 지금 뛰어오는 거야? 나를 향해서? 설마, 나한테 안기려는 건…… 아니지?
“아, 아니! 클레어! 잠깐……!”
나는 나를 향해서 달려오는 클레어를 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아아악!”
하지만 내 외침은 이미 늦은 것이었다.
클레어는 쏜살같이 내게 달려와서 그 속도와 그 힘으로 나를 와락 안았고, 온몸이 이게 무슨 짓이냐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나도 소리를 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꺄악! 왜 그래, 레나티스? 어디 다친 거야?”
내 비명에 놀란 클레어가 같이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몸을 떼어냈다.
“아니. 다치지는 않았는데, 온몸에 근육통이 있어서 말이야.”
“어머, 미안해!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네가 무사한 걸 보고 반가워서 그만…….”
클레어는 진심이 우러나온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거기다가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아마도 내 걱정에 운 모양이었다.
“아니야.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제야 클레어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오르디 님에게 네가 테오도르 님이랑 같이 본채에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네가 엄청나게 대단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막 기사들이랑 싸우는 건 다른 일이잖아.”
“뭐, 그래. 그렇지.”
“그런데, 역시, 역시! 대단해, 레나티스! 결국엔 네가 ……카르오 대공님……도 물리친 거잖아?”
아직은 눈치가 보이는지, 클레어는 카르오 대공을 언급할 때는 살짝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진짜, 막, 엄청나게, 멋있어, 레나티스.”
소곤거리면서 말하는 클레어의 칭찬에 조금 부끄러웠다. 원래 클레어가 날 엄청나게 띄워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그럴 줄이야.
“어제 별채에서는 별일 없었어?”
“응. 소동이 좀 있긴 했지만, 큰일은 없었어. 오르디 님이 건물 안에 있는 사병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문을 전부 꽁꽁 잠가버렸었거든. 사병들이 열쇠를 가진 오르디 님을 찾는다고 난리가 났었지.”
클레어는 퍽 재밌는 일이라는 듯이 키득거렸다.
사실, 방금 클레어가 말한 것도 우리의 계획 중에 일부이긴 했다.
조금이라도 사병들의 발을 더 묶어놓기 위해서 오르디에게 그 임무를 맡긴 것이었다.
“그래? 어떻게 됐는데?”
하지만 나는 클레어가 재미있어하는 것 같아 짐짓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실제로 어젯밤에 본채에 있었던 나는 별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랐다.
클레어는 재밌다는 듯이 이야기했지만, 오르디에게는 꽤 위험한 임무였다.
만약, 사병들에게 발각당하게 되면 열쇠를 뺏기 위해서 그들이 오르디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으니까.
“오르디 님이 아주 감쪽같이 숨어서 사병들이 오르디 님을 못 찾았어. 결국 그들은 창문을 깨어 부수고 나가서 지금 1층 현관 옆에 창문들이 모두 깨져 있어.”
“그랬구나.”
어쩐지 1층에 내려오니까 2층보다 더 추운 것 같더라.
“그런데 오르디 님은 어디에 숨으셨길래, 사병들이 못 찾았지? 별채에 그렇게 감쪽같이 숨을 만한 곳이 있나?”
“내방에 숨으셨어.”
“아, 그렇구…… 응? 뭐?”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황급히 방향을 바꿔서 클레어를 쳐다보았다. 아야! 이 망할 놈의 근육통!
“내가 잠옷만 입고 있다가, 사병이 문을 열면 끼아아악! 하고 소리를 친다는 작전이었어. 오르디 님 완전 머리 좋지?”
클레어는 해맑게 웃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통상적으로 입는 잠옷이 어떤 것인지 아는 나는 해맑게 마주 보고 웃어줄 수가 없었다.
‘그럼 오르디가 클레어의 잠옷 차림을 다 봤다는 소리인데, 미혼의 남녀가 그래도 되는 건가? 거기다가 오르디는 왜 하필이면 클레어에게 그런 부탁을 한 거지?’
“딱 한 번 사병이 내 방문을 열었는데, 내가 소리쳤더니 황급하게 나가더라고. 작전 성공!”
나의 의문은 전혀 모른 채, 클레어는 더 해맑게 웃으며 브이를 그렸다.
‘뭐, 클레어가 괜찮은 것 같으니까, 괜찮겠지?’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이번에는 클레어를 보고 마주 웃어주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을 준비하는데, 어젯밤에 다들 잠을 못 자서 퀭~한데다가, 대체 아침 식사는 몇 인분을 준비해야 하는지, 메뉴는 평소대로 하면 되는 건지, 그야말로 다들 혼란에 빠져서…….”
재잘재잘 이야기하던 클레어의 목소리가 확 커졌다. 아니, 그건 클레어의 목소리가 커진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식당에 들어선 순간, 이야기하던 목소리들이 딱 그치고 정적이 흘러 클레어의 목소리가 크게 느껴진 것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클레어가 말을 멈췄다.
적막, 고요, 정적.
보통 서로 대화하는 소리와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 의자를 끄는 소리 같은 것들이 들려왔던 식당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했다.
이상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보통은 식당에 누군가 들어오면, 다들 한 번씩은 쳐다보았다.
자기와 친한 사이라면, 여기에 와서 앉으라며 손짓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우리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우리만 안 보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들끼리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오직 앞을 바라보거나 아래로 고개를 내려 그릇만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어색했다.
“뭐야? 뭐지?”
클레어가 살짝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조용히 속삭였다. 영문을 모르기는 나도 마찬가지인지라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클레어와 내가 접시를 집어 들고, 먹을 만큼 음식을 더는 동안에도 식당은 조용했다. 덕분에, 나랑 클레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
나와 클레어가 빈자리를 찾아 그곳에 앉으려는 순간, 테이블에 앉아 있던 어떤 하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앉아 있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벌써 식사를 마쳤다고 하기엔, 아직 접시에 음식이 남아 있는 것 같았는데?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 그렇지?”
맞은 편에 앉은 클레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응.”
나는 대답하며 천천히 빵을 씹었다.
나와 클레어가 조용히 식사를 시작하자, 아주 조금씩 말소리가 들려왔다. 자연스러운 대화라기보다는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었다.
그리고 느꼈다. 이제 식당 안에 사람들이 나를 힐끗거리며 쳐다보고 있음을.
‘지난번 테오도르와 헤어진 척했을 때보다 더 심한데…….’
조용히 빵을 씹는데, 입안이 썼다. 뭐, 그래도 어젯밤에 워낙 몸을 움직여서 배가 고팠던 터라, 쌉싸름하니 맛있긴 했다.
잼을 바르면 좀 나을까 싶어 가지러 가기 위해 엉덩이를 살짝 띄웠던 때였다.
“레나티스.”
뜻밖의 사람이 식당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