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31
툭.
투툭.
두터운 카펫 위에 떨어진 검들은 마치 쇠로 만들어진 날카로운 검이 아니라 그저 무거운 돌멩이처럼 둔탁한 소리를 냈다.
마지막으로 남은 기사마저 자신의 검을 바닥에 내던지는 것을 보며, 나는 비로소 들고 있던 활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내가 마지막에 쏘았던 사람을 바라보았다.
“…….”
기괴한 소리를 내던 카르오 대공은 이제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 앞에 내민 손을 나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잡았다. 그리고 그 손과 함께 좀 더 카르오 대공의 가까이 다가갔다.
죽었다.
아무것도 바라보지 못하고, 그저 텅 빈 시선은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내가…… 죽였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
어쩌면 문밖에 더 있을지도 몰랐다.
테오도르를 지키기 위해서, 그의 자유를 위해서,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나는 이곳에 오기까지 12발의 화살을 쏘았다.
맞은 화살도 있었고, 맞지 않은 화살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쏜 화살을 맞은 사람 중에는 어쩌면, 죽은 사람이 있을는지도 몰랐다.
갑자기 생명의 무게가 나를 덮쳐왔다. 그것은 싸늘한 한겨울의 물처럼 차가웠고, 아무리 나라도 들 수 없는 커다란 바위처럼 무거웠다.
그 차가움에, 그 무거움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죽은 카르오 대공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레나티스.”
조용히 테오도르의 손이 내 어깨를 감싸왔다. 그 따스한 손이 내게 닿자, 조금 전까지 느껴졌던 한기가 스르륵 녹아서 사라지는 것 같았다.
“다 끝났어.”
다정한 말이 내 몸을 짓누르고 있는 무게감마저 끌어내렸다.
가벼워진 내가 어딘가로 날아갈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테오도르는 나를 껴안았다.
“네가 끝냈어.”
테오도르의 말이 옳았다. 내가 끝낸 것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잊고 있었던 사실이 되살아났다.
“테오도르.”
그의 눈이 거의 붉었다. 나는 테오도르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내 어깨를 감싸 쥐었던 손이, 사실은 살짝 떨리고 있었음을 이제야 알아차렸다.
온전히 잠재우지 못한 광증이 아직 테오도르에게 남아 있었고, 그것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전 카르오 대공의 시신을 가지고 나가고, 이후의 지시는 밖에 있는 기사 글라우스에게 받도록.”
테오도르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기사들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카르오 대공의 지시에 따랐다.
“테오도르!”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테오도르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을 벌리지도, 혀를 들이밀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입과 입을 맞추고, 꽉 껴안았다.
그렇게 서로의 존재가 오롯이 여기에 존재함에 안도했다.
여실히 느껴지는 테오도르의 형체에, 살아있음을 뜻하는 체온에, 나는 비로소 정말로 모든 일이 끝났음을 만끽했다.
“아…….”
입술에 살짝 테오도르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닿았다. 일은 끝났지만, 수습은 아직 남아 있었다.
“서둘러야겠어요.”
나는 허리춤에서 인스트에게 받은 단검을 빼 들었다.
사실, 뒷일은 거의 인스트에게 맡긴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가 카르오 대공의 시신을 가지고 내려가서 바깥의 전투를 멈출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카르오 대공이 탄생하였음을 알릴 것이다.
“아! 소리가 멈췄어요.”
나는 단검을 쥔 채, 창문가로 다가갔다. 카르오 대공의 시체를 나눠 든 기사들과 그 앞에 선 인스트가 보였다.
“모두 멈추시오!!”
시끄러운 함성들 때문에 과연 인스트의 목소리를 그들이 들을 수 있을지 걱정했던 것이 우스울 정도로, 인스트의 말 한마디에 모든 사람이 멈췄다.
“싸움은 이제 끝났습니다. 니제르 드 카르오가 죽었습니다.”
아까보다 훨씬 작은 목소리였지만, 정적 속인지라 인스트의 목소리는 더욱 또렷하게 들렸다.
“준비됐어요?”
나는 단검을 내 손가락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꼭 그래야…… 하나?”
“네?”
“네 손에 꼭, 상처를 내야 하냐고.”
자신의 아버지이자, 제국에서 황제 다음가는 권력자이며, 평생을 자신을 억압했던 사람에게는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맞섰던 사람이 내 손가락에 작은 상처를 내는 일에는 망설이고 있었다.
심지어 지금도 광증의 고통으로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는 것이 내 눈에 보이는데도 그는 더 참을 수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이미 다 끝난 이야기잖아요.”
나는 인제 와서 테오도르가 내 피를 마시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초조해서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속삭였다.
뭐라고 하는지는 몰라도 밖에서는 인스트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아마도 우리가 미리 계획했던 연설이리라 생각했다.
카르오 대공은 죽었고, 이제 새로운 카르오의 시간이 되었고, 이기적이고 독단적이었던 전 카르오 대공과는 달리 새로운 카르오 대공은 평화와 협력을 추구할 것이며, 내부적으로는 어쩌고저쩌고, 블라블라블라.
흡사 선거에 나간 사람처럼 장밋빛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자, 얼른 요.”
나는 얼른 단검으로 엄지를 베어냈다. 붉은 피가 금세 몽글몽글하게 맺혔다. 그리고 그것을 얼른 테오도르의 입 앞에 가져다 대었다.
이미 상처가 나 버린 뒤라서 그런지, 테오도르는 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순순히 입을 벌렸고, 내 손가락은 빨려 들어가듯이 테오도르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조금 전에 내 손가락에 상처가 나는 것을 저어했던 것이 무색하게 테오도르는 내 손가락을 아플 정도로 빨아 당겼다.
“읏!”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신음을 내뱉자, 힐끗 테오도르가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이내 강하게 내 손가락을 누르고 있던 혀에 힘을 풀고, 대신 넓게 만들어 느릿하게 핥아 올렸다.
‘이 사람이! 지금 급한데!’
야릇하게 내 손가락을 핥아 올리는 테오도르를 보며 나는 속으로 펄쩍 뛰었다.
겉으로 펄쩍 뛰지 않은 이유는, 이제부터 테오도르가 해야 할 일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테오도르가 내 손가락을 빨아당기고, 핥은 효과가 벌써 나타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보라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됐어요.”
나는 황급히 테오도르가 물고 있던 내 손가락을 잡아 뺐다.
아직 완전히 보라색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라면 곧 돌아올 터였다.
테오도르는 아쉬움이 남는 눈으로 나를 보긴 했지만, 더 말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나는 어깨를 다친 테오도르를 대신하여 몸을 숙이고 앞으로가 힘차게 창문을 열어젖혔다. 서늘한 가을밤의 공기가 안으로 훅 밀려왔다.
“새로운 카르오 대공이십니다!”
창문이 열리는 신호에 맞춰서, 마치 연극처럼 아래에서 인스트가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테오도르는 별 말하지 않고, 다치지 않은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길었던 손톱은 오간 데 없는, 그저 조금 크고 섬세한 손가락이라는 것 외에는 별것 없는 정상적인 손이었다.
그의 손짓에 아래에서는 함성이 들려왔다.
나는 테오도르의 뒤편에서 살짝 고개를 옆으로 빼, 그의 허리 옆으로 아래의 상황을 보고 있었다.
모두가 함성을 지른 것은 아니었다. 카르오의 사병들은 아직 혼란스러워 보였다.
자신들의 패배도, 갑자기 바뀌어버린 자신들의 주군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 같았다.
“오늘의 전투는 누군가가 이기고, 누군가가 진 전투가 아닙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며, 미래를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함성이 조금 잦아들고 나서, 테오도르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모두 새로운 카르오의 든든한 우군입니다.”
테오도르는 한마디의 말로, 현재 카르오의 사병들을 전부 수용하겠다는 뜻과 함께 자신을 도와준 가문들과의 우호를 약속했다.
다시 함성이 터졌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큰 함성이었다.
“함께 새로운 미래를 엽시다.”
테오도르가 그들의 함성에 답하듯 한 손을 들자, 그것이 부채질이 되어 함성은 더욱 커졌다.
‘위험해!’
그리고 나는 함성을 느낄 새도 없이, 재빨리 테오도르의 등 뒤로 다가가 그를 떠받들었다.
마지막 말을 겨우 끝낸 테오도르가 살짝 휘청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기절하지 않고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테오도르의 정신력이 대단한 것이었다.
보통은 내 피를 마시면, 테오도르의 광증은 빠르게 사라졌고, 그만큼 빠르게 기절했기 때문이었다.
“영차!”
내 체격이 자그마해서 다행이었다. 이렇게 내가 테오도르를 떠받들고 있는 것이 앞에서는 보이지 않을 테니까.
거기다가 저기 아래에서 보는 것이라면, 전혀 보이지 않을 게 틀림없었다.
심지어 조그만 여자애가 저보다 훨씬 더 크고, 무거울 남자를 이렇게 떠받치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할 테니까.
나는 테오도르의 상체를 받친 채, 한 손은 그의 허벅지를 잡았다.
그리고 그가 뒷걸음질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채, 뒤로 테오도르를 잡아끌었다.
“이쯤이면 안보이겠지?”
창문에서 한참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살짝 테오도르를 조심스럽게 눕혔다.
역시나, 굳게 닫힌 눈꺼풀이 그가 기절했음을 말해주었다.
“하아…….”
저절로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전투를 멈추고, 새로운 카르오 대공의 모습까지 보여주었으니, 이제 정말로 끝이었다.
“수고했어요.”
나는 허리를 구부려 잠자는 나의 왕자님에게 입을 맞췄다.
인스트의 말대로, 내일은 새로운 미래가 시작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