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28
“어머, 참 예쁜 반지네요.”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테오도르는 고개를 돌렸다. 며칠 전에 보았던 얼굴이 거기에 서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오래 보았던 얼굴과 닮은 얼굴이기도 했다.
‘앤마리 드 엘부르.’
테오도르는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되새겼다.
앤마리는 당찬 여자였다. 어찌 보면, 카르오 대공비였던 제 언니 델마보다 더 결단력과 실행력이 빨랐다.
백작인 남편이 바람피웠다는 이유로 이혼장을 내밀고, 치밀하게 모은 증거들로 많은 위자료를 청구했다.
심지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막대한 위자료를 받아내기까지 했다.
다시 엘부르로 돌아온 그녀는 이혼녀라는 타이틀에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늙은 어머니를 살뜰하게 모시며, 심약한 남동생인 엘부르 백작을 옆에서 든든하게 보필했다.
그리하여 대공비가 된 델마와 함께 엘부르 백작 가를 자신의 대에서 더욱 부흥시켰다.
테오도르가 엘부르 백작이 아닌, 앤마리와 접선을 하는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였다.
‘카르오 대공비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고 여기시죠?’
테오도르는 지난번 엘부르 백작 가를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표면적으로는 아르보 백작가를 방문하는 것이었고, 실제로 아르보 백작 가를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사실 아르보 백작 가가 아니라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엘부르 백작 가였다.
자신의 방문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아르보 백작 영애에게 독하게 말한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아르보 백작이 항의하지 않았을 테고, 자신이 그날 방문한 것이 아르보 백작 가가 확실하다는 확증을 카르오 대공에게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델마의 죽음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앤마리였다.
사내가 델마에게 연정을 품는 것은 당연히 가능했다. 델마는 아름다웠고, 사내를 홀리는 매력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죽은 호위 무사는 엘부르 가문의 기사였고, 앤마리도 아는 남자였다.
그가 그토록 오랜 시간 델마를 마음에 품어왔고, 자신이 그걸 몰랐다는 것은 믿기어려웠다.
아니, 설사 자신은 몰랐더라도 눈치 빠른 델마가 누군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었고, 연정보다 권력이 우선인 델마가 자신의 이름을 더럽힐 수 있는 그를 계속 자신의 호위 기사로 둘 리 없었다.
하지만 온전히 테오도르의 말을 믿기는 어려웠다.
카르오 대공이 어느 날 갑자기 카르오 대공비를 없애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것은 당연히 곧장 믿을 수 없었다.
테오도르가 말라붙은 피가 묻은 붕대를 건네기 전까지는.
“성분의뢰를 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 피는 전 카르오 대공비의 것이고, 그 붕대에 묻어있는 먼지들이 지하 감옥의 오래된 먼지들이라는 것을요.
카르오 대공비가 지하 감옥에 갈 이유가 뭐가 있을까요?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그 이유를 카르오 대공이 이야기하던가요?”
천운이었다. 카르오 대공비가 홧김에 집어 던진 제 피가 묻은 붕대를 테오도르를 향해서 집어 던진 것은. 그리고 그것이 테오도르의 바지 어딘가에 붙어서 딸려간 것은.
이 순간에 쓰게 될 줄은 테오도르도 몰랐지만,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뭣하다면, 대공비의 무덤을 파보셔도 좋습니다. 과연 죽은 호위 기사의 칼과 대공비의 상처가 일치하는지, 확인해보시지요.”
물론, 앤마리는 확인했다.
반쯤 썩은 언니의 시신에서 본을 뜨고, 엘부르 백작 가에서 몰수한 죽은 호위 기사에게 하사했던 검으로 확인했다.
일치하지 않았다.
델마는 호위 기사에게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럼, 누가 델마를 죽였을까? 테오도르는, 언니의 아들은, 그것이 카르오 대공이라고 말했다.
언니의 남편이, 언니를 죽였다고 말했다. 사실 언제나 그랬다. 여자가 살해당하면, 범인은 남편이었다.
“저도 바로 이런 다이아몬드를 찾고 있었거든요. 저에게 양보해주시면 안 될까요, 젊은 신사분?”
앤마리가 테오도르가 제시한 접선 장소에 나타나 이 말을 한다는 것은 성분의뢰가 끝났고,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는 뜻이었다.
또한, 테오도르가 제시한 대로 언니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서 거사에 동참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얌전한 여성분이라면 이건 어떤가요?”
앤마리의 말에 테오도르는 그녀가 가리킨 반지를 쳐다보았다.
6월의 탄생석인 진주였다.
‘6일도 괜찮긴 하겠지만, 이번 광증은 늦게 찾아올 수도 있겠지.’
이미 달력을 보며 광증이 나올 법한 날의 계산은 끝난 뒤였다.
주기를 계산하던 그 날, 테오도르는 오래간만에 레나티스와 마주치기까지 했었다.
그때의 애틋했던 레나티스의 눈빛을 보며 그가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던지.
레나티스는 자신도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바로 이럴 때를 위해서 자신이 궁술을 연마한 것이라고 말했다.
테오도르는 망설였다. 그는 레나티스를 믿었지만, 그녀가 다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결국 이긴 것은 레나티스였다. 애초에 테오도르는 레나티스에게 너무 약했다.
다만, 조건이 있었다. 그날까지 더욱 연습에 매진할 것.
레나티스가 연습할 시간을 벌고, 카르오 대공이 혹시나 테오도르의 약혼식에 그녀의 존재를 거슬려 하지 않도록 두 사람은 일부러 싸운 것처럼 연기를 해야 했다.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
테오도르는 오랜만에 마주친 레나티스에게 그렇게 말해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장 그녀에게 달려갔을 테니까.
그녀의 애처로운 눈에 저도 모르게 레나티스에게 뛰어가, 며칠 동안 보지 못했던 만큼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고, 또 껴안고, 입을 맞추고야 말 것 같았다.
다행히 테오도르의 입 모양을 알아들은 레나티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서 망정이지, 정말 1초만 더 레나티스와 눈을 마주하고 있었더라면, 테오도르는 그녀를 복도에서 쓰러뜨리고 말았을 것이다.
“글쎄요.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인지라 좀 과한 것 같은데?”
“어머, 정말 까다로운 분이셨네?”
테오도르는 6일은 너무 빠르다는 뜻을 담아서 말했다.
남의 눈을 피해 탄생석으로 날짜를 말하기로 한 터라, ‘얼마 되지 않은 사이’라는 말이 너무 빠르다는 뜻임을 앤마리는 즉각 알아차렸다.
“그럼, 이 화이트 오팔은 어떠세요?”
그래서 10월의 탄생석인 오팔을 가리켰다.
만약 이것도 빠르다고 한다면, 그 옆에 있는 5월의 탄생석인 에메랄드와 9월의 탄생석인 사파이어가 함께 박혀 있는 반지를 권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괜찮군요.”
테오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날짜라면 넉넉할 터였다.
거사는 다가오는 10일로 정해졌다.
* * *
“와장창!”
밤의 고요함이 순식간에 부서졌다.
“고귀한 고위 마족인 내가 왜 이런 짓까지 하느냐고.”
밤의 고요함을 부서뜨린 장본인인 스기엔은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부탁받은 대로 레나티스의 방 창문에 정확하게 돌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설치해놓은 간단한 장치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창문과 굴뚝에 묶어놓은 밧줄과 고무줄, 돌을 놓았던 천까지.
손은 없었지만, 스기엔은 머리에 난 뿔같은 부분과 통통거리는 움직임, 그리고 입을 사용해서 제법 맡은 임무를 잘 수행했다.
‘그때 그 열매를 따다 주지 않았으면, 이런 귀찮은 일이 안 생겼지.’
예전 레나티스가 식사를 못 해서 기운이 없어 보이기에, 나무 열매를 좀 따다 주었더니, 엄청나게 기뻐했었다.
우쭐대며 높은 곳에 있는 나무 열매를 어떻게 땄는지, 자신이 얼마나 점프를 잘하는지, 자랑했더니 레나티스는 또 엄청나게 칭찬했었다.
그때는 몰랐다. 레나티스가 그 일을 기억하고, 이런 일을 부탁할 줄은.
지금 스기엔은 묘령의 침입자 역할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침입자 역할을 해야 하는 레나티스는 창문에 한 발을 올리고, 다른 한발은 의자에 올려 매우 불편한 자세로 침대를 향해서 활을 겨누고 있었다.
“좀 더 옆인가?”
레나티스는 조금 전에 스기엔이 깨트린 창문 구멍을 보며 팔의 각도를 조금 조정했다. 그리고 평소보다 활시위를 당기는 힘도 뺐다.
화살이 먼 바깥에서 쏘아져서 깨진 창문 구멍 사이로 통과해서 방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보여야 했다.
레나티스는 그동안 연습한 대로 곡예와 같은 자세로 활를 쏘았다.
푹! 하고 화살이 베개에 박히는 순간, 레나티스는 얼른 창문을 아래만 살짝 열어 그 사이로 방금 쏘았던 활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스기엔이 제 몸보다 더 큰 활을 제 머리에 이었다.
“대체 고위 마족인 내가 왜 이런 하찮은 인간 일을 도와야 하냐고.”
탄력 있는 몸통을 이용해서 단숨에 지붕 위로 다시 뛰어오른 스기엔이 투덜거렸다.
“스기엔! 고마워!”
그때였다. 깨진 창문 너머로 레나티스의 뽀얀 얼굴이 떠오르고, 스기엔에게 속삭이듯 소리친 것은.
“…….”
처마에서 그 모습을 본 스기엔의 투덜거림이 쑥 들어갔다. 대신 활을 머리에 인 채 통통거리며 지붕을 가로질렀다.
조금 전에 밧줄이며 천이며를 던져 넣었던 굴뚝으로 똑같이 활을 던져 넣었다.
이미 장작이 아닌 것을 태워서 그런지 매캐한 연기가 나고 있었다.
“칫! 내가 없으면 저 하찮은 인간은 아무 것도 못하니까, 내가 도와주는 수 밖에 없지.”
어두운 밤에 스기엔의 분홍빛 몸체가 은은하게 빛났다.
어느새 여기저기에서 불이 켜지고, 바깥에서 별채로 횃불이 모여들고 있었다.
다급히 침대로 달려가는 레나티스를 향해서.
황급히 레나티스에게 달려가는 테오도르를 향해서.
오랜만의 재회로 꼭 껴안은 채, 계획대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연인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