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27
“대체 저 폭도들의 정체가 뭐냔 말이다!”
일렁이는 횃불 떼에게서 겨우 눈을 떼어낸 니제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그것이 일단 저희가 확인한 깃발은 엘부르 가문과 세르빌 가문입니다. 그리고 푸른 방패의 문양을 언뜻 보였다는 보고에 따르면, 발레리 가문이나 디엣트 가문이 함께한 것이 아닐까 하는…….”
“뭣이?”
하나의 가문이 아니었단 말인가?
니제르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바깥의 상황을 보았다. 확실히 하나의 가문에서 나온 사병이라고 하기에는 인원이 너무 많았다.
현재 제국에서 저 정도의 사병을 거느린 이는 카르오 가문이 유일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압은 가능하겠지?”
“물론입니다. 다만, 적들의 수가 생각보다 많고, 지금 사병의 일부분이 별채 경비에 투입된 터라, 그들을 불러 모으는 데 시간이 소요되고 있습니다.”
“별채에?”
호위 기사의 보고에 니제르는 이를 악물었다. 얼마 전, 별채 습격 사건으로 인하여 사병의 1/3을 그쪽 경비에 투입한 것이 생각났다.
하필이면 이럴 때 군사력이 분산되어 있다니!
‘가만, 혹시 이게 저들이 노렸던 것인가?’
니제르는 눈을 가늘게 떠서 멀리 바라보았다. 어둠을 환하게 밝히는 횃불 덕에 한밤중임에도 적들의 깃발이 아주 잘 보였다.
그들의 선두에 선 엘부르 가문의 문장이 선명하게 그의 눈에 박혔다.
“델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더니, 엘부르 가문에서 이번 일을 꾸민 것인가?”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니제르는 이 결론이 영 석연치 않았다.
‘아무리 델마의 죽음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하더라도, 심증만으로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없을 텐데? 더군다나 저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 압도적인 군사력이 아닌 이상, 감히 카르오를 치겠다는 간 큰 생각을 하지 못할 텐데, 아무리 봐도 그렇게까지 우위로 보이지 않아. 뭔가 다른 믿는 구석이…….’
-으아아아!
-저, 저건 뭐야?
-괴, 괴물! 괴물이다!
니제르의 생각은 복도에서 터져 나온 비명 때문에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황급히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같은 소리를 들은 호위 기사는 니제르에게 등을 보이며 앞을 막아섰다.
또한, 다섯 명의 사병들 역시 그의 앞을 막아서며, 니제르의 앞에 두 겹의 보호막을 만들었다.
쾅!
잠긴 문고리를 부수며, 문이 열렸다. 그 힘에 호위 기사의 눈이 커졌고, 그의 뒤에 숨은 니제르 역시 헉 소리 나게 숨을 들이켰다.
“으…… 으윽…….”
문으로 가장 먼저 들어선 것은 복도를 지키고 있던 카르오 사병 중의 하나였다.
그는 거의 반쯤 뜯겨나간 팔을 다른 한 손으로 붙들고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털썩.
채 몇 걸음 걷지 못하고 그는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상처에 호위 기사와 니제르는 왜 밖에서 비명과 괴성이 터져 나왔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괴…… 물…….”
니제르는 조용히 앞서 들었던 비명에서 나왔던 단어를 읊조렸다.
“…….”
그리고 마치 그의 부름에 응답하기라도 한 것처럼, 테오도르가 방에 들어섰다.
붉은 피가 묻은 양손에는 날카로운 손톱이 길게 자라있었다.
옷과 피부 여기저기에도 붉은 피가 묻어있었고, 그것을 닦으려는 건지 손등이 쓱- 훑고 간 입 언저리에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삐죽이 나와 있었다.
거기다가 피를 닦으려는 손등에는 더욱 많은 피가 묻어있었던 지라, 오히려 테오도르의 입 언저리에는 더욱 많은 피가 묻어버렸다.
마치 방금 그 입으로 사람을 물어뜯은 것처럼.
“괴…… 괴물!”
그 형상을 본 호위 기사의 입에서 저절로 그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그 단어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의 뒤에 있는 니제르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며칠 전에 광증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아직도 광증이 지속되고 있다니? 분명 그 하녀 계집애와 동침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니제르는 자신의 앞에 있는 테오도르를 믿을 수 없었다. 정확하게는 광증의 테오도르를 믿을 수 없었다.
“자주…… 색?”
믿기지 않은 현실에 테오도르를 멍하니 바라고 보고 있던 니제르는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테오도르의 눈은 광증을 뜻하는 붉은 색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평소의 눈동자 색인 보라색도 아니었다.
지금 테오도르의 눈동자는 마치 그사이의 어디쯤인 것 같은 자주색이었다.
“복도는 내가 맡을 테니, 넌 계속 테오도르 님을 엄호해!”
문 바깥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 테오도르의 호위 기사인 인스트의 목소리였다.
“네!”
대답한 목소리는 여성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노란 리본으로 분홍색 머리카락을 높이 묶은 레나티스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니제르를 단단히 둘러싼 사병들을 보며 잠시 흠칫하는 것 같았지만, 레나티스는 이내 들고 있던 활의 시위를 당겨 그들을 조준했다.
“테오도르…… 네놈이 감히!”
이 모든 일을 꾸민 것이, 저 밖의 폭도들의 믿는 구석이라는 것이, 지금 눈앞에 있는 테오도르라는 것을 알게 된 니제르가 테오도르의 이름을 씹어 뱉었다.
“별채 습격은 전부 네가 꾸민 짓이로군?”
어쩌면 별채의 습격이 양동작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니제르도 했었다.
뛰어난 암살자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다녀간 것이 수상했다.
하지만 그것이 설마 이렇게 며칠 뒤에 일어날 일을 위한 양동작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양동작전도 아니었다.
별채로의 사병 분산, 정문의 공격, 그리고 본채의 습격. 삼중작전이었다.
이기적이고, 악할지언정, 니제르는 멍청하지 않았다. 그는 단번에 지금의 사태를 파악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라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대체…… 광증을 어떻게 한 거지?”
분명 며칠 전에 광증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다시 광증이 나타났단 말인가?
아니면, 광증을 치료하지 않은 것인가? 하지만 분명 저 하녀와 한 방에 있었고, 신음과 교성이 이어졌다고 들었다. 그러니 분명…….
아니, 분명한 것은 아니었다. 신음과 교성을 들은 이만 있을 뿐, 두 사람의 직접적인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그것은 그저 꾸며낸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광증은 이렇게 며칠씩이나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테오도르가 견디지 못하고, 그야말로 미쳐버렸을 것이 틀림없었다.
니제르의 목이 홱 돌아갔다. 그의 시선은 테오도르의 옆에 선 레나티스를 향했다.
‘저 계집애야.’
분명했다. 저 분홍 머리 하녀가 무슨 수를 쓴 게 틀림없었다.
맨 처음 테오도르의 광증이 발현되었을 때, 그야말로 온전한 광증의 증세를 보였다.
심지어 늦게 발현되어 그런 것인지, 제 형의 발치도 못 따라가는 주제에 광증만은 제 형만큼이나 강했다.
테오도르는 분명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니제르가 급히 몸을 피한 것이었다.
혹여, 테오도르가 폭주할까 봐.
그때와 지금의 다른 점이라면, 저 하녀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알 수 없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니제르의 머리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광증을 겪어보았기에, 그것이 그저 인내한다고 참아지는 것이 아님을 더욱 잘 알았다.
“……궁금한가?”
낮은, 평소 테오도르의 목소리보다 더욱 낮은 목소리가 테오도르의 입에서 나왔다.
마치 무언가를 너무 참아서, 혹은 소리를 너무 내질러서 목이 쉬어버린 것 같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니제르가 눈을 크게 뜬 것은 테오도르의 목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니제르는 테오도르의 원래 목소리가 어떤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 말을 알아들어?”
날카로운 손톱과 이를 봐선 분명 광증의 상태가 분명한데, 테오도르는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다.
“심지어 대답까지 해?”
의사소통까지 가능하다는 사실에 니제르는 그야말로 경악했다.
“그래.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가 당신은 궁금하겠지?”
“…….”
니제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흔들리는 눈동자가 이미 대답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신이 지옥에 가서 풀 수수께끼로 남겨주지.”
테오도르는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레나티스는 활시위를 더욱 세게 당겼다.
* * *
“약혼하신대!”
클레어의 말에 레나티스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속으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과연 자신이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생각해도 연기는 젬병이었다.
처음에 테오도르의 앞에서 기절한 척한 것도 단박에 간파당했고, 눈물을 짜내는 것도 실패한 걸 보면 우는 연기도 전혀 못 했다.
하지만 해야 했다.
레나티스는 클레어가 전해주는 소식들을 들으며 놀란 척을 하고, 상심한 척을 했다.
부족한 연기력이 드러나지 않도록 최대한 말을 적게 하고, 고개를 숙인 채로.
“귀족……이구나.”
이제 슬슬 울어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레나티스는 더욱 세게 허벅지를 꼬집었다. 동시에 진짜로 테오도르가 자신을 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고 상상했다.
거의 세뇌 수준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아주 살짝 눈물이 나왔다.
“아니. 괜찮지 않아.”
레나티스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드디어 성공이었다.
하지만 더는 무리였다.
레나티스는 클레어를 와락 끌어안으며, 연습했던 대사를 읊었다.
자신의 등을 토닥이는 클레어의 손길을 느끼며, 그녀는 양심을 가책을 느꼈다.
‘미안해, 클레어. 사실은 네가 위로해줄 일은 없어. 정말 미안해. 다음에 내가 맛있는 것을 사줄게. 아니면 예쁜 리본을 선물할게.’
레나티스는 클레어를 속인 것에 대해 미안함에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맺혀 있던 남은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