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21
삐딱한 시선이었다. 테오도르를 바라보는 니제르의 시선은 한 번도 바른 적이 없었긴 했다. 하지만 오늘은 더욱 심했다.
“아르보 백작 가를 방문했다고?”
테오도르는 대답 대신 니제르를 바라보았다.
“절 미행이라도 하십니까?”
“아르보 백작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네가 왔었다고.”
“네. 앞으로 부부가 될 사이이니, 아르보 영애를 한번 만나봐야 할 것 같아서요. 약혼식장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면, 너무 어색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럼, 그 계집애의 존재를 소개한 것도 침대에서 막상 3명이 맞닥뜨리게 되면 어색할까 봐 그런 것이냐?”
“아니요. 침대에서 맞닥뜨리지 않게끔, 비켜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테오도르의 말이 어이가 없어 니제르는 코웃음을 쳤다.
자신의 의견을 구하지 않고 부득불 결혼을 시키려고 하자 테오도르가 반항 중이라는 것을 니제르는 알았다.
“아르보 백작의 말은 다르던데? 너와 단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나서 제 딸 아이가 결혼하기 싫다고 울고 있다고 하더구나.”
“그래서요?”
테오도르가 고개를 돌려 삐딱한 시선으로 니제르를 쳐다보았다. 니제르가 처음에 테오도르를 보았던, 그 시선과 똑같았다.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삐뚜름하게 쳐다보는 그 시선과.
“상관없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네가 아무리 파투를 내고 싶어, 그따위 짓을 벌인다고 해도, 예정된 날에 약혼식이 거행될 것이고, 네 결혼 또한 날을 정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제가 파투를 내려고 그런 것 같습니까?”
테오도르는 니제르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 영애가 아무리 울고불고 해봤자, 대공께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제 딸을 팔아넘기기로 마음먹은 아르보 백작 역시 작은 항의를 하겠지만, 감히 카르오 대공의 뜻에 거스르지 못하겠죠.”
제법이었다. 제 형의 발치에도 못 미치는 멍청이인 줄만 알았더니,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보고 자란 것이 있어서 둔한 머리에도 눈치와 생각이라는 것이 좀 생겼던지.
“그리고 저 또한 마찬가지이겠죠. 결국 대공께서 뜻하는 대로 제 인생은 굴러가게 될 겁니다. 당신이 원하는 가문의 영애와 결혼을 하고, 언제 발작을 일으킬지 모르는 광증의 아이를 낳고, 언젠가 대공께서 노쇠하시거나 권력에 싫증 나는 날이 오면, 카르오 대공이 되겠지요.”
그렇게 말하는 테오도르의 목소리에는 꼭두각시 인생을 살아야 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
“그래도 그 안에서나마 제 자유를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제가 원하는 여자를 안을 수 있는 자유를요.”
한껏 자신을 노려보는 테오도르였고, 그 안에서 이글거리는 반항심을 니제르는 발견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눈에서 굴복과 굴욕감을 발견한 니제르이기도 했다.
‘덫에 걸린 늑대!’
지금의 테오도르를 본 니제르의 소감이었다. 세
상에서 자신이 제일 강한 줄 알던 늑대가 덫에 걸러 울부짖다가, 결국 자신이 이 덫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자신보다 강한 이에게 굴복하고야 마는 장면을 본 것 같았다.
물론, 그 늑대보다 강한 이는 바로 자신이었다. 니제르는 그 사실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테오도르, 내 아들아.”
이제껏 테오도르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니제르가 그를 불렀다.
“카르오라는 이름의 무게는 그런 것이다. 하지만 그 무게를 짊어진다면, 네가 얻을 수 있는 것 또한 아주 비싸고 무거울 것이야.”
니제르는 자신을 바라보는 상처받은 늑대를 향해서 제법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어리를 흔들었다.
굴복하고, 복종하면, 그가 얻게 될 포상이었다.
이 정도는 승리자가 패배자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관용이었다.
* * *
“정말 너무하세요!”
문 너머에서 들려온 앙칼진 목소리에 지아는 귀를 쫑긋 세웠다. 세탁을 위해서 걷어내고 있던 복도 창문의 커튼에서 손을 뗀 것도 당연했다.
지금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두꺼운 방문 때문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지아의 마음속에서 아주 약간의 갈등이 생겼다.
저 방은 이 저택의 주인이자, 카르오 대공 가의 주인인 테오도르 드 카르오의 방이었다.
당연히 고용인은 그의 사생활에 관심을 가져서도, 몰래 엿들어서도 안 되었다.
하지만 지아는 이미 들어버렸고, 이 뒷이야기가 너무도 궁금했다.
애초에 지아는 궁금한 것을 참지 못했다. 특히나 누군가에게 생긴 무슨 일이라면 더욱!
‘분명 그 분홍 머리 하녀의 목소리인 것 같은데?’
어느 날 갑자기 카르오 저택의 별채로 들어온 분홍 머리의 하녀는 그야말로 특별대우를 받아 들어오자마자 테오도르의 전담 하녀가 되었다.
말이 전담 하녀지 하는 일이라곤, 원래 리타 부인이 하던 일의 일부인 테오도르의 차 시중을 드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느 날부턴가는 잘생긴 테오도르의 잘생긴 호위 기사인 인스트로부터 뒤뜰에서 활쏘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흥! 제법 귀여운 얼굴과 그에 어울리지 않는 몸매로 어지간히 꼬리를 친 모양이지?’
잠시 흔들렸던 지아의 마음은 이내 질투로 우뚝 섰다. 손에는 걸레를 들고, 발은 까치발을 든 채로 살금살금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만약에 갑자기 누가 나오기라도 한다면, 문손잡이에 뭐가 묻은 것이 보여 닦고 있었다고 하면 될 일이었다.
지아는 나중에 변명을 위해서 대충 앞치마로 문손잡이를 잡고, 얼굴을 옆으로 하여 귀를 문에 거의 붙이듯이 가져다 대었다.
“저를 사랑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그렇게 말했지.”
“그런데 다른 여자랑 약혼한다고요?”
소리치고 있는 여자의 목소리는 그 분홍 머리 하녀가 분명했다. 그리고 이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는 이 방의 주인인 테오도르가 분명했다.
‘세상에! 역시나 그랬어! 어쩐지! 오자마자 별로 일도 하지 않고 먹고 놀더라니! 몸으로 테오도르 님을 꾀었던 거로군?’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파악한 지아는 더욱 귀를 쫑긋 세웠다. 이제껏 속으로만 짐작했던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자 더 그랬다.
바야흐로, 자신은 지금 남녀의 치정 싸움을 엿듣는 중이었다. 세상에 불구경을 제외하면 싸움 구경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뭐가 있겠는가?
심지어 귀족과 평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고, 둘 다 자신이 아는 사람이었으며, 남자 쪽은 근사하고 잘생긴데다가 자신이 모시고 있는 분이었다.
지아가 엿듣지 않으려야, 엿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어쩔 수가 없어. 네가 이해해야지.”
“뭘 이해하란 말이신가요? 테오도르 님이 절 두고, 다른 여자랑 결혼하는 걸 이해하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단호한 목소리에 그 분홍 머리 하녀는 할 말을 잃었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어쩌면 울고 있는지도 몰랐다.
“네 말대로 난 아르보 백작 영애와 결혼 할 거야. 하지만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변할 게 없어.”
“테오도르 님이 결혼하는데, 아무것도 변할 게 없다고요?”
“그래. 너와 나 사이는 변할 게 없어.”
또다시 분홍 머리 하녀는 말이 없었다. 지아는 그녀가 뭐라고 할지 궁금해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더러 정부가 되라는 건가요?”
이번에는 테오도르가 말이 없었다.
“그래.”
하지만 잠시 후, 테오도르가 긍정의 말을 내뱉었다.
-짝!
‘세상에! 저 애가 미쳤나 봐!’
테오도르의 말이 끝남과 거의 동시에 들려온 파열음에 지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에서 들린 정황과 조금 전에 들린 소리를 조합한다면, 분명 그 분홍 머리 하녀가 테오도르의 뺨을 때린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 뺨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 하녀가 테오도르 님에게 손을 댄 것은 틀림없었다.
‘쟤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나 봐! 아무리 자기가 테오도르 님에게 귀염을 받는다고 해도, 어디 감히 평민 주제에, 거기다가 하녀인 주제에, 테오도르 님의 몸에 손을 대?’
제가 엿들은 상황을 보아하니,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해서 그 분홍 머리가 머리끝까지 화가 난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감히 귀족인데다가 고용주인 테오도르 님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당신을 믿은 내가 어리석었어요!”
‘아! 온다!’
마치 연극 속,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말이 들리고, 자신의 쪽으로 뛰어오는 것 같은 발소리가 들리자, 지아는 재빨리 몸을 돌려 벽 쪽으로 붙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짐작대로 문이 열리고, 안에서 그 분홍 머리 하녀가 뛰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분홍색 머리를 휘날리며 저 멀리 복도를 내달렸다.
‘쯧쯧. 그러게, 자기 분수를 알았어야지.’
지아는 텅 빈 복도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이라면 카르오 대공 가의 후계자를 꼬인 뒤에, 미리 한 몫 두둑하게 챙겨서 미련 없이 이 저택을 나갔을 것이다.
언감생심 자신이 이 저택의 안주인이 되거나, 테오도르의 부인이 되겠다는 꿈 따위는 절대로 꾸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 분홍 머리 하녀는 감히 꿈을 꿨던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진심으로 테오도르를 사랑해버렸던가.
‘어찌 됐든, 여자만 손해지, 뭐.’
지아는 혀를 끌끌 차며 떼다 만 커튼 쪽으로 발을 향했다. 아직, 커튼은 많았고, 그녀가 해야 할 일은 그보다 더 많았다.
거기다가 일이 끝나고 나서도 해야 할 일이 생겨버렸다.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