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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120화 (120/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20

순식간에 공기가 바뀌었다고, 이젤다는 생각했다. 아르보 백작이 응접실을 나가면서 잠시 열린 문으로 들어온 차가운 공기 때문은 아니었다.

“…….”

이젤다 앞에 앉은 저 남자 때문이었다.

조금 전까지 웃는 낯이었던 남자는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그 웃음기를 싹 걷어냈다.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자, 더욱 조각 같아 보였다.

아무런 온기도, 감정도 없는 조각.

“당신 앞에서까지 굳이 웃지는 않아도 되겠지. 앞서 말했듯이 평생 함께 살 사이가 될 텐데, 당신 앞에서까지 연기를 하자니, 피곤할 것 같아서 말이야.”

목소리마저 아까와는 확연히 달랐다. 아버지와 말할 때보다 훨씬 낮아진 중저음의 목소리는 분명 멋있었지만, 역시나 차갑기 그지없었다.

“길게 말하지 않겠어. 내가 당신에게 요구할 것은 하나뿐이야.”

이제부터 본론이라는 듯이, 테오도르는 살짝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 작은 몸짓에 이젤다는 움찔했다.

낯을 가리고, 겁이 많은 이젤다는 이제껏 남자와 대화를 한 것은 지극히 손에 꼽을 정도였고, 이렇게 단둘이 한 공간에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테오도르 드 카르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그냥 남자가 아니었다. 자신과 결혼할 남자였다.

이젤다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어 테오도르를 마주했다.

신비한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이젤다는 속절없이 그에게 빠져드는 것과 동시에 얼어붙었다.

마치 설원에서 아름답고 흉포한 늑대를 맞이한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내게 만나고 있는 여자가 있어.”

잔뜩 긴장한 채 테오도르의 말을 듣고 있던 이젤다는 금방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당신과 결혼을 하고 나서도 계속 만날 예정이야.”

이젤다가 겨우 용기를 낸 대가는 그것이었다.

자신의 남편 될 사람이, 자신에게 정부가 있음을 밝히는 것. 그리고 그녀를 계속 만날 것이라고 뻔뻔하게 선언하는 것.

아름다운 늑대는 이젤다가 그의 신비로운 눈동자에 홀려 있는 사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그녀의 가슴을 할퀴었다.

“지금도 나와 함께 카르오 저택의 별채에서 지내고 있는데, 그 역시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 그럴 예정이야.”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듯이 서슬 퍼런 이빨로 이젤다의 목을 물어뜯었다.

“당연히 당신에게는 그걸 반대할 권리는 없어. 그리고 이건 당신에게 동의를 구하는 과정도 뭣도 아니야. 그저 결혼하기 전에 알아두라는 나의 배려지.”

배려? 이렇게 막돼먹은 것이 배려라고?

“동시에 경고이기도 해. 만약에 내 사랑스러운 그녀에게 손끝이라도 댄다면, 당신의 결혼생활이 아주 피곤해질 거라는 경고.”

차라리 이쪽이 말이 되었다. 테오도르가 한 말은 되먹지 못한 경고라는 것이 옳았다.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야.”

“…….”

테오도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했으니, 이제 당신이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는 듯이 말했지만, 이젤다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결혼을 하기도 전에 이미 외도했으며, 앞으로도 당당히 외도할 것이라고 말하는 남자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인지 착하고, 상식적인 이젤다는 알 수 없었다.

“딱히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니, 나는 이만 돌아가지.”

대답을 듣지도 않고, 테오도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젤다를 남겨둔 채, 그대로 응접실에서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이젤다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결혼이 이런 것이던가? 남편이라는 사람은 저런 것이던가?

적어도 이젤다가 막연히 꿈꾸던 결혼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저 행복한 결혼을, 사이좋은 부부를 꿈꿨던 이젤다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틀림없이 자신의 결혼생활은 불행하리라.

이젤다 드 카르오는 반드시 불행하리라!

“이젤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이젤다는 고개를 들었다.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아버지가 보였다.

“아, 아버지.”

이젤다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저, 저…… 이 결혼 하지 않으면…… 아, 안될까요?”

7살 생일에 금발의 어여쁜 인형이 갖고 싶다고 말한 이래로, 이젤다가 이렇게 분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 * *

“레나티스!”

복도를 달려오는 클레어의 안색이 창백했다.

“크, 크, 큰일 났어!”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어?”

정말 큰일이 난 것 같은 클레어의 표정을 보고 나는 놀라서 물었다. 하지만 정작 클레어는 숨을 몰아쉬느라 큰일이 뭔지 말하지 못했다.

혹시, 점심에 나올 빵이 모자란다는 걸까? 그거라면 큰일인데! 오늘은 테오도르도 없어서 식당에 내려가서 밥을 먹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면, 그 정보통 소피 언니에게 뭔가의 최신 소식이라도 들은 걸까? 드디어 마손 아저씨와의 결혼?

으아아아! 뭔데, 뭔데! 원래 사람을 가장 미치게 만드는 첫 번째는 말을 하다 마는 거고, 두 번째는…….

“약혼하신대!”

숨을 한번 크게 몰아쉬고, 드디어 클레어가 입을 열었다. 덕분에 사람의 미치게 하는 두 번째는 내 머릿속에서 단번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저기, 클레어. 주어가 빠졌는데?”

나는 침착하게 클레어에게 말했다. 이전에도 이 주어가 빠진 경조사를 내가 이미 한번 착각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클레어는 아주 훌륭한 언변술사였다. 기가 막히게 사람의 가슴을 졸이게 했다.

일단 주어 없이 사건을 냅다 던져놓고, 궁금함을 참지 못한 청취자의 질문에는 뜸을 들였다.

나는 그저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클레어의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테오도르 님이…….”

그리고 마침내 클레어가 내놓은 대답은 그것이었다.

“뭐? 설마!”

그리고 클레어의 대답에 내가 내놓은 대답은 이것이었다.

“테오도르 님이 지난번에 그러셨는걸. 나를 두고 결혼하지 않으실 거라고.”

나는 고개까지 내저으며 클레어의 말을 부정했다. 그리고 클레어는 그런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래.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 그전에도 테오도르 님이 약혼한다는 소문이 떠돌았잖아. 그러고 나서 너에게 테오도르 님과 좋은 관계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뒤에는 약혼 이야기는 쑥 들어갔었기에 그냥 그 이야기는 소문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번에는 그냥 소문이 아니라는 거야?”

내 채근에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피 언니가 그러는데…… 아예 상대방도 정해졌고, 약혼식 날짜도 정해졌나 봐. 지금 본채에서는 벌써 약혼식 준비를 한다고 난리라고 하더라고.”

“그, 그럴 리가 없어. 테오도르 님은 분명히 나밖에 없다고 하셨는데!”

나는 고개를 흔들며 클레어의 말을 부정했다. 그러자 클레어가 나를 더욱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나도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서 속상해. 하지만 너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하는 거야.”

“그래. 알아. 네가 나를 위해서 말해준다는 걸. 하지만, 하지만! 난 믿을 수가 없어.”

나는 아플 정도로 허벅지를 꽉 쥐었다. 내가 좋아하는 메이드복의 치마에 주름이 지고, 그 아래의 살이 뭉그러질 정도로 세게.

“대체…… 누구인데?”

“응?”

“구체적으로 누구랑 언제 약혼하는지까지 말이 나왔다며. 테오도르 님이 대체 누구랑 약혼한다는 건데?”

나는 전혀 들은 적이 없는 테오도르의 약혼녀에 관해서 물었다.

“아르보 백작 가의 영애라고 들었어.”

“아르보 백작 가…….”

나는 클레어에게 들은 이름을 다시 중얼거렸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녀의 이름마저도 난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내가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있었다.

“귀족……이구나.”

나와는 다르게.

이미 허벅지를 아프게 잡고 있던 손에 더욱 세게 힘이 들어갔다.

테오도르가 결혼한다. 내가 아닌 사람과, 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그의 신분에 맞는 귀족 영애와, 테오도르가 결혼한다.

몇 번이나 나는 머릿속에서 그 말을 되뇌었다.

“레나티스…….”

힘없이 내 이름을 부르는 클레어가 뿌옇게 보였다. 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아.”

클레어의 말에 대답함과 동시에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 눈물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나는 클레어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떻게 테오도르 님이 나에게 그럴 수가 있지? 나만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신분 따위에 상관없이 날 사랑한다고 하셨는데? 그런데,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고?”

테오도르를 원망하는 내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 그래. 알아.”

내가 어깨를 들썩이자, 클레어는 작게 속삭이며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클레어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리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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