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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118화 (118/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18

슬라임과 인간의 우호적인 첫 만남을 조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

“…….”

일단 침묵을 지키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게 알겠다.

“저기, 테오도르 님. 이쪽은 스기엔, 전에 제가 말씀드렸었죠? 제가 책에서 찾아보려고 하는 바로 그 생명체입니다.”

“그래. 그때는 대체 뭘 말하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눈으로 보니 네가 말한 그대로 이긴 하군.”

“그리고 스기엔? 이쪽은, 테오도르 님. 몇 번 뵈었지? 그…… 음…….”

테오도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어려웠다. ‘드 카르오’라고 설명하기엔, 조금 전 테오도르는 자기가 카르오인 것이 싫다고 했다.

그렇다고 이 저택의 주인이라고 하기에는, 인간과 소유의 개념이 다른 스기엔이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았다.

“알아. 네가 나더러 늘 엿보라고 하는 상대잖아.”

“으아앗!”

내가 테오도르에 대한 적당한 소개를 망설이는 사이, 스기엔이 툭 내뱉었다. 나는 허겁지겁 소리를 지르며 그 말을 막으려고 했다.

“엿…… 봐?”

하지만 테오도르는 이미 그 말을 들어버린 후였다. 고개를 스윽 돌려, 어디 한번 해명해보라는 눈빛으로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게……. 엿봤다기보다는…….”

“정찰.”

“네. 그렇죠. 정찰……은 아니었습니다! 테오도르 님이 적도 아닌데 제가 무슨 정찰을 하겠어요! 그냥, 전 잘 계시는지 궁금해서 스기엔더러 살짝 살펴보고 오라고 부탁했을 뿐이었어요.”

스기엔이 시키는 대로 단어를 정정했다가, 그게 더 이상하다는 사실을 금세 깨닫고 다시 황급히 정정했다.

“언제?”

“네?”

“언제부터 날 그렇게 엿본 거지?”

“아니! 엿본 게 아니라요! 그냥 잘 계시는지 본 거였어요! 그러니까, 제가 이 저택에 왔던 초반에요. 뭐, 식사는 하셨는지, 광증은 괜찮으신지, 잠은 잘 주무시는지…….”

원래의 내 목적은 가운데에 슬쩍 끼워놓고, 테오도르의 눈치를 힐끗 살폈다.

“엿보기나 정찰이라기보다는, 염탐이었군?”

“말이 그렇게 되나요?”

염탐의 정확한 뜻은 모르겠지만, 뭔가 변태스러운 엿보기나 적으로 간주해버리는 정찰보다는 나은 거 같았다.

그래서 은근슬쩍 그쪽에 발을 걸치기로 했다.

“그래. 염탐의 결론은 뭐였지?”

“그냥 잘 계신다고만 들었던 것 같은데요.”

“난 뭘 하고 있었는데?”

“어…….”

나는 이전에 스기엔과 했던 대화를 떠올리려고 애써보았다.

“주무시고 계셨나?”

“그래?”

“아마도요?”

“옷을 갈아입고 있거나.”

“아니에요!”

“씻고 있거나.”

“절대로요!”

“혹시 알몸으로 자고 있었던 건…….”

“알몸으로 원래 주무시지 않잖아요!”

이건 확실했다! 불과 며칠 전에 내가 자는 테오도르를 구경하러 갔을 때, 테오도르는 분명히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전에 광증이 나타났을 때도 옷은 다 입고 있었었다.

“그건 어떻게 아는데?”

“네?”

“내가 옷을 입고 자는지 어떻게 아는데?”

“…….”

“너와 함께 잘 때는 거의 입지 않고, 그대로 잤던 걸로 기억하는데?”

“…….”

나 지금 함정에 빠진 건가?

“굳이 염탐하지 않아도, 네가 원하면 씻는 거든, 옷 갈아입는 거든, 알몸으로 자는 모습이든, 모두 그냥 보여 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아, 아니. 저는 괜찮은데요.”

“왜, 싫어?”

“싫은 건 아니지만…….”

싫은 건, 딱 잘라서 거절하지 못하는 나였다. 아니, 그게, 궁금하긴 하잖아! 옷을 갈아입는 테오도르나, 욕실의 테오도르나, 그 밖에 이런저런 모습의 테오도르라면 궁금한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작작 좀 하라고.”

스기엔의 한숨과 짜증이 섞인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사내놈의 벗은 모습 따위 전혀 궁금하지 않아. 오히려 여기서 벗는다면 죽여버리겠어.”

오동통한 몸에 어울리지 않게, 스기엔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테오도르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야말로 지금 발가벗고 있는 것 같은데, 뭐라도 좀 입지 그래?”

“뭐?”

“심지어 몸이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몸 뒤편까지 보이잖아.”

테오도르는 몹시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인상을 쓰며 스기엔을 바라보았다.

“하! 감히 하찮은 인간 주제에 위대하신 고위 마족 님에게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하찮은 인간이 위대하신 젤리 푸딩에게 옷이나 입으라고 지껄이는 거다만?”

“뭐? 젤리 푸딩?”

스기엔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야생의 짐승처럼 그대로 테오도르에게 달려들었다.

“그만! 스기엔!”

나는 중간에 끼어들어서, 얼른 스기엔을 낚아챘다.

“놔, 레나티스! 내가 저 하찮은 인간을 찢어발겨 버리겠어.”

“네가 뭉개지는 것이 더 빠를 텐데?”

“그만 하세요, 테오도르 님! 그리고 스기엔도 그만해!”

나는 다시 한번 서로 다른 종의 우호적인 첫 만남을 성사시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스기엔. 테오도르 님은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너무 무례하게 굴지 말아줘.”

나는 스기엔을 들어다가 눈을 똑바로 맞춘 다음에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스기엔이 인상을 찡그리는 것이 보였지만, 내 할 말은 다 했으니 그대로 팔을 접어 그를 품에 안았다.

“테오도르 님도요. 스기엔은 제 친구이니, 좀 친절하게 대해주세요.”

그리고 스기엔과 티격태격하고 있던 테오도르에게도 단호하게 말했다.

테오도르 역시 내 말에 반박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테오도르 님도 이전에 스기엔과 같은 몬스터는 본 적이 없다고 하셨잖아요. 스기엔은 아주 희귀하다고요.”

“동방에서 온 희귀한 애완동물 같은 건가?”

“뭐? 애완동물?”

“아니요.”

애완동물이라는 말에 스기엔이 또다시 발끈하려고 했다. 나는 얼른 스기엔을 더 세게 끌어안은 다음, 테오도르의 말에 반박했다.

“이 세계에 없는 희귀한 생명체라는 말이에요.”

“하지만 지금 이렇게 눈앞에 버젓이 존재하는데, 이 세계에 없는 생명체라고 하는 건 이상하지 않나?”

“이상해요. 하지만 그게 사실인걸요. 스기엔은 스기엔밖에 없어요.”

테오도르의 눈에 스기엔이 보인다는 것은, 스기엔이 적어도 내 상상의 친구는 아니라는 것이 확실했다.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관에서 유일한 몬스터.

나는 고개를 돌려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전 항상 아버지에게 쓸모없는 계집애라는 말을 들었어요. 밥값도 못하는 애라고요.”

“헛소리야.”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정색하며 아버지의 말을 부정하는 테오도르를 보며 나는 방긋 웃었다. 이렇게나 든든한 내 편이 있었다.

“저는 궁술에도 재능이 있고, 차 시중도 잘 들죠. 계속 시골에 살면서 활을 한 번도 잡아볼 일이 없고, 차를 접할 일도 없었다면, 제가 그런 일에 재능이 있는지 전혀 모르고 살았겠죠.”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테오도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죽을 때까지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었을 재능이었다.

“쓸모없는 사람은 없어요. 필요하지 않은 사람도 없어요. 태어난 모든 생명에게는 각자의 가치가 전부 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스기엔도, 테오도르도, 그리고 나도.

인생은 그 가치를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 * *

“오랜만이야.”

인스트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자 나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네. 오랜만이에요.”

사실 그렇게 오랜만은 아니고 며칠 만에 보는 것이었지만, 매일 아침 훈련마다 보다가 이렇게 되니 매우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다리는 다 나았어?”

“다는 아니긴 하지만, 거의 나은 것 같아요.”

나는 보란 듯이 주변을 몇 걸음 걸었다. 이제는 절뚝거리지 않고 걸을 정도는 되었다.

“너무 무리하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라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음……. 나는 좀 무리를 시키고 싶은데 말이지.”

턱을 쓰다듬는 인스트의 얼굴은 매우 진지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랬다가는 누구누구 씨에게 죽을 거 같으니까, 살살 하도록 하지.”

라고 말하고 인스트는 과장되게 눈으로 건물의 위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뭐가 있나?’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위쪽을 쳐다보지만, 딱히 뭔가 이상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인스트가 눈으로 가리킨 커튼이 드리워진 방도 그저 평범한 방이었다.

“아, 맞다! 아스텔라 언니를 여기까지 데려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스트에게 인사했다. 이전부터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둘만 있을 기회가 없었다.

“명령받은 할 일을 한 것뿐이었는데, 뭐.”

“그래도요. 인스트 님이 능력자가 아니셨으면, 언니를 찾지 못하셨을 거잖아요.”

“내 능력을 인정하는 거야? 그렇다고 또 반하면…….”

“으갸갸갹! 안 반했습니다! 절대로요!”

나는 소리를 지르며 인스트의 말을 막았다. 그에게 차이는 것은 이제 사절이었다.

“대체 왜 그런 농담을 자꾸 하시는 거예요?”

“재밌잖아.”

“테오도르 님한테도 그 말씀을 하셨다면서요?”

“응.”

“왜요?”

“재밌잖아.”

“…….”

너무나 쿨한 말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다신 그러지 마세요.”

“안 그래도 그럴 예정이야.”

그리고 너무나 쿨한 대답이 의외였다. 절대 이 장난을 멈추지 않을 줄 알았는데?

“테오도르 님이 날 죽이려고 드셨거든.”

“네?”

“널 매몰차게 찼다고 하니까, 아주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시더라고.”

“…….”

“나도 목숨은 소중하니까.”

어깨를 한번 으쓱이곤, 인스트는 안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일단 상체 위주로 가볍게 몸 좀 풀어 볼까?”

그 말과 함께 결코 가볍지 않은 몸풀기가 이어졌다. 헉헉대는 숨을 몰아쉴 때쯤, 인스트가 빙긋 웃었다.

“자, 이제 우리 진도 좀 나가야지?”

왠지 저 미소가 사악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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