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16
“외출이 잦구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니제르는 그것이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말했다.
테오도르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고 별채의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던 니제르였다.
감히 카르오 대공과 그의 후계자가 대화를 나눌 자리에 다른 이가 끼어들 리 없었다.
“네.”
그리고 그의 짐작대로 서재에 들어온 이는 테오도르였다. 니제르는 그제야 시선을 돌려 제 아들을 쳐다보았다.
물론, 아들을 쳐다본다고 하기에는 너무 차가운 눈빛이기는 했다.
당연했다. 감히 자신을 기다리게 하다니.
니제르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자신이 연락도 없이 별채에 온 것이 불찰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잘못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결혼 전이니 네 정부에게 그렇게 대놓고 선물을 하고, 보란 듯이 옆구리에 끼고 다녀도 괜찮지만, 나중에는 자중해야 할 것이다.”
“…….”
테오도르는 레나티스를 정부라고 지칭하는 니제르의 말에 눈을 치떴다.
당연히 자신을 기다리게 한 테오도르의 심기를 건드리기 위한 니제르의 의도적인 단어 선택이었다.
“아무리 정략결혼이라고는 하나, 부부가 된 이상 서로 존중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말입니까?”
“…….”
이번에는 니제르가 말없이 테오도르를 노려보았다.
한 명의 카르오가 없어지더라도, 남은 카르오들는 여전했다. 서로를 싫어하고, 서로를 미워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냈다.
아마도 최후의 카르오가 남을 때까지 이것은 이어질 터였다.
“네 약혼 날짜를 정했다. 10월 22일이다.”
통보였다. 아니, 명령이었다.
“빠르긴 하지만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약혼식을 하기로 아르보 백작과 합의를 보았다.”
당사자의 의견 따위는 완벽하게 묵살한 명령이었다.
“네가 잊었을까 봐 다시 말해주는데, 네가 약혼을 하고 곧 결혼하게 될 여자는 아르보 백작 가의 차녀인 이젤다 영애다. 듣자 하니 카르오 대공 가에 어울리는 품행이 방정하고, 얌전한 아가씨라고 하더구나.”
“저는 그 아가씨와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너는 하게 될 것이다.”
니제르가 상체를 살짝 숙였다. 자신의 앞에 있는 테오도르를 뚫어지게 보기 위함이었다.
“내 말을 거스르면, 네가 무엇을 잃게 될지 잘 생각해 보거라.”
자신과 똑같은 보라색 눈동자를 똑바로 보며 니제르는 다시 말했다. 감히 자신의 말을 거스르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네가 결혼한다고 해도 지금 하는 그대로 그 애에게 예쁜 옷과 보석도 사줄 수 있을 거야. 네 침대에서 분홍색 머리카락이 발견된다고 해도, 이젤다는 그런 걸로 트집을 잡지도 않을 거야. 하지만 말이다, 테오도르.”
니제르가 좀 더 고개를 숙였다. 창문 너머로 비치던 붉은 노을이 그에게 쏟아져 내렸다.
본디 테오도르와 똑같은 보라색이 틀림없는 니제르의 눈동자가 노을빛을 받아, 지는 해처럼 붉게 보였다.
마치 사라진 젊은 시절의 광증이 되살아난 것처럼 붉은 눈으로 니제르는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그 모든 것들은 그 아이가 살아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 네가 시체에 인형 놀이를 하는 취미가 없다면 말이야.”
“과연, 대공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카르오 가문에 미친놈이 날뛰는 꼴을 2번이나 보시려고요?”
“그래. 그런 문제가 있었지? 그럼 다른 방도가 있겠지. 예를 들면, 빛 한점 들지 않는 지하 감옥에 그 아이를 묶어 가두고, 필요할 때마다 상처를 내어 강제로 피를 흘리게 하면 되겠지.”
“…….”
“처음에는 손목을 좀 긋고, 다음번에는 허벅지를 긋고, 그다음에는 발목을 긋고. 뭐, 손가락 한두 개쯤 없어도 십 년 정도는 너끈히 살겠지.”
그리고 슬쩍, 니제르는 웃었다.
핏기없이 창백한 안색으로 굳어진 제 아들의 얼굴이야말로 시체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게. 적당히 까불었어야지. 제 형에 비하면 반쪽짜리에 불과한 놈이.
니제르는 테오도르의 얼굴을 보고 느긋하게 숙였던 상체를 뒤로 젖혔다. 이제 드디어 니제르는 꽤 괜찮은 마리오네트를 얻었다.
능력은 반쪽짜리 마리오네트였지만, 어쨌든 겉모습은 꽤 쓸만하지 않는가? 그리고 자신이 조종한다면 더욱 쓸모 있게 되리라.
* * *
딱.
입안에서 손톱이 이와 맞부딪혔다. 단단한 엄지손톱이었지만, 이에는 당하지 못했다.
부스러진 손톱의 잔해가 입안에서 거슬렸다.
“괜찮을까?”
카르오 대공의 뱀 같은 눈동자를 떠올리자 다시 불안감이 솟구쳐 올랐다. 이제껏 그가 등장하고 나서 괜찮았던 경우는 없었다.
당장은 사태가 일단락되더라도, 결국엔 더 큰 문제를 맞이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난동을 막았지만, 아버지가 죽었다거나, 대공비에게 죽을 뻔한 것을 카르오 대공이 막아주었지만, 대신 대공비가 죽었다거나…….
이 정도면, ‘카르오 대공’이 아니라 ‘사신 카르오’라고 불러야 하는 것 아닌가?
“어쩌지? 테오도르에게 가봐야 하나?”
나는 방안을 서성거리던 발을 문 쪽으로 돌렸지만, 나가지는 못했다.
카르오 대공과 테오도르 사이에서 내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방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가 이렇게 무기력하다고 느낀 것은 꽤 오래간만이었다.
“아! 좀!”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잔뜩 인상을 쓴 스기엔이 보였다.
“그만 좀 왔다 갔다 하고, 손톱 좀 그만 물어뜯고, 그놈의 한숨도 좀 그만 쉬어! 진짜 정신없어 죽겠네!”
스기엔은 자신의 불만을 전부 소리쳤다. 저렇게 자기 할 말 다 하고 사는 삶이라니 참으로 부러웠다.
그래서 나이에 비해서 주름살이 하나도 없는 걸까? 정확히 몇 살인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불안하단 말이야.”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며. 자기 아버지가 설마 자기 아들을 죽이기야 하겠어?”
“그런 전적이 있긴 해.”
“뭐?”
“자기 아들을 죽인 전적이 있는 아버지야.”
“…… 인간들이란 참 지독한 것들이군.”
잠시 말이 없던 스기엔이 내뱉은 냉정한 평가였다. 그리고 솔직히, 맞는 말이었다.
“어쨌든 네가 활을 들고 용감하게 그놈을 구하러 갈 게 아니라면 좀 앉아. 정신없어 죽겠으니까.”
“스기엔은 지금 내 마음을 몰라. 나는 테오도르가 너무 걱정된단 말이야.”
“어. 몰라. 내가 아는 건, 네가 그렇게 손톱을 다 먹어 치우면 나중에 후회할 거라는 거야.”
그의 말에 내 손톱을 쳐다보았다. 이미 엄지와 검지가 흉하게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스기엔의 말이 옳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고, 나중에 손톱을 다시 다듬는다고 해도 너무 바싹 남아 있어서 후회할 것 같았다.
더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나는 스기엔의 말에 따라 풀썩 침대에 앉았다.
먼저 침대에 있던 스기엔이 가볍게 튕겨 나가며 나를 노려보았다.
나와는 달리 태평하기만 한 스기엔을 보자 살짝 약이 올랐다.
스기엔이 테오도르와 아는 사이라면 이렇게 태평하지 못했을 텐데!
“다른 사람을 만나보는 건 어때?”
나는 아주 진지하게 스기엔에게 물었다. 그리고 스기엔은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저기요. 제가 무슨 남친에게 다른 여자를 만나보라고 심각하게 권유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스기엔도 친구가 더 많으면 좋지 않겠어?”
“누가 인간을 친구로 두고 싶대? 내가 널 오냐오냐하니까 잊은 모양인데, 나는 위대하신 고위 마족이시라고.”
“언제 스기엔이 날 오냐오냐해줬는데?”
“늘, 언제나, 항상, 오올~ 웨이즈.”
“나는 늘 타박 당한 기억밖에 없는데?”
“쯧. 그런 기억력이니까 인간밖에 못 되는 거야.”
애매한 핀잔이었다. 인간에게 인간이라는데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난 너 말고 다른 인간 친구는 더 필요 없어.”
“그럼 인간이 아닌 친구는 필요해? 예를 들면 슬라임 친구라던지?”
“어딨는데?”
“응?”
“그 슬라임 친구는 어딨는데?”
“음…….”
할 말이 없었다. 당연히 나는 스기엔 외의 다른 슬라임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스기엔은 혹시 다른 슬라임을 본 적 있어?”
“없어.”
스기엔은 생각할 여지도 없다는 듯이 빠르게 대답했다.
어찌 보면 스기엔의 대답도, 내가 다른 슬라임을 본 적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이 세계는 몬스터가 없는 세계관이었으니까.
스기엔이 특별한 존재였다.
“슬라임 친구를 찾는 건, 드디어 스기엔이 슬라임이라는 것을 인정한 거야?”
“아니야!”
“그럼 슬라임 친구는 왜 찾는데?”
“인간 친구가 있으니까, 슬라임 친구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나는 슬라임이 아니라 고위 마족이라고! 고! 위! 마! 족!”
스기엔은 강하게 부정했다. 누가 그랬지.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그래, 그래. 스기엔 고위 마족 님.”
나는 스기엔을 토닥거렸다.
어차피 뱀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유일한 뱀이라면, 자신이 뱀이 아니라 용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다만, 내가 세상에 유일한 뱀이라는 건…….
함께 발로 걷는 것이 아니라 배로 밀어서 움직이는 것에 대해서 토론할 상대도 없고, 세로로 쭉 찢어진 눈에 어울리는 매력적인 표정은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도 말할 상대가 없다는 건, 틀림없이 외로울 것 같았다.
“그러니까 스기엔. 괜찮으면, 테오도르를 한번 만나보는 것이 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내가 그다음에 하려는 말은 ‘어때?’였다. 하지만 나는 그 뒷말을 잇지 못했다.
“레나티스!”
예고도 없이 벌컥 열린 문과 내 이름을 부르는 큰 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그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