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13
‘사랑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아.’
아스텔라 언니의 목소리가 자꾸만 머릿속을 떠돌았다.
나도 사랑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생각하는 낙천주의자는 아니었다.
다만, 사랑에 빠진 것이 처음인지라 허우적대느라 문제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결혼…….”
낯선 단어였다. 적어도 나와 연관시켜서는 그랬다.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는 나의 이상형도, 좋아한 남자도 없었다.
애초에 또래의 남자도 몇 명 없었다. 그리고 그 몇 명은 전부 언니를 좋아했다.
남자를 이성적으로 좋아하게 된 것은 테오도르가 처음이었다. 그것도 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결혼을 생각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이…….”
결혼이 낯선데, 아이는 더 그랬다. 고개를 숙여 내 배를 바라보았지만, 가슴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임신하게 되면 배가 가슴보다 더 나오게 되겠지?
손을 배에 얹자, 판판한 배가 만져졌다. 아직은 아무 일이 없었다. 그럴 낌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낌새가 느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제는 다른 것에 있었다.
“광증을 가진 아이…….”
내 입술에서 흘러나온 단어에 내가 흠칫하고 말았다.
언니의 말대로 귀족에 카르오 대공가의 후계자인 테오도르와의 결혼은 어려울 수도 있었다.
적어도 카르오 대공이 결혼을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아무리 나라도 생각할 수 있었다.
결혼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어리석은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테오도르가 나를 사랑하기만 한다면 상관없었다.
만약, 아이가 생긴다면 낳을 생각도 있었다. 사랑하는 테오도르와 나의 아이니까 혼자서라도 키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광증은 나 혼자 결정하고, 나 혼자 결심한다고 될 것이 아니었다. 원하지도 않는 고통을 가지고 태어날 아이를 생각해야 했다.
나는 테오도르의 형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손에 희생된 어머니를 알았다.
그 광경을 지켜본 테오도르의 고통을, 자신이게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한 작은 아이도 알았다.
“테오도르…….”
나는 테오도르의 슬픈 눈을 알았다. 슬픔이 벤 광기의 붉은 눈도, 그리고 그것 때문에 메말라버린 보라색의 눈도.
내 아이에게 그런 눈을 가지게 만들 수는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들린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자 테오도르의 얼굴이 보였다. 그것도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의.
“배라도 아픈 거야?”
내가 손을 배에 얹고 있자,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았다.
“아, 아뇨. 그냥 생각을 좀 하다가 보니까 손을 이렇게 하고 있었네요.”
나는 배에서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했는데?”
“별거 아니에요. 언니가 내일 떠난다고 해서,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내일? 오랜만에 만났는데, 벌써 간다고 하던가?”
“지금 사는 곳에서의 생활이 있어서 이만 돌아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군.”
테오도르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생각 없이 언니에게 더 있다가 가라고, 이 저택에 취직하면 되지 않냐고 물었던 나와는 달랐다.
그것은 테오도르가 나와는 달리 언니에게 깊은 애정이 없어서 이거나, 아스텔라 언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일지도 몰랐다.
“저기…….”
그러면, 아주 어쩌면,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그럴지도 몰랐다.
아무 생각이 없었던 나와는 달리 결혼이나, 임신, 그리고 아이에 대해서도 사랑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테오도르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응?”
테오도르는 어서 말해보라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생각이 나버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잊고 있었다.
테오도르가 어떤 귀족 영애와 결혼할 것이라고 클레어가 말했던 것을.
“아, 아니에요.”
나는 얼른 말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왜?”
다정한 목소리로 테오도르가 다시 물었다.
얼른 할 말을 하라는 듯이. 뭐든지 다 들어주겠다는 듯이.
“제가 이제까지 번 돈을 언니에게 주면, 언니가 받으려고 들까요?”
하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그게 테오도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언니가 말했듯, 테오도르는 대단한 가문의 훌륭한 후계자였다. 부와 권력을 누리는 대신에 그만큼의 자유를 박탈당해야 하는.
“글쎄. 아직 네 언니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우애 깊은 자매라면 동생이 고생해서 번 돈을 덥석 받지는 않겠지.”
“그래서 조금 고민이에요. 저는 지금 돈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언니의 살림에 보태주고 싶은데, 테오도르 님 말씀대로 언니는 돈을 받지 않으려 할 것 같거든요.”
“확실히 그렇겠군.”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어떻게 하면 언니가 내 돈을 받을 수 있을는지 고민했다.
진짜 내 고민은 꼭꼭 숨겨두고서.
* * *
이별의 순간은 오고야 말았다. 왔던 모습 그대로 아스텔라 언니와 에뮬은 마차 앞에 서 있었다.
“이제 가볼게. 그만 들어가 봐.”
어제 밤새도록 나와 이야기를 나눴던 터라 언니의 얼굴은 조금 푸석했지만, 여전히 예뻤다.
이 예쁜 얼굴을 또 한동안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속상해져서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눈물은 눈물이고, 어쨌든 내 할 일은 해야 했다.
“언니, 이것.”
나는 얼른 준비한 흰 봉투를 언니 손에 쥐여 주었다.
“이게 뭐야?”
“빌려주는 거야.”
나는 아스텔라 언니가 무슨 말을 더하기 전에 얼른 말했다. 언니 손에 놓은 돈 봉투를 억지로 쥐게 만들어 놓고 뒤로 얼른 물러서기까지 했다.
“설마……. 안돼, 레나티스!”
흰 종이봉투. 안으로 만져지는 반듯한 종이들.
언니는 봉투 안에 든 것이 뭔지 열어보지 않고도 알아차린 듯했다.
“안되긴 뭐가 안돼?”
“네가 힘들게 번 돈이잖아. 이걸 받을 수는 없어.”
“힘들게 벌고 있지 않은 것은 언니도 알면서 뭘.”
나는 헤헤 웃어버렸다. 솔직히, 여기는 꿀직장이었다.
“그럼 다치면서까지 번 돈이잖아.”
과연 언니였다. 아스텔라 언니는 순식간에 내가 할 말이 없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받을 수 없어.”
“그래서 빌려주는 거야. 사실 난 그냥 주고 싶지만, 언니가 그냥 공으로 받지 않을 것이라는 건 나도 알거든.”
테오도르와 내가 머리를 맞대고 겨우 생각해낸 것이 이거였다. 그냥 언니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일단은 빌려주는 것.
급할 때의 동전 한 닢이 부유할 때의 금화 한 닢보다 나은 법이라며, 테오도르는 지금 언니의 사정이 좋지 못하니 빌려주는 형식을 취하면 언니가 마지못해 받을 것이고, 사정이 나아졌을 때는 나눠서 갚는다면 언니에게도 큰 부담이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그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내가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은 돈이긴 하지만, 내가 카르오 저택에서 일한 것이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아서 엄청나게 큰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언니라면,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돈이긴 했다.
적어도 나를 만나러 여기 오기 위해서 일하지 못한 기간을 메꾸고, 당장 어려운 살림에 보태기에는 충분하리라.
“나는 지금 여기서 숙식을 해결하니까 별로 쓸 일이 없거든. 아니, 숙식뿐만이 아니라 의복까지도 해결이라서 정말로 돈 쓸 곳이 없어.”
나는 새로 받은 하녀 복의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언니에게 말했다.
“제발 받아줘.”
나는 언니가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간절한 목소리와 그것보다 더 간절한 눈빛으로 언니에게 말했다.
“…….”
무언가를 말하려던 아스텔라 언니는 입까지 벌렸다가 결국 작은 한숨과 함께 입을 다물고 말았다.
성공이었다!
“나중에 갚을 거야.”
“그래.”
“정말이야. 꼭 갚고 말 거야.”
“알았어, 알았어.”
언니가 마음을 돌리기 전에 나는 얼른 대답했다.
“레나티스.”
마차를 타기 전에 언니는 나를 다시 꼭 껴안았다.
코끝을 스치는 언니의 향기에, 내 눈앞에 살랑거리는 분홍색 머리카락에, 당분간은 언니와 이렇게 안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왈칵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네가 감당할 수 없는 힘든 일이 생긴다면.”
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아스텔라 언니의 목소리도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언제든 내게 와.”
언니가 무언가를 내 주머니에 넣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지금 언니가 사는 곳의 주소 같은 것이리라 생각했다.
다행이었다. 내가 그곳으로 찾아가는 일은 없겠지만, 이제 언니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너라면 언제나 환영이야. 사랑하는 내 동생.”
“아스텔라 언니…….”
끝내, 눈물이 흐르고야 말았다.
계속 이대로 있고 싶은 것은 참아내며 언니의 품에서 겨우 내 몸을 떼어내자, 언니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른 것이 보였다.
“보고 싶을 거야.”
내 눈물을 닦아주며 아스텔라 언니가 말했다.
“나도.”
언니의 눈물을 닦아주며 내가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이제 정말로 이별이었다. 언니가 탄 마차가 내 눈에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그런 내 옆을 조용히 지켜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