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12
“으응?”
아스텔라 언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그래?”
“뭔가 좀 분위기가 달라 보여서.”
언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테오도르와 에뮬을 쳐다보았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4명이 함께 아침을 먹는 중이었다.
여전히 완벽한 매너의 테오도르와 그에 반해서 조금 어색하고 불편해 보이는 에뮬. 어제 아침과 다를 바 없는 구도였고, 거의 비슷한 태도의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언니의 말대로 무언가 어제보다는 덜 불편한 분위기였고, 좀 더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아마도 어제 테오도르에게서 풍겼던 냉기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그, 글쎄? 나는 잘 모르겠네.”
하지만 나는 시치미를 떼며 빵 한 조각을 얼른 입에 넣었다.
사실 나는 테오도르가 언니를 좋아하게 될까 불안했고, 테오도르는 내가 에뮬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둘이 쌍으로 삽질하고 있었다는 말을 어떻게 해!’
언니에게는 뭐든지 솔직하고 싶은 나였지만, 이건 정말 말하기엔 너무 심각한 흑역사였다.
“빵이 맛있어, 언니. 오늘 아침에 구웠나 봐.”
나는 먹던 빵을 반으로 쪼개 언니의 접시에 놓았다. 언니가 좋아하는 옥수수빵이었다.
“어머, 그러네. 고소하고 맛있다.”
빵 한 조각을 뜯어서 먹은 언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이렇게 맛있는 옥수수빵은 처음 먹는다는 듯이.
“이것 좀 먹어봐, 에뮬.”
아스텔라 언니는 들고 있던 옥수수빵을 반으로 갈라 그 반쪽을 에뮬에게 건넸다.
내가 집은 빵에서 반을 자르고, 또 아스텔라 언니가 반을 잘라 나눠준 그 빵은 에뮬의 손에서는 아주 작아 보였다.
“그러네. 아주 맛있다, 아스텔라.”
하지만 에뮬은 아주 기쁘게 그것을 받았고, 먹고 나서는 아주 맛있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빵 반쪽을 나눠 먹는 두 사람의 모습을 나는 아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고구마가 맛있군.”
내 시야에 노란 고구마가 불쑥 들어왔다.
고구마를 거슬러 올라가자 포크가 보였고, 포크를 거슬러 올라가자 그것을 쥔 단아한 손가락이 보였고, 또 거슬러 올라가자 단단한 팔뚝이 보였다.
그리고 긴 팔뚝을 등산하고 나자 마침내 테오도르의 얼굴이 보였다.
‘다정한 손과 그렇지 못한 표정.’
지금의 테오도르는 딱 그랬다.
생전 처음 누군가에 뭔가를 먹어보라고 권유하는 것처럼 뻣뻣하기 그지없는 손과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눈빛은 약간 혼란스럽기까지 해 보였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지켜보는 시선이 둘이나 있어서 입을 벌리고 그것을 받아먹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아무도 안 보고 있다고 해도 내가 그런 남부끄러운 애정행각을 할 수 있을는지는 의문이었다.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테오도르는 조용히 나이프를 집어 들어 능숙한 포크와 나이프질로 내 접시에 고구마를 덜어주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내 포크를 집어 고구마를 푹 찔렀다. 그리고 그대로 내 입에 넣었다.
“정말 고구마가 달고 맛있네요.”
달콤한 고구마에 나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테오도르 역시 그런 나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고구마도, 빵도 정말 맛있네요.”
긴장으로 고구마를 말할 때 ‘구’에서 살짝 음이 삐끗한 것 같긴 했지만, 에뮬이 제법 자연스럽게 테오도르에게 말을 걸었다.
나를 보고 있던 테오도르가 슬쩍 고개를 돌려 에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아스텔라 언니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언니도 나와 똑같은 마음이었던지, 내 쪽으로 손을 뻗어와 우리는 테이블 아래에서 손을 맞잡았다.
제발 두 남자의 대화가 별일 없이이어지고, 무사히 끝나기를!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많이 드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식사 후에는 정원이 제법 잘 가꾸어져 있으니, 아스텔라 양과 함께 산책이라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 그럴까요?”
“지금 계절이라면, 정원의 오른편에 단풍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그래요? 테오도르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아주 많이 기대되네요.”
제법 자연스러운 두 남자의 대화에 나는 아스텔라 언니 쪽으로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언니도 동시에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잘됐다!’
‘잘됐어!’
우리는 눈빛으로 대화했다. 그리고 마주 보고 씨익 웃었다.
‘완벽해!’
빵이 맛있었다. 고구마가 달았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그야말로 완벽한 아침 식사였다.
* * *
“뭐? 내일 갈 거라고?”
“그래. 언제까지 여기서 계속 신세 지고 있을 수는 없잖아.”
“계속 신세 져도 테오도르 님은 괜찮다고 할걸?”
내 말에 언니는 잠시 멈칫했다.
“……그럴 수도 있긴 하겠지.”
예전 우리 집이 통째로 들어갈 법한 사이즈에 정갈하게 꾸며진 손님방을 힐끗 본 뒤, 아스텔라 언니는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평생을 그렇게 남의 신세를 지면서 살 수는 없잖아.”
“그것도 아마…….”
“내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테오도르는 괜찮다고 할 거라고 말하려던 것을 아스텔라 언니는 뚝 잘라 먹었다.
“에뮬도 나도 사지가 멀쩡한데, 스스로 일해서 번 돈으로 살아야지. 왜 남의 도움에 의지하면서 살아야 해?”
다부진 목소리로 아스텔라 언니는 똑 부러지게 말했다.
“이미 여기 오는 데만도 며칠이 걸렸고 갈 때도 며칠이 걸릴 거야. 에뮬과 내가 일하는 농장에서 사정을 듣고 휴가를 허락하긴 했지만, 너무 오래 일을 쉴 수는 없어.”
“그럼, 여기서 일을 해도 되잖아. 여긴 커다란 저택이니까 에뮬 오빠나 언니가 할 수 있는 일도 분명히 있을 거야.”
“그건 안돼.”
“왜? 여기서 일을 해서 돈을 벌면 되잖아. 그럼 내 얼굴도 매일 볼 수 있고, 가끔은 지금처럼 넷이서 같이 식사도 하고, 산책도 하고 그러면 즐겁지 않겠어?”
나는 오전의 산책을 떠올리며 말했다.
다섯 걸음을 걸으면 아스텔라 언니가 다리는 괜찮냐고 물어보았고, 열 걸음을 걸으면 테오도르가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긴 했지만, 그것만 빼면 꽤 재미있었다.
에뮬은 예쁜 꽃을 발견할 때마다 언니를 불러세웠고, 언니는 꽃을 보고 감탄하고 향기를 맡고 또 즐거워했다.
나는 테오도르와 산책하면서 들었던 식물의 이름을 말해주며 똑똑한 척을 했고, 간혹 단어가 잘 기억나지 않아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면 테오도르가 슬쩍 끼어들어 주었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싸간 샌드위치를 함께 먹은 것도 피크닉 같아서 즐거웠고, 서로 떨어져 있었던 동안의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나눴던 것도 좋았다.
드디어 네 명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떠난다는 언니의 말은 내게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그건 안 되지.”
하지만 내 제안에 언니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왜?”
“네가 테오도르 님과 좋은 사이라며. 그런데 나와 에뮬이 여기서 일을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사람이 인맥이 있으면 좀 이용할 줄도 알아야지. 거기다가 테오도르가 하는 일인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걸?”
“하지만 수군거리겠지. 거기다가 평민 출신들, 심지어 자기 집 고용인들과 어울린다는 이야기까지 떠돌겠지. 테오도르 님은 카르오 대공가의 후계자라며. 그분의 평판도 생각해야지.”
“그건…….”
언니의 지적에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살짝 말끝을 흐리며 아스텔라 언니가 머뭇거렸다.
“너 테오도르 님과 얼마나 깊은 사이인 거야?”
“응?”
“그러니까, 함께 잠자리까지도 하고 그런 사이니?”
너무 단도직입적인 말에 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어, 언니도 참! 무슨 그런 질문까지 해?”
나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돌리려고 했다.
“레나티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야.”
내가 질문을 회피하려고 하자, 언니는 아예 내 두 손을 잡았다. 마치 대답하기 전에는 아무 데도 도망가지 못한다는 듯이.
“테오도르 님은 귀족이잖아. 그것도 이렇게 큰 저택에, 이렇게 훌륭한 가문의 후계자라며. 평민 출신에, 하녀인 너와 결혼이라도 하시겠대? 그게 가능은 하대?”
언니는 진중한 태도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대답할 수 없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저 테오도르가 좋았을 뿐이었다.
“너 그러다가 만약, 임신이라도 하면 어떻게 할 거야?”
그 역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테오도르를 사랑했기에 그와 사랑을 나누는 것을 좋아했을 뿐이었다.
“테오도르 님의 가문은 대대로 광증을 가지고 있다며. 그럼 네가 테오도르 님의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아이도 그런 것 아니니?”
언니의 손안에서 내 손이 움찔 떨렸다.
“생각해본 적 없구나?”
나를 잘 아는 아스텔라 언니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 몸짓과 눈빛만으로 다 알아내고 말았다.
“네가 테오도르 님을 좋아하는 것은 알아. 그리고…… 테오도르 님이 좋은 분이시고, 널 좋아하신다는 것도 알겠어. 하지만 레나티스.”
언니가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잘 들으라는 듯이.
“사랑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