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09
‘어떻게 하지?’
나는 방안을 서성였다.
‘테오도르가 아스텔라 언니를 보고 반한 거라면…… 어떻게 하지?’
소설에서는 그랬다. 테오도르는 광증상태에서도 아스텔라에게 첫눈에 반했다.
물론, 대개의 남자 주인공들이 그렇듯이 그것을 깨닫는 것은 아주 나중이었지만 말이다.
소설 내용이 아니더라도 아스텔라 언니는 지극히 당연하게 남자들이 반할만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가녀린 몸과 예쁜 얼굴, 부드러운 목소리에 착한 심성까지.
내가 남자라면 당장 하루에 12번씩 프러포즈를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오히려 아스텔라 언니의 말을 듣고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아스텔라 랑시드라고 땅땅 못 박아 놓지 않은 에뮬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만약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인지, 방을 너무 빙글빙글 돌고 있어서 인지 알 수 없었다.
‘정말로 테오도르가 아스텔라 언니를 좋아하게 된 거라면 어떻게 하지?’
테오도르가 이제는 날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방심했다.
테오도르와 아스텔라 언니를 만나지 않게 하려고 언니를 야반도주하게 만들고, 스스로 카르오 저택에 온 나였다.
그래놓고선 남주와 여주가 만나게 되었는데도 그저 언니를 봐서 좋다고 헤벌쭉해 있었다.
웃으며 그들을 소개해주고,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하냐는 고민이나 하고 있었다.
바보같이.
“어휴! 레나티스, 정신없어!”
챙겨온 짐가방을 정리하고 있던 아스텔라 언니가 나를 향해서 소리쳤다. 익숙한 잔소리에 나도 모르게 발이 우뚝 멈춰 섰다.
고개를 돌리자 아스텔라 언니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아무것도 모르는 언니는 말 잘 듣는 동생이라는 듯이 슬쩍 웃었다.
나는…… 웃지 못했다.
- 똑똑.
그런 나를 보고 언니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나를 구해주려는 것처럼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누구세요?”
나는 얼른 언니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
“…….”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는 얼굴을 보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테오도르였다. 방금의 노크 소리는 나를 구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복잡하게 만들려는 소리였다.
“여기 있을 줄 알았어.”
아마도 테오도르는 내 방에 먼저 갔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가 없는 것을 보고 언니가 묵고 있는 손님방으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정말 그럴까?’
내 속에서 슬금슬금 의심이 피어올랐다.
‘나를 찾으러 온 게 맞나? 내가 이곳에 없으면? 씻으러 갔거나, 화장실에 간 거면? 아니면 인스트나 클레어를 만나러 간 것이었으면? 그러면 이 방에 있는 건 아스텔라 언니 혼자였을 텐데…….’
수많은 의문과 추측, 그리고 망상이 머릿속에서 떠올랐고, 또 뒤엉켰다.
“이제 별채 서재의 책은 다 본 것 같은데, 원한다면 본채 서재를 한번 가보는 게 어때? 산책 삼아서 걷기에도 괜찮을 것 같고.”
매우 합당한 제안이었다.
테오도르의 말대로 별채 서재에서는 내가 원하는 몬스터의 존재에 관한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그러니 더 많은 자료가 있는 본채 서재에 함께 가보자는 것은 내게 좋은 제안이었다.
그리고 내가 테오도르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제안이기도 했다.
“그래요.”
나는 내 안에 있는 쓸데없는 생각들은 지워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산책이요?”
옆에 있던 아스텔라 언니가 불쑥 끼어들었다.
“저어…… 제가 의사는 아니긴 하지만, 레나티스의 다리가 아직 다 낫지 않았는데 산책은 좀 무리이지 않을까요?”
그리고 언니는 아주 조심스럽게 테오도르에게 내 걱정을 하며 말했다.
“괜찮아, 언니. 목발이 있으면 나 꽤 잘 걸을 수 있어.”
“목발이 있으면 이잖아. 무리하면 상처가 덧날 수도 있어.”
“하지만 이제까지도 가벼운 산책은 계속해왔는걸?”
“그래서 빨리 낫지 않은 건 아니고?”
아스텔라 언니의 얼굴에는 나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언니는 진심으로 내 다리를 걱정하고,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지금 테오도르가 나를 보고 있는지, 아니면 아스텔라 언니를 보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생각해보니, 언니의 말이 맞는 것 같군.”
테오도르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때 보았다. 언니를 바라보고 있던 테오도르가 고개를 돌리고 나를 쳐다보는 것을.
‘아스텔라 언니를 보고 있었어!’
머릿속에 뒤엉켜 있던 생각들이 한곳으로 똘똘 뭉쳤다. 그리고 그것이 내 가슴을 쾅 내리쳤다.
“본채까지의 거리는 꽤 되니, 이제껏 저택을 한 바퀴 돌았던 산책보다 더 멀 거야. 네 다리에 무리가 될 수도 있으니까, 가지 않는 편이 좋겠어.”
“하지만 본채 서재도 궁금한데요.”
나는 간신히 힘을 짜내어 말했다. 테오도르가 언니 말이 아니라 내 말을 들어주기를 바랐다.
“그럼 마차를 준비해서 가지. 아니면, 내가 본채 서재에 가서 네가 원하는 책을 찾아서 가져다주던지.”
합당한 의견이었다. 너무 합당해서 내가 더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테오도르가 원래 이렇게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나?’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본 테오도르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고 차 시중은 필요 없다며 리타 아주머니에게 문도 열어주지 않은 적도 있었고, 인스트가 나에게 활을 가르쳐주겠다고 했을 때는 아주 딱 잘라서 거절하기도 했었다.
지금은 좀 달라지긴 했지만, 초반에는 나에게도 얼마나 까칠하게 굴었던가?
‘그런데 왜 어제 처음 본 아스텔라 언니에게는…….’
흩어졌던 불안감이 다시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그리고 불길하고도 끈적하게 나에게 들러붙고 있었다.
“아스텔라! 혹시 내 옷이 그 가방에…….”
에뮬이 열린 방문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나는 보고야 말았다.
테오도르가 고개를 돌렸다가, 그것이 에뮬임을 확인하고는 이마를 찌푸리고, 그를 노려보는 것을.
* * *
어두운 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계속 이렇게 불안하게 살 수는 없어.’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아스텔라 언니가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어젯밤에 나와 같이 이야기를 하느라 늦게 잠들어서인지, 언니는 일찍 잠이 들었다.
나는 살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방을 나왔다.
복도는 컴컴했지만, 잠시 기다리자 창밖에 비치는 달빛만으로도 걸을 수 있을 만큼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다.
나는 아무도 깨우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살금살금 테오도르의 방으로 향했다.
‘내 방에 있을 때는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몰래 테오도르를 보러 가기 좋았는데.’
나는 여전히 커튼이 쳐져 있을 내 방을 생각했다.
‘계속 그 방이 내 방이 될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테오도르를 만나고 나면 정해질 것이다.
‘정말 테오도르가 아스텔라 언니에게 한눈에 반했다면 어떻게 하지?’
상상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이전에는 언니를 살리기 위해서 테오도르를 내 발로 찾아온 것이었지만, 지금은 나를 위해서 테오도르를 찾아가고 있었다.
‘에뮬은 어쩌지? 난 어떻게 해야 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만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그 엉킨 생각들 속에서 허우적대다 보니, 어느새 테오도르의 방문 앞이었다.
“…….”
문 앞에 서서 아주 잠시 고민했다. 이렇게 테오도르에게 직접 묻는 것이 옳은 결정일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지켜만 볼 수도 없었다.
- 똑똑.
마침내 머뭇거림을 지워버리고, 나는 손을 들어 테오도르의 방문에 노크했다.
‘자는 걸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잔뜩 긴장했던 어깨가 축 처지는 기분이었다.
‘돌아가서 내일 아침에 물어봐야겠다.’
오늘 밤에 과연 내가 잠이 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레나티스?”
막 등을 돌린 순간이었다. 내 뒤에서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돌아섰던 몸을 다시 돌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
순간,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야 테오도르의 방에 방문할 수 있었나? 내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지난 며칠간 나는 자유롭게 테오도르의 방을 드나들었었다.
“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순간 나는 마음이 흔들렸지만, 담판을 짓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물러서지 않았다.
“…….”
낭패라는 듯, 테오도르가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들어가도 될까요?”
테오도르가 거절하기 전에, 나는 그를 스쳐서 이미 안에 들어와 버렸다. 그리고 얼른 당신도 들어오라는 듯,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그래.”
테오도르는 늦은 허락을 해주며 방문을 닫았다.
어두웠던 복도와는 달리 방안은 달빛이 어슴푸레하게 방을 비추고 있었다. 그래서 테오도르의 표정이 더욱 잘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살짝 긴장한 채로 보는 것을.
나는 그런 테오도르를 처음 보았다. 적어도, 내 앞에서의 테오도르는 그런 적이 없었다.
오히려 언제나 내게만 보여주는 것 같은 편안하고, 부드러운 모습이 좋았었다. 아주 가끔은 서툴고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았다.
이렇게 어색하고, 불편한 테오도르는 낯설었다.
“알고 있어요. 저희 언니가, 아스텔라 언니가 너무 예쁘고, 착하다는 것을요. 분명 모든 남자가 한눈에 반할만한 외모인데다가, 이야기를 나눠보면 심성까지 고와서 다들 더욱 빠져들게 되죠.”
그래서 빨리 끝내고 싶었다. 나는 내 머릿속에서 있던 말 중에서 아무 말이나 꺼내서 던졌다.
“확실히 그렇더군.”
테오도르는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 테오도르의 말이 가시가 되어 내 가슴에 박혔다. 두근거리던 가슴은 이제 시큰시큰해졌고, 눈에서는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네. 거기다가 언니는 아주 완벽하게 테오도르 님의 취향이겠죠. 한눈에 반할 만큼요.”
떨어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며 나는 말을 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그다음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테오도르는 횡설수설하는 내 말을 들으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아주 황당무계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내 취향은 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