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08
20년에 걸친 이야기가 끝이 나기까지는 생각보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닌데다가, 자세한 내막은 나도 모르는 부분이 있다 보니 그런 것이리라.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언니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도 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때로는 내 손을 꽉 쥐고 괜찮냐고 묻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은 테오도르 님과 아주 잘 지내고 있어.”
그리고 내가 이야기를 끝냈을 때, 내가 우려하였던 대로 아스텔라 언니의 얼굴에는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넌 괜찮은 거야?”
언니의 눈이 내 몸의 곳곳을 살폈다. 내가 절뚝거린 다리 외에 다친 곳이 없는지 살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혹시나 테오도르가 날 다치게 하지는 않았는지 걱정하는 듯했다.
나는 원작과 각성에 관한 부분만을 제외하고, 내가 현실에서 보고 겪은 일에 대해서는 전부 언니에게 이야기했다.
첫 만남에 테오도르가 날카로운 이로 나를 문 것까지도.
원작이나 각성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은 것은 그건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인데다가, 아무런 증거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아스텔라 언니는 내 이야기를 믿어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한 테오도르의 광증이나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에 대한 신빙성이 상당히 옅어질 것은 뻔했다.
거기다가 내가 언니를 위해서 스스로 위험한 일을 자처했다고 하면, 언니는 펑펑 울면서 이제라도 자신이 내 일을 대신하겠다고 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착한 아스텔라 언니는 나에게 평생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 것이다.
“괜찮아. 이제 일은 거의 다 해결된 셈이고, 나는 잘 지내고 있다니깐. 이 볼때기에 살찐 것 보이지 않아?”
내 볼을 꼬집어 보이며 짓궂게 이야기하자, 그제야 걱정 가득했던 아스텔라 언니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깃들었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그런 방식으로 광증이 해소되는 거니? 망측하게.”
그건 아마 작가가 변태라서…….
“그리고 왜 그렇게 치료하고 나서는 꼭 기절하는 거니? 꼭 중요한 부분에서 기절해버리잖아.”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아스텔라 언니는 내가 이제껏 생각해보지 않은 부분에 관해서 물었고, 나는 딱히 대답할 것이 없었다.
솔직히 나는 그냥 원래 설정이 그런가 보다 하고 왜 그런 방법으로 치료가 되는지, 왜 기절을 하는 건지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왜 하필 그런 설정인 거지?
체액으로 치료하는 거야 19금 로판 소설이라면 흔한 설정이고, 19금 상황을 만들기 위한 설정이라지만, 기절은 오히려 남주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멋짐이 차감되는 건데 말이다.
“레나티스. 혹시 지금이라도 네가 힘들다면…….”
아스텔라 언니는 머뭇거리며 테오도르의 광증이 아직도 위험한 것인가 싶어서, 나 대신 자기가 하겠다고 말을 꺼내려고 했다.
“언니가 말했다시피 그 광증을 치료하는 방법이 좀 망측해서 말이야. 동생의 연인과 언니가 그런 치료를 한다면, 그건 좀 막장이지 않을까?”
“그, 그야!”
아스텔라 언니의 얼굴은 금세 빨개지고 말았다.
“괜찮아, 언니. 처음에는 돈을 많이 주니까 하려고 한 일이지만, 지금은 달라. 나는 테오도르를 내가 진정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이 좋아.”
오히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테오도르와 그런 것을 한다는 걸 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그게 언니라고 해도, 아무리 그게 치료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에뮬에게 그런 병이 있었다면, 나 역시 그랬을 테니까.”
“와아! 아주 잉꼬부부 나셨네. 뭐야, 이렇게 좋아 죽는데, 왜 아직 아스텔라 그라티아인 거야? 얼른 아스텔라 랑시드가 되지 않고.”
“그야…… 당연히 너 때문이지!”
“나?”
뜻밖이었다. 언니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이유가 나라는 것은.
“그래. 하나뿐인 동생도 없이 내가 결혼식을 올릴 리가 없잖아.”
“……언니.”
“내 들러리는 네가 서줘야지. 그리고 내 부케도 네가 받고. 레나티스 너는 내 가장 친한 친구이고, 사랑하는 내 동생이잖아.”
언니의 말에 나는 그만 감동하고 말았다.
에뮬 오빠랑 서로 좋아하고, 이미 한방을 쓰는 사이면서, 내가 참석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니!
“레나티스. 내가 아스텔라 랑시드가 된다고 해도, 넌 내 하나뿐인 동생이야.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고,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지?”
“그럼. 당연하지. 나는 언제까지나 언니의 동생이야.”
나는 몸을 움직여 언니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흰 배게 위에서 분홍색 곱슬머리와 분홍색 생머리가 서로 뒤엉켰다.
같지만, 다른.
다르지만, 같은.
사랑하는 나의 가족. 나의 자매.
나의 아스텔라 언니.
* * *
오늘 아침은 날씨가 좋았다. 그야말로 청량한 가을이었다.
“…….”
“…….”
“…….”
“…….”
하지만 아침 식당의 공기는 그야말로 탁했다.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은 4명의 남녀는 그야말로 어색한 공기에 서로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아니, 한 명은 그렇지 않긴 했다.
테오도르는 나와 둘이 식사할 때와는 달리 거의 완벽한 테이블 매너를 뽐내고 있었고, 그로 인하여 테이블 매너가 뭔지도 모르는 에뮬 오빠와 아스텔라 언니는 거의 삐걱거리면서 간신히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 낀 나는 양쪽의 눈치를 보느라 눈은 가자미가 될 것 같았고, 영혼은 박쥐가 될 것만 같았다.
“언니, 언니. 이 소시지를 먹어 봐. 엄청 맛있다?”
어차피 나도 테이블 매너같은 건 모르지만, 테오도르 앞에서 이제껏 잘만 먹었었다.
나는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대충 포크 질을 해서 소시지를 푹 찍어다가 언니 앞에 놓아주었다.
“어머, 그러네. 소시지가 굉장히 탱글탱글하고 맛있다.”
몇 개나 되는 포크와 나이프 앞에서 당황하고 있던 언니는 내가 소시지를 권하자, 내가 권한 것은 먹어야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아무 포크나 하나 집어서 소시지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언니 말대로 탱글탱글하면서, 육즙이 팡팡 터지는 소시지를 먹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솔직히 말해서 전에 먹었던 소시지는 카르오 저택에서 먹었던 소시지에 비하면 소시지가 아니었다. 그저 소시지의 맛과 향이 나는 무언가였다.
“이것 좀 먹어 봐, 에뮬. 정말 맛있어.”
그리고 우리의 애정이 넘치는 커플은 혼자 맛있는 것을 먹지 못하고, 내가 나눠준 소시지를 또 나눠서 자신의 반쪽에게 주었다.
“그러네. 정말 맛있어.”
“그렇지?”
에뮬 오빠와 아스텔라 언니는 소시지 한 조각을 나눠 먹으며 마주 보고 있었다. 흐뭇한 광경이었다.
‘근데 저거 내가 먹던 포크로 꾸욱~ 찍어서 준건데…….’
아주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면 말이다.
나는 언니가 에뮬 오빠에게 준 소시지에 내 포크 자국이 있나 없나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작은 포크 구멍은 내가 아무리 눈이 좋다고 해도 찾아내기 어려웠다.
“음식은 많이 있으니,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모처럼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는데, 테오도르의 싸늘한 목소리가 다시 분위기를 박살 내고야 말았다.
소시지 한 조각을 나눠 먹은 아스텔라 언니와 에뮬 오빠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고, 그걸 굳이 언니에게 준 나 역시 얼굴이 화끈거렸다.
음식이 부족해서 나눠 먹으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맛있어서 권해준 거였는데…….
항상 맛있는 것만 먹는 테오도르는 이런 게 뭔지 모를지도 몰랐다. 그가 말했듯, 음식은 늘 풍족하고 많았을 테니까.
나는 내 마음을, 그리고 아스텔라 언니와 에뮬의 마음을 몰라주는 테오도르가 원망스러워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곧은 자세를 하고, 싸늘한 눈으로 아스텔라 언니와 에뮬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좀 더 자세히 바라보자 테오도르의 싸늘한 시선이 에뮬을 향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에뮬이 무척이나 마음이 들지 않고, 무슨 짓을 할지 경계하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에뮬을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당황스러웠다. 처음 보는 에뮬을 대하는 테오도르의 태도도, 눈빛도.
순간, 힐끗 테오도르의 눈빛이 아스텔라 언니를 스쳤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조금 전까지의 싸늘함은 사라졌다.
테오도르는 부드럽고, 따스한 시선으로 아스텔라 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나는 쥐고 있던 포크를 더욱 꽉 쥐었다. 내가 잊고 있었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테오도르’는 <카르오의 인형>의 남자 주인공이었고, ‘아스텔라’는 <카르오의 인형>의 여자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아스텔라’를 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