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07
“아, 방은 1개여도 괜찮습니다. 저희는 이미 부부 사이나 다름이 없어서요.”
방 2개라는 말이 의아했던 것은 나만이 아닌 듯했다.
에뮬이 웃으며 나섰고, 아스텔라 언니도 에뮬의 말에 힘을 실어주려는 듯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 역시 에뮬의 말이 옳다는 눈빛으로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다름이 없는 거지, 아직 부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 네. 그렇긴 합니다만…….”
테오도르의 말에 에뮬은 당황했다.
“이미 많은 도움을 주셨고, 여기 머무는 동안 신세를 지게 될 텐데, 방을 2개나 사용하는 것은 더욱 민폐가 아닐까 싶어서요.”
“괜찮습니다. 남은 방은 많고, 고용인 역시 그 정도의 여유는 있습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테오도르는 완강했다. 그리고 여기서 집 주인인 테오도르의 뜻을 꺾을 사람은 없었다.
계속 한 방을 써왔을 연인은 조금 난처하다는 듯, 혹은 헤어지게 되어 안타깝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럼, 내가 언니 방에 가서 잘까? 오랜만에 언니랑 같이 자고 싶어.”
괜히 어색해진 분위기에 나는 얼른 아스텔라 언니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럴까?”
조금 전까지 살짝 시무룩했던 언니의 얼굴에 환해졌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또 뿌듯해지고 말았다.
에뮬이 있어도, 여전히 언니의 우선순위 안에 내가 있는 것 같아서였다.
나도 그랬다. 테오도르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니를 좋아하는 감정이 작아진 것은 아니었다.
어느 쪽이 더 좋냐고 하면 아주 심각하게 고민을 해봐야겠지만, 일단은 둘 다 똑같이 좋아한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럼, 이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내 기분 탓인가? 테오도르가 ‘각자’라는 단어에 힘을 준 것처럼 느껴지는 건?
“정말 보고 싶었어, 레나티스.”
내 팔에 팔짱을 끼고, 작게 속삭이는 언니의 목소리에 내 의문은 단숨에 사그라들었다.
“나도.”
나보다 키가 큰 아스텔라 언니인지라 살짝 발 뒤꿈치를 들어 올리며 대답하자, 언니가 미소를 지었다.
포근한 아스텔라 언니의 냄새를 맡으며 따스한 언니의 온기를 느끼면서 어여쁜 언니의 미소를 보고 있노라니, 그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 * *
“정말? 에뮬 오빠가 그랬단 말이야?”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덕분에 베개를 베고 있던 머리가 위로 붕 뜨기까지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얌전한 에뮬이 길 한복판에서 다른 사람에게 큰 소리를 냈다는 거지? 아스텔라 언니에게 집적거린다고 말이야.
크흐~ 따뜻한 시골 남자이지만, 내 여자 건드리는 놈에게는 차갑다는 건가?
“그러고 보니, 에뮬 오빠가 예전보다 아주 남자다워진 것 같아. 뭔가 건장해진 것 같은 느낌?”
“그곳에서 일을 많이 해야 했거든. 아무래도 우리가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시작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어.”
“친척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긴 하지만, 무작정 신세를 질 수는 없잖아. 처음에는 그분의 집에서 더부살이로 시작했다가, 비어 있는 집이 있어서 세를 살기 시작했어. 집세도 내야하고, 세간살이도 사야 하고 하다 보니, 돈이 많이 들더라고.”
“힘들었구나. 내가 괜히 언니에게 도망가라고 한 것 아니야?”
“아니. 그런 건 절대 아니야. 오히려 난 레나티스 너에게 고마워. 네가 그렇게 등을 떠밀지 않았다면, 나는 절대로 에뮬과 떠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거야. 고생스럽긴 하지만, 에뮬과 나는 정말 행복해.”
그렇게 말하며 아스텔라 언니는 애틋하게 웃었다.
뭐랄까……. 잘은 모르지만, 함께 고생하며 에뮬과의 사랑이 더 깊어진 느낌이었다.
“다행이다.”
행복해 보이는 언니의 모습에 나는 웃었다.
사실은 내가 행복을 느낄 때마다, 언니는 잘 지내고 있을까 싶어서 마음 한 구석에서는 안절부절못했었다.
“넌 어때, 레나티스?”
“응?”
“여기서 잘 지냈어? 인스트 님이 네가 잘 지내고 있다고 말씀하시긴 하셨지만, 그분은 테오도르 님의 아랫사람이잖니. 여기서 네가 고생하고, 구박당하고 있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고생과 구박이라니. 그런 일은 없어.”
역시나 걱정이 많은 아스텔라 언니였다. 나는 언니의 걱정이 괜한 것이라는 뜻을 담아서 환하게 웃었다.
“혹시 내 편지를 받지 못했어? 내가 에뮬 오빠네 집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아니. 받지 못했어.”
내가 언니에게 보냈던 편지는 아버지만 본 모양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버지 이야기를 언니에게 해야 할 텐데. 그리고, 어머니의 이야기도…….
“여기서 넌 무슨 일을 하고 있어?”
“난 차 시중 담당이야.”
일단은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차? 레나티스 네가?”
그리고 나를 잘 아는 아스텔라 언니는 그게 뜻밖인 듯했다.
“넌 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배웠지.”
“배웠다고? 그런데 저택에서는 힘이 센 사람을 찾았다며? 차 시중이랑 힘이 센 게 무슨 상관인데?”
“그게…….”
나의 서툰 거짓말이 탄로 날 위기였다.
“차 시중이 사실은 꽤 힘든 일이거든.”
“차 시중이?”
아스텔라 언니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여긴 커다란 저택이잖아. 차를 얼마나 많이 쓰는데! 포대로 된 차도 날라야 하고, 막 수레를 끌 일도 있고, 차를 끓이는데 필요한 물을 끓일 장작도 패야 해.”
……는 물론 다 뻥이었다.
“그래?”
하지만 귀족 저택의 하녀 일이나, 차 시중에 대해서 잘 모르는 아스텔라 언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넘어가는 듯했다.
“저기, 언니 그것보다 중요한 할 말이 있는데.”
나는 언니가 다른 딴지를 걸기 전에 얼른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중요한 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
아스텔라 언니의 큰 눈이 더욱 커졌다. 그리고 그 안에 놀람과 당황 그리고 약간 희미한 안도감이 순식간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어, 어떻게?”
“그게,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는데, 아마도 무슨 시비 같은 것에 휘말린 것 같아.”
나는 언니에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말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이렇게 말하려고 작정했었다.
카르오 대공 즉, 테오도르의 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하면, 이유가 필요했다.
거기다가 테오도르가 내게 말했던, 나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던, 부모님을 죽인 원수의 아들이라는 이름이 테오도르에게 씌워질 터였다.
나는 아스텔라 언니에게 테오도르가 그렇게 비치길 원하지 않았다.
아직은 말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나의 연인이라고 소개할 예정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
“아버지가 나를 만나러 여기에 왔었거든. 내가 언니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말이야.”
“혹시…….”
“응. 내가 여기서 일한다는 걸 알고 돈을 뜯어내러 온 거지.”
“그래서? 아버지에게 돈을 드렸어?”
“아니. 거절했어. 솔직히 말해서, 절연하자고도 했지.”
“네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순순히 받아들일 아버지가 아니셨을 텐데?”
과연. 언니는 나만큼이나 아버지를 잘 알았다.
“당연히 그랬지만, 테오도르 님이 도와주셨어.”
“그랬구나.”
“그러고 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시려다가 변을 당하신 모양이야.”
“…….”
잠시 아스텔라 언니는 말이 없었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언니. 만약에 원한다면, 예전 집으로 돌아가도 될 거야. 아버지가 안 계시니 집은 비어 있을 거고, 낡긴 했지만 우리 집이긴 하니 집세도 없잖아. 언니와 에뮬 오빠가 원래 살던 마을이니 지내기도 훨씬 편할 테고 말이야.”
“그렇긴 하겠지만…….”
“아! 혹시 에뮬 오빠네가 거기 살고 있어서 그래? 전에는 랑시드 아주머니랑 친하게 잘 지냈지만, 이제 시어머니가 되었으니 불편하려나?”
“얘는! 그런 것 없어.”
아스텔라 언니는 곱게 눈을 흘겼고, 나는 웃음으로 답했다. 사실, 랑시드 아주머니가 언니를 예뻐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주머니뿐만 아니라 아저씨도 은근히 언니를 며느리 삼고 싶어 했다.
다만, 우리 아버지가 너무 망나니라 그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둘이 야반도주를 할 때 기꺼이 친척이 사는 곳으로 가라는 조언도 해주고, 여비도 챙겨주었지.
“그건 에뮬과 상의해볼게. 지금 사는 집도 있고, 에뮬이 일하고 있는 농장도 있어서 나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마도 언니가 결정해야 할 거다. 에뮬은 아스텔라 언니가 원하는 대로 따를 테니까.
“그럼, 이제 정말 우리 둘뿐이구나.”
침대에 모로 누워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언니의 새파란 눈동자에 내가 비쳤다.
아마도 내 물빛 눈동자에도 언니가 비치고 있을 것이다.
이제 세상에 우리 단둘이라고 말하는 언니에게 진실은 숨기고, 그럴싸한 말들만 늘어놓는 거짓말쟁이 동생이.
아버지의 죽음도, 어머니의 죽음도, 테오도르의 광증과 내가 하는 일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도. 나는 언니에게 아무것도 진실하게 말하지 않았다.
“언니.”
“응?”
나를 바라보는 언니의 표정은 그저 맑았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언니의 눈동자는 무한한 신뢰로 가득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언니를 배신했다.
유리 새장에 가둬놓은 아름다운 새에게 최고의 먹이를 주고, 깨끗한 물을 주며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결코 단 한 번도 마음껏 날 수 있는 하늘은 주지 않는 기만자였다.
“아스텔라 언니.”
“그래. 듣고 있어. 말해.”
무슨 이야기든, 얼마든지 들어주겠다는 듯이 미소 띤 얼굴로 아스텔라 언니가 말했다.
“아주 옛날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아.”
나는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