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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106화 (106/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06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테오도르와 굿모닝 인사를 하고, 함께 아침을 먹고, 서재에서 책을 봤다.

점심도 함께 먹고, 정원을 산책하고, 담소를 나눴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나는 스기엔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클레어와 만나서 수다를 떨었다.

꼬치꼬치 캐묻는 클레어에게 테오도르와 좋은 관계가 되었노라 털어놓으니, 눈을 빛내며 더욱 꼬치꼬치 캐물어서 대답하느라 조금 힘들었다.

하지만 클레어가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해주었고, 앞으로도 행복하기를 바란다고도 말해주었다.

이제 하녀 따위는 때려치우고, 신분 상승하는 거냐고 말했을 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조금 난감했지만.

어쨌든, 이런 평화로운 나날 중에서 나의 고민은 하나였다.

“근손실 날 것 같은데…….”

목발을 짚고 그럭저럭 잘 걸어 다니긴 했지만, 다친 허벅지는 아직 나았다고 보기에는 무리였다.

거기다가 테오도르의 심부름하러 갔다는 인스트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즉,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훈련을 며칠째 빼먹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냥 편하고 좋았지만, 이제는 슬슬 걱정될 지경이었다.

“상체만이라도 뭔가 해야 하지 않나?”

목발을 아령 삼아 올렸다 내렸다 해봤지만, 가벼운 목발이 운동이 될 리가 만무했다.

적어도 한 손으로 들기엔 묵직한 스기엔정도는 되야 운동이 될 것 같았다.

물론, 스기엔은 자신을 아령으로 삼는다고 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하겠지만.

“그러고 보니, 테오도르는 뭔가 운동을 하는 걸까?”

나는 넓은 테오도르의 어깨와 단단한 복근을 떠올렸다. 그리고 두꺼운 허벅지와…… 그리고…….

“레나티스?”

“꺄아아아악!”

상상의 대상이 갑자기 말을 걸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미안. 놀랐어?”

커튼을 열고, 테오도르가 서 있었다.

“아, 아뇨. 괜찮아요.”

사실, 테오도르가 미안할 일이 아니었다. 내가 미안할 일이었지…….

다시는 혼자서 테오도르의 몸을 떠올리지 않을 거다.

…… 진짜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 있으세요?”

늦은 시간에 테오도르가 내 방을 찾은 것을 보면, 용건이 있을 것 같았다.

“인스트가 돌아왔어.”

오! 그럼 내일부터는 훈련을 할 수 있는 건가?

“다른 사람과 함께.”

나는 테오도르가 늦은 시간에 나를 찾아온 이유가, 그 다른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 * *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기대감이 벌써 3번째였기 때문이었고, 앞선 2번은 기대감이 산산이 부서졌을 뿐만 아니라, 기대가 재앙으로 변했었다.

“괜찮아.”

내가 긴장한 것을 알아차린 것인지, 테오도르는 등을 어루만져주었다.

이번에는 나 혼자 추측한 것이 아니었다. 테오도르가 정확하게 말한 것이니 틀림없는 정보였다.

어쩌면, 그래서 더 긴장된 것일 수도 있었다. 내가 정말 원하던 순간이 이제야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나는 크게 숨을 한번 쉬고, 조심스럽게 응접실 문을 열었다.

늦은 시간인지라 응접실은 촛불로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빛 속에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언니?”

내 목소리에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나와 같은 분홍색이지만, 나와는 달리 찰랑찰랑하게 뻗은 머리카락. 반듯한 이마와 어여쁜 파란색 눈, 곧게 뻗은 코와 조그만 붉은 입술.

“레나티스!”

그리고 내 이름을 부르는 고운 목소리.

“아스텔라 언니!”

언니였다.

내 사랑하는 가족, 하나뿐인 자매, 내 인생까지 바칠 수 있는 존재, 나의 아스텔라 언니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뛰었다. 그리고 중간 어디쯤에서 서로 팔을 벌렸고, 서로의 품에 안겼다.

내내 그리웠던 그 품은 내 기억과 똑같이 따스했다.

그리고 언니의 머리카락에 파묻은 내 코가 내가 좋아하는 포근한 그 냄새라고 말하고 있었다.

너무 좋아서 나는 더 힘을 줘서 언니를 꽉 끌어안았다.

내 손에 가득 차는 존재감이 이게 꿈이 아니라, 진짜라고, 진짜 아스텔라 언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디 다쳤어? 왜 절뚝거리는 거야?”

몸을 떼어 내자마자 아스텔라 언니는 그걸 물었다.

“아……. 그게 일이 좀 있어서.”

“왜? 무슨 일? 넘어졌어? 싸웠어? 아니면, 어디서 떨어지기라도 했어?”

아스텔라 언니는 내가 무슨 말을 할 겨를도 주지 않고 폭풍과 같이 질문을 했다. 하지만 이 상처에 관해 설명하자면, 길고도 복잡했다.

“문에 부딪혔어.”

나는 매우 단순한 사실만을 말했다.

“조심 좀 하지. 너는 애가 늘 덜렁거리고. 이러니까 내가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자책하는 말과 함께 언니의 큰 눈에 금세 눈물이 가득 고였다.

“아니, 뭐. 언니가 옆에 있는다고 내가 다치지 않나? 같이 살 때도 막 다치고 그랬는데. 언니는? 언니는 어때? 괜찮아? 어디 다치거나, 아픈 데는 없어?”

나는 오랜만에 보는 언니 얼굴에서 눈을 떼는 것이 못내 아까웠지만, 간신히 눈을 떼고 언니의 몸을 살폈다.

“살이 빠진 것 같아. 자리 잡기 힘들었어? 에뮬 오빠가 고생시켰어?”

“그런 것 아니야.”

언니가 그렇게 대답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언니는 힘들다고 해서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여기까지 오는 데 오래 걸려서 그럴 거야. 살면서 마차를 이렇게 길게 탄 건 처음이었거든.”

“아, 그래? 언니가 사는 곳에서 멀었어?”

“응. 아주 멀었어.”

아스텔라 언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끝내 후드득 떨어지고 말았다.

“울지 마, 언니. 나는 아주 잘 지냈어. 나 봐봐. 다리는 다치긴 했지만, 얼굴에는 살이 포동포동 올랐지 않아? 여기 음식이 정말 맛있거든.”

나는 웃으면서 아스텔라 언니를 향해서 얼굴을 들이댔다. 그러자 간신히 아스텔라 언니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게. 여기서 잘 먹나 봐. 얼굴이 좋아졌어.”

우리는 미소 띤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저 이렇게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았다.

“보고 싶었어.”

나의 진심.

“나도 보고 싶었어.”

언니의 진심.

우리는 다시 서로를 껴안았다. 내일 아침까지 이러고 있다고 해도, 떨어져 있던 시간을 메우기엔 부족할 것 같았다.

“오랜만의 재회가 매우 감격스러운 것은 알겠지만,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듯하군. 언니분은 며칠째 마차를 타고 와서 피곤할 테고, 레나티스는 아직 다리가 성치 않으니.”

테오도르의 말에 언니와 나는 포옹을 풀었다. 아침까지 이러고 있어도 부족하겠지만, 부족분은 내일 또 메우면 될 일이었다.

아스텔라 언니는 어딘지 모르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있으니까.

“아, 언니. 이쪽은 테오도르 드 카르오 님이셔. 이 저택의 주인이시고, 나를 고용해준 분이시고, 또…….”

나의 연인이라는 말을 해야 할까?

나는 잠시 망설였다.

오랜만에 만난 언니에게 갑작스럽게 ‘나 남자친구가 생겼어! 그리고 사실은 깊은 관계까지 갔어!’라고 말하는 것이 괜찮은지 알 수 없었다.

연인이 생긴 것도, 그 사람을 가족에게 소개하는 것도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언니도 나에게 그런 적이 없었다. 그저 내가 먼저 알아내고, 오히려 야반도주를 부추겼지.

거기다가 테오도르와 나는 신분차가 있었고, 아스텔라 언니는  생각과 걱정이 많은 편이었다.

클레어처럼 해맑게 축하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나의 미래를 상상하며 걱정할게 뻔했다.

“…… 언니를 여기까지 데려와 준 분이셔.”

결국, 나는 연인이라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언젠가는 하겠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는 아닌 것 같았다.

“오는 길에 인스트 님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 레나티스에게 잘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아스텔라 언니는 손으로 가슴께를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언니의 찰랑거리는 분홍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고개를 들고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귀에 꽂았다.

일을 하는 손이라 조금 거칠기는 했지만, 그 자태만은 어느 귀족 아가씨보다 우아했다.

역시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스텔라 언니였다. 나는 오래간만에 보는 언니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저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

그리고 그건 테오도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언니가 인사를 했음에도,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아스텔라 언니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테오도르 님?”

“…… 별말씀을.”

살짝 당황하며 내가 테오도르를 부르자, 그제야 테오도르가 중얼거리듯 사양하는 말을 했다.

“이쪽은 저희 언니, 아스텔라 그라티아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에뮬 랑시드. 언니의…….”

그랬다. 나도 언니를 보느라 이제까지 몰랐는데, 에뮬도 언니와 같이 와 있었다.

나는 에뮬을 소개하려다 잠시 망설였다. 연인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남편? 아, 그렇다면 애초에 언니를 아스텔라 랑시드라고 해야 했을까?

하…… 내가 평소에 이런 걸 해봤어야 알지.

나는 슬쩍 아스텔라 언니를 쳐다보았다. 언니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내가 잘하고 있다고 눈짓해주었다.

내 말을 바로잡지 않은 것을 봐선 아직 언니는 랑시드가 아닌 모양이었다.

“……연인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나는 두 사람의 소개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에뮬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테오도르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잠시 나는 또 혼란에 빠졌다.

지금은 이런 관계지만, 만약에 내가 테오도르와 연인이라고 밝히면, 에뮬이 아스텔라 언니의 연인이니 손윗사람이 되는 건가? 하지만 테오도르는 귀족이고 에뮬은 평민이니까…….

음…… 모르겠다. 이런 건 너무 어렵다.

“일단, 밤이 늦었으니 오늘 밤은 이만 쉬는 게 좋겠군.”

쉬어야 한다는 테오도르의 말은 옳았지만, 나는 아쉬워서 언니의 손을 붙잡았다. 언니 역시 마찬가지인 듯, 내 손을 꼭 쥐었다.

“손님 방을 2개 준비해둘 테니, 푹 쉬길 바라오.”

어? 방이…… 2개요?

이제까지 다 옳은 소리만 한 테오도르였지만, 방금 그 말은 좀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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