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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105화 (105/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05

“으으~ 피곤하다~.”

나는 침대에 그대로 털썩 누워버렸다.

한자리에서 오래 책을 읽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중간중간에 잘생긴 요물의 유혹을 뿌리치기까지 해야 하니, 그것도 너무 힘들었다.

“결국, 알아낸 것은 없네.”

가장 힘든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열심히 했지만, 성과가 없다는 것.

적어도 별채의 서재에서는 슬라임의 존재에 대해서 확신할만한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전생에서도 익숙한 존재인, 드래곤이라던가 악마, 혹은 천사 같은 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슬라임에 대해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통통 뛰어다니는 귀여운 반투명의 물방울은 엄청나게 귀여우니까, 그걸 본 사람이 있으면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아무도 슬라임을 본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나는 옆으로 굴러 자세를 바꾸며 중얼거렸다.

“저것 봐봐. 엄청나게 귀엽잖아? 저걸 어떻게 말을 안 하고 배겨?”

나는 오물거리며 내가 창가에 말려둔 고구마말랭이를 훔쳐먹고 있는 분홍색 슬라임을 보며 말했다.

……응?

“으엌! 스기엔! 그거 내가 말려둔 건데!”

내가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순간, 스기엔은 한입에 남은 고구마를 다 털어 넣었다.

“이거 꼬들꼬들하게 말려서 먹으면 맛있단 말이야.”

나는 고구마 밑에 깔아 두었던 손수건만 덩그러니 남은 것을 보며 말했다.

“흥! 그냥 먹어도 맛있어.”

훔쳐먹은 슬라임은 당당했다.

“그래. 말려 먹으나, 그냥 먹으나, 맛있게 먹으면 됐지.”

이미 없어진 것을 어쩌겠나 싶어서 부스러기만 남은 손수건을 창문 밖으로 내밀어 탈탈 털었다.

그러고 나서 아직도 우물거리며 고구마를 먹고 있는 스기엔의 앞에 앉았다.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책에서는 건진 것이 없었지만, 이렇게 본인이, 아니 본몬스터가 눈앞에 있으니 본몬스터에게 물어보면 되겠다 싶었다.

“스기엔, 뭐 좀 물어봐도 돼?”

“훗- 미천한 인간이 고매하신 고위 마족님의 지식을 필요로 하나 보군.”

여러모로 건방진 대답이었지만, 일단은 질문을 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스기엔, 네 집은 어디야?”

“어디긴? 여기지.”

제법 당당하게 스기엔은 말했다.

“여긴 카르오 저택이잖아. 굳이 말하자면, 카르오 대공님의 집이지.”

“그건 너희 인간 기준이고.”

스기엔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에 납득이 되어버렸다.

하긴, 집문서나 땅문서같은 건 인간의 기준일 뿐이었다. 여기 사는 새들이나 벌레들도 문서는 없지만, 전부 자기네 집이긴 하겠지.

“그럼, 여기서 태어났어?”

“그렇진 않아.”

“어디서 태어났는데?”

“산.”

“무슨 산?”

“산이 산이지, 무슨 산이 어딨어?”

그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

인간이 이해하기에 슬라임의 대답은 너무나 자연 친화적이었다.

“그럼 중간에 이쪽으로 이사 온 거야?”

“그렇지.”

“언제?”

“…….”

스기엔은 잠시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그 산에서 그냥 막 뛰어서 온 거야?”

“음…….”

추가 질문에 스기엔의 인상은 더욱 찌푸려졌다. 뭔가 중요한 것이 나올 것 같아 나는 긴장된 표정으로 스기엔의 대답을 기다렸다.

“모르겠는데?”

“응?”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나질 않아.”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맥빠지는 대답만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아니, 잘 좀 생각해봐. 얼마나 오래되었길래?”

“기억이 안 날 만큼 오래되었지.”

스기엔은 너무나 당당하게 대답했다. 네가 더 캐물어봤자, 기억나지 않는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반복할 것 같았다.

“그럼, 혹시 가족은 있어?”

그래서 나는 질문을 바꾸기로 했다.

“가족?”

“뭐, 엄마나 아빠. 형제자매나 친인척. 이모, 고모, 삼촌, 숙모, 기타 등등.”

“그런 거 없어.”

“그럼 슬라임은 어떻게 태어나는 거야? 엄마 아빠가 없으면?”

“넌 네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아?”

“당연하지! 내가 나이가 몇 살인데! 엄마 아빠가 서로 사랑해서 손을 잡고 자면, 아기가 만들어지는 거야.”

물론, 손만 잡고 자는 게 아니라는 건 나도 알지만, 굳이 스기엔에게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정말 손만 잡고 자면 애가 생긴다고?”

스기엔의 한쪽 입꼬리가 매우 음흉하게 위로 올라갔다.

뭐, 뭐야? 너, 뭐, 알아? 넌 슬라임인데?

“그, 그래!”

나는 일단 냅다 우기기로 했다.

“그래. 그럼 대충 인간은 그렇게 태어난다 치고, 내가 어떻게 해서 태어나는지 알려줘?”

여전히 뭔가 음흉한 미소를 띤 채, 스기엔이 말했다. 슬라임이 어떻게 태어나는지 궁금했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아, 아니.”

나는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네가 그렇다면, 내 지식은 지식으로 남겨두지.”

내 대답을 듣고 나서야 스기엔은 음흉한 미소를 거두고 대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뭔가 분했다.

“결론적으로, 스기엔은 가족은 없고, 출생지는 이름 모를 산이고, 집은 소유권은 없는 카르오 저택이라는 거네. 그 중간에 기억은 없고, 말이야.”

“그렇지.”

내가 자기 말귀를 아주 잘 알아들었다는 듯, 흡족한 표정으로 스기엔은 말했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도움이 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종족은 슬라임…….”

“고위 마족.”

나는 은근슬쩍 스기엔의 종족을 확정하려 했지만, 스기엔은 칼같이 정정했다. 슬라임이나 마족이나 없는 존재인 것은 매한가지일 뿐인데.

“결국, 아무 결론이 없네.”

나는 다시 침대에 풀썩 누워버렸다.

“무슨 결론을 바란 건데?”

스기엔도 폴짝 침대로 뛰어넘어 왔다.

“그야…….”

나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사람들이 아무도 너를 모른대. 어쩌면 스기엔, 너는 없는 존재일 수도 있어. 그냥 내 상상의 친구 같은 걸지도 몰라.’

라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실,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될 수도 있었다.

지금 당장 스기엔을 테오도르나, 클레어나, 어쨌든 아무 사람에게 보여주고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지금 이 슬라임이 보이냐고.

보인다면? 스기엔은 존재하는 것이겠지. 그 정체가 무엇이든지 간에.

보이지 않는다면? 스기엔은 내 상상의 존재라는 결론이 날 터였다.

‘그러다가 스기엔이 사라져버리면 어떻게 해?’

꿈은 꿈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깨기 마련이었다. 내 상상의 친구는 자신이 상상의 부산물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사라져버릴 수지도 몰랐다.

아니, 내 상상이니까 내가 없애버리는 것이겠지.

‘스기엔이 내 상상이 아니라면, 별도의 설정이 있는 존재일지도 몰라.’

무릇, 작가란 인간들은 글 쓰는 것보다 세계관을 짜고, 쓸데없는 설정을 덧붙이는 것을 좋아하는 생명체들이었다.

그게 본문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그 설정이 나오는 장면이 하나도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예를 들면, 빙의한 여주의 돌아가신 현실 엄마가 베이킹의 달인이었다거나, 조연 캐릭터가 키우는 뱀의 연애사나 장래에 태어날 아기 뱀의 이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설정이, 그 현실을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적어도 저 뱀은 작가의 설정에 따라 자유로운 독신의 스네이크 라이프가 아니라 평생을 함께할 반려 뱀과 귀여운 아기 뱀이 있는 삶을 살게 될 테니까.

그러니까 어쩌면 스기엔의 존재에 대한 이유를 밝혀내면, 이 세계의 세계관에 대해서 좀 더 잘 알 수 있게 될 거고, 또…….

“뭐야? 말을 왜 하다 말아?”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이, 스기엔의 뽀로통한 목소리에 끊겨버렸다.

“응? 아……. 할 말을 잊어버렸어.”

하지만 아직 스기엔에게 무언가를 말할 만큼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아까 내가 너무 오래돼서 잊어버렸다고 할 때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젊은 것이 벌써 그렇게 기억력이 흐릿해서야. 쯧쯧.”

저기요, 슬라임 님? 그렇게 탱탱한 피부로 그렇게 늙은이 같은 말투 구사하기 있나요?

하긴, 인간의 나이와 슬라임의 나이 개념은 다를 수도 있겠다. 개의 1년과 사람의 1년이 다르듯이 말이다.

“저기, 스기엔?”

“응?”

“그럼 네가 몇 살인지는 알아?”

“몇 살이냐고?”

“응.”

“흐음…….”

스기엔은 생각에 빠졌다. 나는 두근두근한 심정으로 스기엔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탱탱한 피부를 봐선 분명 스기엔의 나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가끔 구사하는 말투를 봐선 어느정도 나이가 있을지도 몰랐다.

의외로 막 거북이처럼 157세 같은 나이가 스기엔의 입에서 나올지도 몰랐다.

그러면 이제껏 내가 스기엔에게 반말하고, 친근하게 대한 것이 너무 버릇없는 행동이었다고 반성해야 할까?

그리고 앞으로 호칭은 스기엔 할아버지가 되어야 할지도 몰랐다. 아니면 애칭처럼 스르신이 되던가.

그렇게 나이가 많으면 이제는 스기엔에게 내가 존댓말을 해야겠지? 그건 싫은데.

“잘 모르겠는데?”

한참 생각하는 것 같았던 스기엔이 내놓은 대답은 그것이었다.

“나이를 몰라?”

“딱히 나이를 세지 않아서.”

이로써 스기엔은 나이까지 불명이 되고야 말았다.

“그래. 뭐, 몇 살이든 뭐 어때?”

어쩌면 나이는 모르는 게 더 좋을 수도 있겠다. 그래야 지금처럼 친구로 지낼 수 있을 테니까.

“네가 몇 살이든지 같이 오래오래 살면 좋겠다.”

나도 모르게 소원이 흘러나왔다.

“뭐, 그러든지.”

퉁명스럽게 말하며 고개를 돌린 스기엔의 볼은 살짝 진한 분홍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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