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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104화 (104/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04

서늘한 한기가 내 몸을 감쌌다. 나는 이상한 예감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뭔가 이상했다. 마치 아네시아가 나타나기 전, 뭔가 싸한 분위기에 마을 사람들이 하던 일을 다 멈추게 되는 것과 비슷했다.

“테오도르?”

나는 거의 속삭이듯이 테오도르를 불렀다.

멀리 있는 걸까? 테오도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심지어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싸늘한 적막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테오도르…….”

나는 다시 한번 테오도르를 불렀다.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대신 저 멀리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미라가 되어버린 죽은 아기를 업고 다닌다는 아네시아의 귀신이 나타날 때처럼.

“…… 레나티스.”

내 뒤쪽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렸다.

테오도르가 아니었다. 어떤 여자의 목소리였다.

“으아아아악!!!”

나는 서재가 떠나갈 듯이 소리를 쳤다.

“끼아아아악!”

그리고 그건 클레어도 마찬가지였다.

…… 응? 클레어?

“클레어?”

나는 조심스럽게 내 눈앞에 보이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응.”

그리고 쟁반을 든 클레어가 대답했다.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네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아마도 조금 전에 내가 느낀 한기도 클레어가 서재의 문을 열어서 복도에 있던 찬 바람이 들어와서 그런 게 틀림없었다.

요즘은 날씨가 제법 쌀쌀하니 말이다.

“무슨 일이지?”

저 멀리에서 테오도르가 달려왔다. 저렇게 멀리 있으니 내 소리가 들리지 않을만했다.

“리타 아주머니께서 레모네이드를 내어가라고 하셔서요.”

그제야 클레어가 든 쟁반 위로 청량해 보이는 연한 노란색 액체가 담긴 유리컵이 보였다.

책을 보기 시작한 것이 제법 시간이 되었던지 안 그래도 목이 마르던 참이었다.

거기다가 리타 아주머니가 나까지 생각해주신 건지, 레모네이드는 두 잔이었다.

“고마워, 클레어.”

나는 쟁반에서 얼른 레모네이드를 내려 테이블에 놓았다.

“어, 아, 응.”

클레어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옆에 있는 테오도르의 눈치가 보였는지 할 말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나도 알았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그것도 테오도르 님이랑 같이? 귀족의 서재에서 네가 책을 봐? 테오도르 님이랑 무슨 사이야? 등등.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솔직하게 말해야 할지, 어디까지 솔직하게 말해야 할지도.

결국, 나는 클레어가 빈 쟁반에 의문을 가득 담아서 나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번에 마주칠 때, 무슨 대답을 해야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찾던 내용은 찾았어?”

레모네이드 잔을 들고 테오도르가 물었다.

“아뇨. 아직요.”

나는 얼른 클레어에 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일단은 눈앞에 있는 책이 먼저였다.

클레어에 대한 것은 나중에 조용히 혼자 있을 때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이 책도 네가 찾는 부류이려나? 네가 원하는 게 정확하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테오도르는 멀리 있는 책장에서 찾은 것인지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저도 제가 원하는 게 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어요.”

적어도 무서운 귀신 이야기는 아닌 게 확실했다.

아까 얼마나 놀랐던지, 입안이 바싹 말라 있어서 레모네이드가 더욱 시원하고 달게 느껴졌다.

“하지만 더 볼 거지?”

“네.”

내 대답에 테오도르가 피식 웃었다.

“왜 웃으세요?”

“그냥, 너 같아서.”

“저 같아서요?”

“뭐든지 해보겠다고 하는 게.”

내가 그랬었나? 테오도르가 한 말에 언뜻 공감이 가지 않아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그럼 열심히 해봐.”

남은 레모네이드를 쭉 들이키고, 테오도르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네. 그럴게요.”

나는 덮었던 책을 다시 열었다.

조금 전까지 내가 읽던 이야기는 물속에 숨어 있다가 발을 잡아당기는 물귀신 이야기였다.

온몸에 비늘이 있다는 말을 보면 혹시 인어가 아닌가 싶었다. 그러면 이 세계에서도 몬스터가 있긴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인어가 아니라, 그냥 귀신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거기다가 인어는 인어고, 슬라임은 슬라임이었다.

하나의 종이 존재한다는 것이, 다른 종의 존재를 설명해줄 수는 없었다.

그러면 그냥 넘기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 심리라는 게 참 이상했다. 무서운데도 그다음 이야기가 자꾸 궁금해서 보게 되었다.

특히나, 이 물귀신의 사연은 아직 나오지 않아서 더 그랬다.

가뭄에 아기를 잃은 과부 아네시아의 사연은 너무 슬펐다.

하지만 자기 먹을 것도 부족해서 식량을 나눠주지 못한 마을 사람들에게 죽어서 복수를 하는 건 좀 심하지 않나 싶긴 했다.

“아, 그런데 카르오 저택에 아기도 있나 봐요?”

나는 괜히 테오도르와 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어서 막 서너 걸음을 뗀 테오도르의 뒷모습을 향해서 물었다.

그러자 테오도르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았다.

“아기?”

“네.”

“카르오 저택에 아기는 없어. 간혹 수습생 삼아서 어린아이를 고용하긴 하지만, 그래도 십대 후반 정도의 아이들이야.”

“네? 하지만 아까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소름이 쭉 돋았다.

“잘못 들었겠지. 고양이 울음소리라거나.”

“아니에요. 분명히 아기 울음…… 소리…….”

차라리 고양이 울음소리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저, 저기, 테오도르 님!”

나는 다급하게 테오도르를 불렀다.

“이, 이쪽으로 다시 오셔서, 좀 앉으시면 안 돼요?”

“안될 건 없지만, 왜?”

“그, 그냥요.”

테오도르는 내 요청이 이해되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선선히 도로 테이블로 다가와 앉았다.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옮겨, 최대한 테오도르 쪽으로 붙어 앉은 다음에 다시 책을 펼쳤다.

어른들이 가지 말라는 강에 놀러 간 아이들이 신나게 수영을 하고 노는 참이었다.

그 아이들은 몰랐겠지만, 나는 슬슬 물귀신이 나타날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차갑고 축축한 손이 슬그머니 다가와 내 허리를 붙잡았다.

“꺅!”

당연히 나는 소리를 지르면서 놀랐다. 그리고 잽싸게 책을 집어 던지고, 옆에 있던 테오도르에게 덥석 매달렸다.

테오도르에게 가지 말라고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 아, 미안.”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바로 그 테오도르의 손이었다.

조금 전에 레모네이드를 마셨던 터라, 손이 차갑고 축축했던 것이었다.

“놀랐어?”

겸연쩍은 표정으로 테오도르가 물었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내 심장은 미친 듯이 펄떡거리고 있어서 과로사할 지경이었다.

“진지하게 책보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만.”

“…….”

“손이 닿는 거리에 있으니까, 만지고 싶어서…….”

“…….”

“미안.”

“괜찮아요.”

아무렴. 심장이 살다 보면, 가끔 과로도 하고 그런 거지. 평탄하게만 살면 재미없으니까,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을 거다.

내가 너무 귀엽다는데, 그래서 만지는 걸 참을 수 없었다는데, 심지어 테오도르가 사과까지 하는데 괜찮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코, 사과하는 테오도르의 모습이 좀 귀여워 보여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귀신을 무서워하나 봐.”

“당연하죠. 귀신이잖아요. 테오도르 님은 귀신이 무섭지 않으세요?”

“별로. 있는지도 정확하게 모르는 존재잖아.”

“귀신은 있어요!”

“봤어?”

“본 건 아니지만…….”

테오도르의 질문에 슬그머니 말꼬리가 넘어갔다. 물론, 본 적은 없었다. 봤으면, 나는 이미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테니까.

“하지만 있어요! 분명히!”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테오도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별로 믿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귀신이 있다고 해도 난 더 무서운 건 사람이라고 생각해.”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나는 테오도르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아네시아를 귀신으로 만든 것도, 따지고 보면 사람이었다.

어쩌면 이 물귀신도 무슨 사연이 있을지도 몰랐다.

“저기, 있잖아요. 테오도르 님.”

“응?”

“손…… 잡아 주실 수 있어요?”

그냥 옆에 앉은 걸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조금 부끄럽지만, 테오도르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청했다. 그러면 조금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당연히 잡아 줄 수 있지.”

아직 좀 차갑기는 했지만, 커다란 테오도르의 손이 내 손을 잡아 주자 괜히 든든해졌다.

“그런데…….”

다시 책을 읽으려는 찰나였다.

낮은 목소리가 내 귀에 속삭였다.

“손만 잡을 자신은 없는데.”

나는 눈을 깜박였다. 슬쩍 몸을 빼며 고개를 돌리자, 촉촉하고 은밀한 눈빛을 한 테오도르가 보였다.

그리고 그런 테오도르가 천천히 나를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저절로 마른침이 꿀꺽 삼켜졌다.

귀신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라더니, 진짜였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테오도르에게 홀려버리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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