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100
“스기엔!”
대답이 없었다.
“스기엔! 어딨어?”
평소라면 이쯤에서 ‘뭐야? 왜 불러?’라는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야 했다. 혹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스기엔이 통통 튀어서 나타나야 했다.
입은 툴툴거리고 표정은 시큰둥했지만, 스기엔은 내가 부르면 항상 나타났고 내 부탁은 항상 들어주었으니까.
“스기엔!”
하지만 여전히 대답도, 나타나지도 않았다.
‘내가 존재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인 걸까?’
더는 스기엔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자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몬스터든, 유령이든, 상관없었다. 스기엔은 카르오 저택에서 사귄 나의 첫 친구였고, 가장 좋은 대화 상대였다.
그리고 유일하게 온전하게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이기도 했다.
“스기엔…….”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아, 쫌! 그만 불러!”
막 눈물이 떨어지려는 찰나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스기엔?”
“그래, 그래. 나 여기 있어. 그러니까 그만 좀 불러.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불퉁한 표정으로, 분홍색 슬라임이 이불 아래에서 꾸물꾸물 흘러나와 통~ 하고 튀어 올랐다. 핑크빛 뺨에 배게 자국이 한껏 찍힌 채로.
“자, 자고 있었어?”
“그래. 해가 중천에 떴으니 일어나야 하고 어쩌고 하는 잔소리할 생각이면, 위대하신 고위 마족께서는 야행성이라고…… 어…….”
버럭거리며 화를 내려던 스기엔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그 대신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야, 너…… 우냐?”
“으응?”
스기엔의 말에 내 눈에 눈물이 한껏 고여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 뭐! 왜 우는데! 아니! 그때 지하에서 네가 말한 그건! 내가 그 잘생긴 놈 잘 있나 보려고 왔는데, 그놈은 방에 없더라고. 그래서 다시 지하로 내려왔더니만, 이번에는 네가 없고! 그래서 나는 그냥 방에서 기다렸지! 근데! 네가 방에 안 들어왔잖아! 내가 네 부탁을 안 들어준 게 아니야!”
스기엔은 침대를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내용은 분명 변명이지만, 목소리는 자신이 잘못한 것 하나 없다는 듯이 컸다.
스기엔다웠다. 내가 아는 스기엔이었다.
그게 안심이 되어 놀라서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러나와버렸다.
“아니! 그게 뭐라고 울어! 뭐, 왜, 지금이라도 그놈 잘 있나 다시 보고 올까? 어?”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자, 스기엔은 더욱 안달이 나는지 자청해서 테오도르를 보고 오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아니. 괜찮아.”
“아니. 별로 안 괜찮아 보이거든?”
“괜찮아. 나 안 울어.”
주먹으로 눈물을 쓱쓱 닦으며 말했다.
“안 울면? 네 눈에서 나오는 그건 땀이냐?”
“응. 땀이야. 날씨가 덥네.”
“좀 있으면 얼어 죽을 겨울인데, 덥기는 뭐가 더워?”
“성질내는 것 보니까 스기엔이 확실하다, 그렇지?”
“뭐래?”
스기엔은 내 말에 눈을 흘기면서 말했다. 그걸 봐서도 스기엔이 확실했다.
“아, 그만 울어! 왜? 배고파? 빵 좀 훔쳐다 줄까? 아니면, 나무 열매 좀 따다 줘?”
화면서도 다정한 걸 보니, 진짜로 스기엔이 확실했다.
몬스터가 없는 세상일지라도, 스기엔은 여기에 있었다.
* * *
밝고 유쾌한 장례식이 어디 있을까만은 카르오 대공비의 장례식은 유독 말이 없고, 어두웠다.
겉보기에는 세간에 이미 소문이 나버린 고인의 사인이 입 밖으로 내기 힘든 사연이라는 것과 그 때문인지 가까운 사람 몇만 청해 조용히 장례를 치르고 싶다는 유족의 뜻 때문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속을 살펴보면 카르오 대공비의 장례식이 유독 조용한 이유는 바로 유족이자 대공비의 가족인 니제르와 테오도르의 태도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표정 없는 얼굴로 우두커니 서서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관 위에 꽃을 놓을 때도, 문상객을 맞을 때도, 심지어 관이 무덤 속으로 들어갈 때도 두 사람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린 대공비의 여동생이나 오열하다 못해 실신해서 실려 나간 그녀의 어머니와는 참으로 대조적이었다.
“보는 눈도 있는데, 눈물이라도 좀 흘려보지, 그러니?”
“대공님이야말로 근 25년 동안 부부로 지낸 사람이 죽었는데, 오열 정도는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공이라는 막중한 직위의 위신이 있는데 그럴 수야 없지.”
“러브스토리를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세간에 아주 로맨티시스트라고 소문이 나실 텐데요. 누가 알겠습니까? 세 번째 부인이 제 발로 찾아올지도요.”
테오도르의 그 말에 이제껏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던 니제르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의 피가 섞였지만, 자신과는 어딘지 모르게 닮지 않은 아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에 비하면,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죽은 에멘스에 비하자면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저 얼굴만은 니제르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내놈이 그까짓 얼굴이 잘생겨서 뭐에 쓴다고?’
그리고 그것마저도 니제르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차라리 에멘스만큼 똑똑했거나, 에멘스만큼 몸을 잘 쓰는 쪽이 나았을 것이다.
니제르의 기준에는 번듯하게 생긴 겉껍데기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이제 그만해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였지만, 말투는 단호했다.
“이제까지는 귀엽게 봐줬다만, 더는 네가 기어오르는 꼴을 봐주지 않겠다.”
“전혀 몰랐던 사실이군요. 대공께서 저를 귀여워해 주셨다니요?”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며 테오도르가 니제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더는 귀여워해 주지 않으시겠다니, 참으로 반가운 사실입니다.”
조금의 따스함도 없는, 가족의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눈 맞춤이 테오도르와 니제르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들의 눈빛에서는 오직 서로를 향한 짜증이 가득할 뿐이었다.
언제나 늘 그렇듯이.
하지만 그러다 서로 고개를 돌려버리고, 대화가 결렬되었던 언제나 와는 다르게 니제르가 피식 웃었다. 한껏 여유로운 자의 미소였다.
“네가 빚이 있다는 것을 잊었느냐?”
니제르의 말에 테오도르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물론, 네가 그 빚을 갚을 의무는 없겠지. 네가 무슨 약조를 하고 내게 도움을 구걸한 것은 아니니 말이야.”
니제르가 도움이니, 구걸이니 하는 단어를 고른 것은 당연히 일부러였다. 제멋대로 기어오르는 테오도르를 비웃고, 기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넌 네가 빚을 졌을 뿐만 아니라, 약점을 드러내기도 했다는 걸 알아야 할 게다.”
“…….”
“적어도 네가 네 형처럼 마녀를 죽일 거라는 걱정은 덜어서 좋구나.”
니제르가 항상 제 형보다 멍청하다고 여겼던 테오도르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두 알아들었다.
테오도르가 델마로부터 레나티스를 구해달라고 한 것이 니제르에게 빚을 진 것이자, 테오도르의 약점이 레나티스인 것을 알아차리게 했다는 말이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모르고 도움을 청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테오도르는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저 이기적인 남자는 테오도르를 제 마음대로 휘두를 기회를 놓칠 남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자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제 입에 재갈을 물고, 그 고삐를 제 손으로 대공의 손에 쥐여주는 꼴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나티스를 구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카르오 저택 안에서 대공비인 델마의 권한은 막강했다.
그녀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또한, 그녀의 사람은 저택의 곳곳에 있었고, 그녀를 따르는 기사와 사병 역시 그 수가 제법 많았다.
만약, 테오도르가 니제르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더라면 그는 레나티스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을 수도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런 기회만을 노려온 델마였으니까.
테오도르가 자신의 사병을 이끌고 델마에게 맞섰더라도 결론은 비슷하게 났을 터였다.
그는 별 이유도 없이 제 어머니를 죽인 패륜아가 될 것이고, 레나티스 역시 멀쩡하던 카르오의 후계자를 꼬여낸 세기의 악녀가 될 터였다.
테오도르는 그렇다 치더라도, 레나티스는 미래를 장담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그래서 테오도르는 조용히 레나티스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니제르에게 넘긴 것이었다.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마침내 입을 뗀 테오도르가 물었다.
“그야 많지.”
테오도르의 질문에 니제르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드래곤의 심장, 유니콘의 뿔, 인어의 비늘, 불사조의 깃털, 그리고…….”
그는 말도 안 되는 단어들을 늘어놓으며, 이런 시답잖은 대화가 혐오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한 아들을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장성한 아들의 화려한 결혼식.”
잘생긴 얼굴이 확연히 굳은 것을 보며 니제르는 기분이 좋아졌다. 활짝 웃고 싶은 것을 때와 장소를 생각하여 꾹꾹 참았다.
대신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네 어미에게는 언제나 불효자였는데, 다행히 이 아비에게는 말 잘 듣는 효자가 될 듯하구나.”
관을 덮었던 붉고 어여쁜 장미가 어느새 흙에 덮여서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카르오 대공가의 장례식이 끝나고 있었다.
* * *
방은 분명 스산하리라 생각했다.
지금 자신의 기분과 마찬가지로 어두침침하고, 공기마저 갑갑하리라 여겼다.
테오도르는 착잡한 심정으로 방문을 열었다.
“앗! 테오도르 님!”
문이 열린 순간,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셨어요?”
어두운 방이 아니라 눈부시게 밝은 미소가 테오도르를 반겼다.
“…….”
자신의 상상과는 너무 다른 광경에 테오도르는 잠시 멍해졌다.
“레나티스.”
아아- 그래. 네가 있었지.
테오도르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