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98
테오도르는 고요한 파도였다.
처음에는 잔물결과 같았다. 조용히 다가왔고, 천천히 내 입술을 적셨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촉촉이 젖어 들어가는 입술을 즐겼다. 발가락 사이로 흐르는 모래처럼 입술을 간질이는 혀에 나도 모르게 키득거리기도 했다.
그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파도는 거세어졌다.
부드럽게 입술을 적시던 테오도르의 혀는 어느새 입 안까지 파고들었다. 그의 혀가 내 안의 어딘가를 툭툭 건들 때마다 짜림함이 번져나갔다.
파도가 가슴을 툭, 건들자 가쁜 숨이 토해져 나왔다.
파도가 손끝을 툭, 건들자 팔이 수초처럼 흔들리다 제가 붙을 바위를 만난 것처럼 테오도르를 꽉 붙들었다.
파도가 다리를 툭, 건들자 차가움에 깜짝 놀랐는지 버둥거렸다. 바르작거리는 하얀 다리가 거슬리기라도 한 것인지 단단한 팔뚝이 그것을 붙잡았다.
“난 네가 활기찬 게 좋긴 하지만, 다리는 가만히 둬. 상처가 덧날지도 모르니까.”
그 속삭임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지금은 아프지 않아서 내가 환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슬며시 눈을 뜨자, 푸른 파도가 아니라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테오도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급하지 않아.”
내 표정에서 두려움을 발견한 걸까? 다정한 손길이 다시 내 뺨을 감쌌다. 그리고 그보다 더욱 다정한 입술이 지긋이 내 입술을 눌렀다.
마치 해변에서 조용히 물러나는 파도처럼 테오도르는 제 얼굴을 뒤로 물렸다.
“아, 저기!”
나는 다급하게 테오도르의 팔을 붙들었다. 반쯤 몸을 일으킨 테오도르의 벌어진 셔츠 아래로 탄탄해 보이는 가슴이 설핏 보였다.
‘운동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왜, 어떻게 근육질인 거지? 그러고보니 이전에 만졌던 복근이랑 허벅지도 엄청 단단했던 기억이…….’
“왜? 어디가 안 좋아?”
내가 기억을 더듬느라 말을 잇지 않은 것을 아파서 그런 것으로 생각했는지 테오도르의 얼굴에 금방 걱정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나는 걱정을 시키지 않기 위해서 얼른 대답하며, 테오도르의 가슴에서 얼굴로 재빨리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나의 침인지 테오도르의 침인지 몰라도, 어쨌든 타액으로 적셔져 촉촉한 테오도르의 입술이 보였다.
그 입술을 보는 순간, 나는 생각을 굳혔다.
“제가 급한데요.”
“뭐?”
“제가 안 괜찮아요. 제가 급해요.”
실제로 나는 꽤 다급하게 말했다.
“푸흡!”
멍하니 날 쳐다보고 있던 테오도르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멍하니 테오도르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아는 한, 가장 밝게 웃는 테오도르였다.
“어쩌면, 넌 이렇게 사랑스럽지?”
아뇨. 방금 그쪽이 평소 이미지랑 어울리지 않게 너무 밝고, 사랑스럽게 웃으셨는데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멀어졌던 테오도르의 얼굴이 다시 다가왔다.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보라색의 눈동자 안에 내가 가득 담길 정도로 가까웠다.
“사실은 말이야. 나도 괜찮지 않아.”
나의 다치지 않은 허벅지 쪽으로 테오도르가 은근하게 체중을 실어 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단단하고 은은한 열기가 전해져 왔다.
지하 감옥에서 날 안아 들 때, 그동안 내 안의 이미지와 달리 테오도르가 꽤 남자답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쪽은 꽤 정도가 아니었다.
매우, 심하게, 남자다웠다.
“사실은, 나도 매우 조급해.”
크고 따뜻한 손이 이불을 파고들어 내 허벅지에 닿았다. 물론, 다치지 않은 쪽이었다. 그리고 그 손은 천천히 위로 타고 올랐다.
그와 동시에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그것은 천천히 아래를 향해서 내려가고 있었다.
잠잠했던 바다에 다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레나티스.”
부드럽게 허벅지를 문지르던 손이 어느 한 부분에 닿았을 때, 나도 모르게 몸이 경직되었다.
그러자 괜찮다는 듯이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부드러운 키스가 귓불에 내려앉았다.
“레나티스…….”
너무 가까이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숨결에 오스스 닭살이 돋아났지만, 온기를 담은 입술이 부드럽게 피부에 맞닿자 이내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솟아올랐던 가슴이 내려가고, 들어 올려졌던 허리가 다시 얌전히 바닥에 내려앉자, 그제야 입맞춤의 가벼운 발걸음도 멎었다.
대신, 그 자리에 오래 머무르며 자신의 발자국을 남겼다.
“아……!”
찰나의 아픔과 찰나의 쾌감이 서로 스치자 내 입에서는 작은 숨이 토해져 나왔다. 그러자 테오도르는 다되었다는 듯, 붉은 자국을 핥았다.
축축한 혀가 아픔과 쾌감을 쓸어내리자 그곳에서부터 다시 감각이 퍼져나갔다. 두 번째 파도를 맞는 몸은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레나티스.”
내 몸의 감각을 하나하나 일깨운 테오도르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대답 대신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단단히 세워진 테오도르의 팔뚝에 키스했다.
그리고 밀려오는 파도에 내 몸을 맡겼다.
파도는 때로는 거칠었고, 때로는 짜릿했고, 때로는 부드럽게 내 몸을 감쌌다.
그 속에서 나는 몇 번이나 테오도르의 이름을 불렀고, 테오도르 역시 내 이름을 불렀다.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테오도르…….”
“레나티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서로뿐이었으니.
* * *
반짝, 눈이 떠졌다.
그리고 번쩍! 고개를 돌렸다.
‘있다!’
옆에 있는 얼굴을 확인하자 그제야 어젯밤 일이 나의 꿈이나, 망상이나, 전생에 읽었던 책의 되새김질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바로 옆에서 곤히 잠든 테오도르의 얼굴이 그 증거였다.
‘확실하지? 이거 생시지? 꿈 아니지?’
혹시나 이 아침의 풍경 자체가 꿈인 건 아닌가 싶어, 슬며시 내 볼을 꼬집어 보자 은근한 아픔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끼아아아악! 현실이야!’
나는 당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게 현실이 맞다고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서 펄쩍펄쩍 뛰고 싶었지만, 아직 자는 테오도르를 위해서 꾹 참고 속으로만 소리를 질렀다.
‘역시 잘생김은 취향을 뛰어넘는군.’
곤히 잠든 테오도르의 얼굴을 본 나의 감상평이었다. 이제까지 올곧았던 나의 키 2m, 몸무게 100㎏은 지금 생각나지도 않았다.
오로지 아침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테오도르의 미모만이 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자, 지금부터 투표를 받겠습니다. 눈 뜬 테오도르와 눈 감은 테오도르, 여러분의 테오도르는 누구입니까?
저는 눈 감은 테오도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모습을 보십시오. 이 청순가련하게 드린 속눈썹, 그늘이 지는 오뚝한 코,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뱉는 입술까지!
그야말로 숨 쉬는 조각상입니다!
아닙니다! 역시 최고는 눈 뜬 테오도르입니다.
저 모든 것에다가 신비한 보라색 눈까지 더한 완벽한 미모이지 않습니까? 잘생긴 것에 잘생긴 것을 더해 보십시오.
더 잘생긴 게 나오는 법입니다!
내 안에서 치열한 토론이 오가는 와중이었다.
“먼저 일어났군?”
그림자가 드린 속눈썹이 들어 올려지고, 신비한 보라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리고 낮고 그윽한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걸었다.
‘눈 뜬 거! 눈 뜬 거요! 그래야 말을 하니까요!’
순식간에 토론은 종료되었다.
“잘 잤어요?”
“응. 넌?”
“저도요.”
“다행이야.”
“제가 잘 자서요?”
“아니. 어젯밤 일이 꿈이 아니라서.”
“꿈이라고 생각하셨어요?”
“아니. 꿈일까 봐 두려웠지.”
솔직히 조금 놀랐다. 오늘 아침에 눈을 떠서 내가 한 생각과 테오도르가 한 생각이 비슷해서였다. 나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의심했는데, 테오도르도 그랬다니!
“이렇게 만져지는 걸 보니, 확실히 현실이군.”
테오도르는 손을 뻗어 내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곤 곱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 작은 미소에서 평화와 행복이 만져질 듯 선명하게 보였다.
“그럼요. 완전히 현실이죠.”
테오도르의 손에 내 뺨을 비비며, 나는 대답했다. 그러자 테오도르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마치 창문 너머에서 쏟아져 내리는 햇살처럼.
“아!”
너무 밝은 햇살에 그제야 나는 지금이 이른 아침이 아니라 제법 늦은 아침, 혹은 오전 시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침 훈련을 안 갔어요! 연락도 없이 훈련을 빼먹었다고 인스트 님에게 혼나겠어요.”
“괜찮아.”
벌떡 몸을 일으키려는 나를 테오도르가 잡아끌었다. 그리곤 자기의 품에 나를 가둬버렸다.
“인스트는 지금 저택에 없어.”
“안 계세요?”
그러고 보니, 테오도르가 광증을 일으킨 날에도 인스트가 없었다. 그래서 문밖을 오르디가 지키고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응. 내가 뭘 좀 시켰거든.”
“뭘 시키셨는데요?”
“그냥 뭘 좀 알아보라고 시켰어. 이제는 필요 없게 된 것 같기도 하지만.”
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테오도르가 말했다.
“인스트 님은 테오도르 님의 호위 기사 아닌가요? 그렇게 자꾸 저택 밖으로 심부름을 시키시면 어떻게 해요?”
지난번에 우리 아버지의 일도 인스트에게 알아보게 한 것이 기억났다. 그때도 인스트가 자리를 비웠었지.
“카르오 저택의 보안은 철저한 편이야. 내가 집 밖을 나가지 않으면, 인스트가 없어도 괜찮아.”
“지난번에 제가 욕실에서 변태를 만난 것 기억나지 않으세요?”
“그건…….”
테오도르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곤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인스트가 없어도 네가 있잖아?”
“저요?”
“그래. 날 해치지 못 하게 할 거라며”
테오도르는 내가 어제 대공비에게 한 말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빙긋 웃었다.
“내가 아는 한 가장 힘센 사람이 날 지켜줄 텐데, 무슨 걱정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테오도르는 나를 더 힘주어 안았다. 지금 자세로 봐선 내가 아니라, 테오도르가 가장 힘이 센 사람 같았다.
“날 지켜줄 거지, 레나티스?”
귓가에 속삭이는 음성에 닭살이 오소소 돋아났다. 나도 모르게 움찔 떨며, 어깨를 움츠리자 이번에는 귓가에 작은 웃음소리가 소복이 쏟아져 내렸다.
눈 부신 햇살 너머에 푸른 파도가 찰방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