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97
푹신했고, 포근했다. 그리고 따스했다.
‘이게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품이라는 건가?’
나는 눈을 감고 이 느낌을 온전히 만끽하려 애썼다. 테오도르의 품은 마치 침대처럼 푹신했고, 이불처럼 포근했으며, 이불 안처럼 따스했다.
…… 뭔가 이상한데?
아무리 테오도르의 품이 아늑하다고 해도, 단단한 남자의 몸이 이렇게까지 부드럽고 포근하고 따스할 수는 없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에 살그머니 눈을 뜨자, 많이 본 천장이 보였다.
‘테오도르의 침실?’
몇 번 와본 적이 있는 테오도르의 침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테오도르의 품이 아니라 테오도르의 침대에서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침대처럼 푹신한 게 아니라 침대였고, 이불처럼 포근한 게 아니라 그냥 이불이었던 거다.
“레나티스?”
하지만 테오도르의 품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테오도르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보였다. 그리고 내 손을 붙잡는 그의 손도 보였다.
손의 온기가 내게 따스함을 전해주고 있었다. 마치 테오도르의 품처럼.
“깨어났군.”
슬쩍, 테오도르의 얼굴에 안도가 스쳤다.
“제가 잠들었나요?”
“잠이라기보다는 기절이었지. 솔직히 말해서 네가 ‘눈이 부셔요.’라고 말하고 나서 고개를 툭 떨어뜨렸을 때는, 내 심장이 떨어질 뻔했어.”
“제가 그랬어요?”
기억이 없었다.
“그래. 위로 나오자마자 말이야. 그럴 만도 하지. 큰 상처를 입고, 그 지하 감옥에서 밤새도록 있었으니까 말이야.”
테오도르는 내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손을 뻗어, 내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조금 더 위로 끌어올렸다.
“네가 기절해 있는 동안 의사가 다녀갔어. 상처가 크고, 출혈이 많았긴 하지만, 다행히 주요 혈관은 비켜 갔다고 하더군. 박혀있던 파편을 바로 뽑지 않은 것도 큰 도움이 되었고. 그런 건 어디서 배웠지?”
제가 전생에 19금 피폐물을 많이 봐서, 도망치다가 다친 여주나, 괜히 불똥이 튄 여주의 혈육들이나, 남주에게 반죽음을 당할 뻔한 서브 남주들이 다쳤을 때 어떻게 하는지를 많이 봤거든요.
……라고 말할 수는 없지.
“그냥 여기저기서 주워들어서……. 하하하. 아! 그러고 보니 이불이 더러워지겠어요.”
나는 내 몸을 덮고 있는 새하얀 이불을 보며 말했다. 피는 잘 지워지지도 않는데, 흰색이라니!
클레어가 말한 세탁실에서 일하는 언니가 소피아랬나, 햄스터랬나? 아니지. 사람 이름이 햄스터일리는 없지. 그럼, 누구지?
어쨌든! 흰 이불에 묻은 붉은 피를 빨려면, 세탁실의 누군가가 죽어 나갈 것은 뻔했다.
나는 내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확 걷었다.
“으와아악!”
그리고 얇은 슈미즈 차림에, 그 슈미즈마저 배꼽 위로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는 비명을 지르며 도로 이불을 덮어버렸다.
“…….”
다급하게 도로 이불을 덮고 나서 재빨리 테오도르를 쳐다보자, 초점없는 눈으로 앞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보, 보셨어요?”
“……뭘?”
한 박자 늦은 대답에서 테오도르가 봤다는 것을 알았다. 그 반응에 내 얼굴은 속절없이 붉어지고 말았다.
“제 오, 옷도 테오도르 님이…….”
“아니. 옷은 의사가 오기 전에 리타 부인이 벗겼어. 네 몸을 닦아준 것도 리타 부인이야.”
테오도르는 내가 질문을 채 다 하기도 전에 재빨리 대답했다.
그렇구나. 나중에 리타 아주머니께 감사 인사를……. 아니, 잠깐만?
“그동안 테오도르 님은 어디 계셨는데요?”
“응?”
“리타 아주머니가 옷을 벗기고, 제 몸을 닦아준 걸 어떻게 아시는 데요?”
“…….”
“…….”
내 질문이 뭘 뜻하는지 알면서 테오도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침묵이 뭘 뜻하는지 아는 나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걱정돼서 어쩔 수 없었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테오도르가 말했다.
“눈을 감고 있는 네가 너무 연약해 보였어. 숨소리도 너무 가늘게 느껴졌고, 얼굴도 창백했어. 거기다가 내 손을 잡은 힘이…… 너무 약했어.”
“아무리 저라도 기절해 있는데, 힘이 셀 리 없잖아요.”
“알아. …… 지금은 알아.”
테오도르는 약간의 침묵 뒤에 손을 들어 제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면서 자신의 앞선 발언을 수정했다.
“하지만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사고할 수 없었어. 널 안고 미친 듯이 달려와서 의사를 찾았지. 일단 방에 눕히라는 리타 부인의 말이 아니었으면, 계속 의사를 찾으며 널 안고 달렸을지도 몰라.”
부끄러운 듯 뱉어내는 테오도르의 말에 그 상황이 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당황한 채 소리치는 테오도르. 우왕좌왕하는 하인들. 테오도르를 진정시키고 사태를 수습하려는 리타 부인.
그리고 그 소란 통에서도 꿈쩍도 하지 않은 나. 그런 나를 보며 더욱 당황하는 테오도르.
분명, 난리가 났을 것이고, 무척이나 소란스러웠을 것이다.
“……풋!”
그런데 난 왜 그 소란이, 테오도르의 당황이 사랑스럽게만 느껴지는 걸까? 이렇게 웃음이 나와버리는 걸까?
내가 생각해도 참 고약한 심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레나티스.”
“네?”
갑자기 이름이 불리자 나는 얼른 얼굴에서 웃음기를 걷어냈다. 자기가 당황한 것을 떠올리며 웃고 있었다는 걸 알면, 분명 테오도르의 자존심이 상할 테니까 말이다.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던 테오도르는 내가 웃었던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진지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미혼의 여성이 다른 남성에게 그런 몸을 보이는 것이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리라는 것은 알아.”
“네. 좀 그렇죠.”
나는 조금 전에 내가 웃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테오도르의 말에 곧장 맞장구를 쳤다.
“그러니, 책임지겠어.”
“……네?”
“널 책임지겠다고 했어, 레나티스.”
약 2초.
내가 테오도르의 말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다.
“대공비에게 네가 붙들려 갔다는 것을 알고 내가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 알아? 네가 그렇게 끌려가서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나는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서 기절이나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자 나 자신을 죽여버리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어.”
“어……. 그렇게까지 생각하실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게까지 생각할 일이야. 만약에, 널 구하지 못한다면, 난 그냥 죽어버리겠다고도 생각했어. 그래서 죽기보다 싫었던,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까지 한 거고.”
“그, 그렇게까지 극단적일 일인가요?”
“내겐 그렇게까지 극단적일 일이었어.”
테오도르의 말은 단호했고, 눈은 진심이었다. 진심을 담은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약간의 광기까지 담고 있었다.
“나에게 삶이란 복수였어.”
“복수…… 요?”
“내가 죽기를 바라는 자들을 위해서 사는 것. 절대로 죽지 않고 살아 남아주는 것. 그게 나에게 삶이라는 것이었어.”
“테오도르…….”
쓸쓸한 고백에 나는 이미 잡고 있던 테오도르의 손을 좀 더 힘주어 잡았다. 그러자 테오도르는 대답처럼 살짝 미소 지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네가 있어, 레나티스.”
테오도르는 잡은 내 손을 들어 올려, 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잠시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그 촉감이 이상하게도 따스했다.
“아침이면, 활기차게 움직이는 네가 보고 싶어 눈이 떠져. 네가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시간이 가기를 기다려. 마침내 네 미소를 보면, 즐거워져. 그리고 그다음 미소를 기다리고, 그 미소를 볼 내일을 기다리게 돼.”
테오도르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그 안에 담긴 일상은 소소했다.
하지만 그것의 숨겨진 의미는 너무나 컸다.
“네 덕분에 난 삶의 의미를 찾았어.”
다시 한번, 테오도르가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아까보다는 조금 더 긴 입맞춤이었다.
“난 너로 인해 살아있어.”
세상에 이보다 더한 고백이 있을까?
자신의 삶이 오롯이 나로 인한 것이라는 테오도르의 말에 나는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뭐라고…… 내가 당신에게 뭘 해준 것이 있다고…….
“레나티스.”
조용히 테오도르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여전히 내 손을 잡은 채, 내게 다가왔다.
테오도르의 그림자가 내게 드리워졌다. 하지만 그것은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그림자가 나를 포근히 안아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널 책임질 수 있게 해줘.”
손등에 닿았던 입술이 다정하게 부탁했다.
“내 인생을 너에게 줄 테니까.”
다정한 손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닿은 손끝에서도 애정이 물감처럼 묻어나와 나를 물들였다.
“부디, 나를 받아 줘.”
누가 감히 이렇게 다정한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까? 누가 감히 온전한 제 인생을 바치겠다는 달콤한 고백을 마다할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입술이 닿았다. 온기가 닿았다.
테오도르가 내게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