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96
나는 절뚝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환한 빛을 향해서. 테오도르를 향해서.
나와 눈이 마주치자 테오도르의 얼굴에 걱정과 놀람, 그리고 반가움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 역시 그런 테오도르를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찰나의 반가움을 뒤로 하고 나는 테오도르의 앞에 섰다. 그리고 다시 카르오 대공비를 바라보았다.
“지금 당신 얼굴을 봐.”
정면에 서자, 대공비의 얼굴이 더욱 똑똑히 보였다.
풀어낸 붕대 아래에는 화장하지 않아 얼룩덜룩했고, 눈에는 핏발이 가득했으며, 증오로 일그러진 얼굴은 추악했다.
“괴물은 바로 당신이야.”
내 말에 대공비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맹세컨대, 지금 그 얼굴이 그녀에게 더욱 어울렸다. 그녀의 추악한 본성과 똑같이 일그러진 얼굴이.
“난 당신 같은 괴물이 테오도르를 해치게 두지 않을 거야.”
문 따위, 몇 번이라도 부술 수 있었다.
상처 따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테오도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레나티스.”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내 손을 잡아 왔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게 테오도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남자는 그밖에 없었다. 내 손을 이렇게 부드럽게 잡는 사람도 테오도르밖에 없었다.
나는 테오도르의 목소리와 온기에 더욱 용기를 얻었다.
“네까짓 게 어쩌려고?”
우리 두 사람의 모습을 본 대공비는 한껏 비웃음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이 조금 복잡하게 되었지만, 결국은 내 시나리오대로 일은 일어나게 될 거야. 파르코.”
“네, 대공비 님.”
“저 계집애를 처리해.”
갑자기 나타난 테오도르 때문에 주춤했던 호위 기사는 대공비의 명령에 검을 고쳐잡았다. 그 모습에 테오도르는 내 손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레나티스를 해치려고 들면, 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보아하니 무장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몸을 던져 저 계집애를 구하기라도 하겠다는 거니?”
“못할 것 같습니까?”
“아니. 오히려 그러면 일이 수월하지. 대공비 시해범의 처형에 우연히 네가 휘말려서 죽은 거니까.”
“카르오의 후계자가 죽었는데, 일이 그렇게 수월하게 돌아갈 것 같습니까?”
“지하에서 일어난 일은 지하에서 묻어두는 거야. 너도, 저 계집애도 죽고 나면, 진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대공비에게는 모든 일이 그저 쉬운 듯했다. 어쩌면 당연했다. 그녀의 인생에서는 이제까지 아무런 걸림돌이 없었을 테니까.
테오도르를 제외한다면.
그래서 그녀는 지독하게도 테오도르라는 걸림돌을 없애고 싶었으리라.
“……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저를 꼭 죽이고 싶습니까?”
“그래.”
“제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그 목표를 버리시지 못하시겠죠?”
“당연하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대공비는 단숨에 대답했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마치, 판단할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빨리 도망쳐야 하지 않나?’
그런 테오도르의 행동에 나는 조금 조급함을 느꼈다.
대공비의 말대로 우리에게는 무기가 없었다. 내가 호위 기사를 다치게 하긴 했지만, 그는 왼손에는 여전히 날카로운 검이 들려 있었다.
테오도르와 내가 훨씬 불리했다.
다만 한가지 희망은 있었다. 아까의 나는 문이 닫혀 있어서 도망갈 수 없었지만, 지금은 문이 열려있었다.
아마도 테오도르가 광증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감옥을 지키고 있던 사람은 물린 모양이지만, 위로 도망친다면 누군가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당장 도망가는 게 훨씬 나았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 집 정원에서 기르고 있던 아름다운 꽃이 독초일 줄은 몰랐군.”
갑자기 위쪽에서 근엄한 목소리가 하나가 들려왔다.
‘뭐야? 신의 계시야?’
깜짝 놀란 내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지하 감옥의 횃불에 일렁이는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이쪽을 향해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대공…….”
대공비의 입에서 그림자의 정체가 흘러나왔다.
내가 들은 것은 하늘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아니라 지하 감옥과 지상을 연결하는 계단 위쪽에서 들려온 것이었고, 대공비의 말대로 카르오 대공의 목소리였다.
카르오 대공의 얼굴을 확인한 대공비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내가 그동안 당신을 과소평가했어. 테오도르에 대한 감정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행에 옮길만한 결단력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 과소평가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나는 다시 자신감을 되찾은 것 같은 대공비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테오도르에게 소리를 질렀던 것도, 카르오 대공을 보고 놀랐던 것도 다 지워내고, 도도한 목소리로 카르오 대공의 말을 맞받아치고 있었다.
“아니라는 건가?”
“네. 과소평가가 아니라, 당신은 절 아예 알지도 못하잖아요?”
대공비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명백한 카르오 대공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괜찮습니다. 섭섭하지 않아요. 나 역시 당신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요. 나는 당신이 카르오 대공이라는 것이 중요했고, 당신 역시 곁에 둘 어여쁜 대공비가 중요한 거였죠.
그러니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를 수밖에요.”
“확실히 당신은 날 잘 모르는 것 같군. 난 곁에 둘 어여쁜 대공비가 아니라, 곁에 놔두어도 괜찮을 똑똑한 대공비가 필요했어. 자기 위치를 똑바로 알고, 제 분수를 똑똑히 아는. 그런데…….”
카르오 대공은 대공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그래. 당신 말이 옳아. 내가 당신을 잘 몰랐던 모양이야. 이런 짓을 벌이는 멍청한 여자인지 알았다면 절대로 카르오 대공비 자리에 앉히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난 당신의 그 가당치 않은 욕심 때문에 섣부른 짓을 하지 못할 줄 알았거든.”
신랄했다.
차라리 검을 휘두르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할 만큼, 카르오 대공과 대공비는 서로 날선 비난을 퍼부었다.
“그래서, 후회하나요? 과거의 당신이 내린 판단을?”
대공비는 비웃음과 함께 물었다. 그래봤자 과거를 되돌릴 수 없다는 믿음이 짙게 깔려 있었다.
“후회? 그런 건 힘없는 작자들이나 하는 것이지. 나는 과거를 후회하지 않아. 그것보다는 현재를 바로잡아야지.”
카르오 대공이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세 명의 기사가 위쪽에서 우르르 내려왔다.
그들은 별다른 명령 없이도 검을 빼 들었고, 나와 테오도르의 앞을 막아섰다.
카르오 대공비를 향해서.
“무엄하다!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당연하겠지만, 카르오 대공비는 참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검을 겨눈 기사들을 향해서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그들의 검 끝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카르오 대공비를 향해 있었다.
“당신 말대로, 지하에서 일어난 일은 지하에 묻히기 마련이야. 그리고 증언은 살아남은 자들이나 지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지.”
여전히 계단 위에서 마치 신이 지상을 내려다보듯, 이 모든 상황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카르오 대공이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 말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오르내리기 딱 좋은 싸구려 연애 소설 같은 이야기지. 짝사랑하는 상대방의 거절을 이기지 못하고, 상대를 죽이고, 자신도 자결하는 스토리지.”
“대공!”
카르오 대공의 말을 들은 대공비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야 내가 알아들었으니, 그녀 역시 카르오 대공이 하는 말을 분명하게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가 말한 스토리가 자신과 자신의 호위 기사를 일컬음을.
“걱정하지 마. 생전 카르오 대공비였던 당신의 명예를 위해서 꼴사납게 매달린 쪽이 아니라 살해당하는 쪽으로 해주지.”
퍽이나 다정한 배려였다. 그리고 카르오 대공비의 새하얗게 질린 안색이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그걸 믿을 것 같습니까?”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카르오 대공은 피식 웃었다.
“내가 말했는데.”
그 말을 들은 대공비가 비틀거렸다. 그녀 역시 깨달은 것이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레나티스.”
조용히 테오도르가 내 귓가에 대고 나를 불렀다. 고개를 들자, 그가 나가자는 듯이 고개를 살짝 트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알겠다는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이다음에 일어날 일의 목격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다만…….’
나는 테오도르의 손을 꼭 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자신의 어머니인데 그녀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 테오도르에게 괜찮을지 걱정이었다.
“…….”
테오도르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한번 힘주어 잡았다.
“아……!”
테오도르가 고개를 숙인다 싶더니 그대로 나를 안아 들었다.
그가 그러리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당황스러웠다. 아니, 테오도르가 그럴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생각보다 힘이 좋은데?’
이제껏 병약 미소년의 이미지로 생각했었던 테오도르는 의외로 건장했다.
내가 지금 어깨를 기대고 있는 단단한 가슴이 그랬고, 나를 번쩍 들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팔과 다리가 그랬다.
보통이라면 괜찮다며, 내려서 걷겠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친 다리도 아프고, 몇 번이나 긴장되는 상황을 겪었더니 너무 피곤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테오도르에게 내 몸을 맡기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내게 빚을 졌다는 걸을 잊지 말아라.”
카르오 대공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가 조용히 말했다.
“…….”
테오도르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계단을 올랐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