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95
“멈춰라!”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기적의 순간이기도 했다.
바싹 뒤로 당긴 내 뒤통수는 감옥의 벽에 닿아 있었고, 검의 끝은 내 목에 거의 닿아 있었다.
아주 조금만 움직인다면, 날카로운 검이 내 목을 단숨에 긋거나, 목을 꿰뚫을 수도 있을 곳에서 귀신같이 멈춰있었다.
“레나티스!”
놀라서 숨도 쉬지 못하는 나를 누군가 불렀다.
아니다. 누군가가 아니었다.
“테오도르!”
내가 마지막 순간에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내가 마지막에 소리쳤던 이름의 주인이 저곳에 서 있었다.
어두운 감옥에 바깥의 빛이 환히 쏟아지게 만들고, 나를 위협하던 검을 멈추게 만들고, 죽음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기 일보 직전인 나를 구해냈다.
바로 테오도르가!
“당장 그 검을 치워라.”
조금 전에는 갑작스러운 테오도르의 명령에 저도 모르게 검을 멈추긴 했지만, 자신이 명령에 복종할 사람은 대공비라는 듯이 호위 기사는 쉽게 검을 거두지는 않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힐끗, 대공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공비는 그 시선을 알면서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검을 내리라고 명령하지도 않았다.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여기까지 찾아온 테오도르가 불청객이라는 듯이 그에게 타박을 놓았을 뿐이었다.
“제가 상관하지 않으면, 누가 상관해야 할 일입니까? 저 아이가 제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면서요.”
“저 아이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는 모양입니다.”
“제가 그걸 알아야 합니까?”
“당연하지. 저 애는 나를 죽이려고 들었어. 귀족을 살해하려 한 평민은 그 자리에서 즉결 처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을 너도 알지 않니? 아무리 별채에 처박혀 있는 후계자라도 그 정도 교육은 받았을 테니 말이야?”
대공비는 이제 테오도르를 향한 조소를 숨기지 않았다.
이 지하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이 나와 테오도르, 그리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호위 기사밖에 없다는 생각에 더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대공비의 가면을 쓸 생각이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네. 물론 압니다. 그리고 그건 누명이라는 것도 알지요.”
“누명? 이 상처를 보렴. 이렇게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 누명이라고?”
대공비는 자신의 뺨에 있던 붕대를 거의 잡아 뜯으며 말했다. 그러자 얼굴에 난 붉은 상처가 보였다.
그래. 확실히 상처가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건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그저 긁힌 정도의 상처였다. 일주일쯤, 아주 늦어도 보름이면 새살이 돋아날 상처였다.
내 허벅지의 상처에 비하면 대수롭지도 않은 상처였고, 테오도르가 자신의 이와 손톱으로 스스로 낸 상처에 비하더라도 미미했다.
하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의 상처가 아주 어마어마한 것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고작 그 정도 상처가 살해 시도의 증거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원을 산책하다가 나뭇가지에 긁혀도 그것보다는 상처가 크게 날 것 같은데요.”
“감히 날 다치게 한 나뭇가지라면, 그 뿌리를 뽑아 말려 죽여야지.”
단호한 대공비의 말투에서 그녀의 인생관이 엿보였다. 자신을 가로막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없애고야 말겠다는.
“게다가, 넌 당시의 상황도 알지 못하잖니? 그 자리에 있긴 했지만, 넌 제정신이 아니었어.”
“…….”
“아니면, 기억난다고 말하겠니? 그 상황을 다 봤다고, 저 아이가 날 죽이려고 든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니?”
대공비의 말에 테오도르의 입술이 꾹 닫혔다. 테오도르는 대체로 광증 상태일 때의 기억이 없었다.
처음에 자신이 날 문 상처를 보고 놀라는 듯했고, 광증 상태에서 한 키스를 온전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방금 대공비의 말대로 그 자리에 있었지만, 테오도르는 내가 대공비를 해치려 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대공비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있었으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죠.”
테오도르가 선선히 수긍하자 대공비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충분히 알만합니다.”
“뭐?”
“역설적으로 제가 그 당시에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헛소리지?”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제가, 지금은 이렇게 당신을 똑바로 마주하고 서서 아주 멀쩡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대공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저를 이렇게 정상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자명하죠.”
테오도르는 직접 이름을 언급하는 대신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만 해도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다 알아들었다.
내가 테오도르를 치료했기 때문에 그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뜻이었다.
“급박한 상황이었을 겁니다. 제가 증상을 보인 것은 점심 무렵이었고, 제 마지막 기억에는 창밖에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으니, 제 상태는 제법 심각했을 겁니다.
거기다가 2층을 지키고 있었던 오르디의 말에 따르면, 대공비께서 기별도 없이 별채에 방문하셔서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공비께서 레나티스의 방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곧 대공비께서 뛰쳐나왔고요.”
이제까지 자신의 이야기가 틀렸냐는 듯이 대공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저 입술만 깨물며 테오도르를 노려보고 있었다.
“매우 다급했을 레나티스가, 그 짧은 시간안에, 갑자기 나타난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는 대공비 시해를 시도하고, 실패하고, 문을 부수고, 제 침실로 넘어와 저를 치료하기까지 했으리라고는 짐작기 어렵군요.”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니?”
“네.”
테오도르는 단번에 대공비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오히려 그게 당연하지 않냐는 듯한 표정이기까지 했다.
“문이 부서져 있었습니다. 레나티스의 방과 제 침실을 연결하는 문이 2개나 요.”
“저 아이가 부순 거야.”
“네. 압니다. 보통의 힘으로는 그 두꺼운 문을 부술 수 없을 테니까요.”
테오도르의 말에 대공비의 얼굴에 살짝 의아함이 깃들었다. 왜 보통의 힘으로 부술 수 없는 문을 내가 부쉈다고 생각하는 건지 의아해하는 듯했다.
아마 그녀는 아직 내가 힘이 세다는 것을 모를 테니까.
“제 침실의 문은 잠겨 있었으니, 부순 것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본인 방문을 부순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복도로 나가서 제 침실의 문만 부수면 되는 것을, 굳이 힘들게 문을 2개나 부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죠.”
테오도르는 내가 생각했던 바를 그대로 이야기했다.
원래 나는 복도에 나가서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오르디에게 정중하게 옆으로 비키라고 부탁하고 나서 잠긴 문을 부술 예정이었다.
대공비가 문 앞을 가로막고, 나를 잡아가려고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누군가 레나티스를 방 밖으로 나가지 못 하게 했다면 모를까.”
테오도르는 마치 상황을 본 것처럼 말하며 대공비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 누군가가 나라는 거니?”
모든 정황이 드러났음에도 대공비는 당당했다.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턱을 꼿꼿이 들고 테오도르에게 되물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 뻔뻔함에 기가 눌렸다.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대공비의 뻔뻔함에 익숙한 듯, 전혀 기가 눌리지 않았다. 그 역시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되받아쳤다.
“당신이 저를 치료하려는 레나티스를 가로막았고, 레나티스는 저를 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문을 부쉈겠죠. 당신 얼굴의 상처는 그 과정에서 발생 된 지극히 부수적인 일일 뿐이고요.”
“다 네 짐작일 뿐이고, 네 상상일 뿐이야.”
“네. 맞습니다. 거기에 제 상상력을 더 보태볼까요?”
대공비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저 테오도르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레나티스가 문을 부숴서까지 저를 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신과 나. 둘 다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알고 있었습니다. 똑같은 일이 과거에 일어났었으니까요.”
테오도르가 말하는 과거의 일이란 바로 테오도르 형인 에멘스의 일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광증을 통제하지 못하고 카르오 대공의 손에 죽임을 당한.
“당신이 바랐던 일이 바로 그거였겠죠.”
씁쓸한 미소가 테오도르의 입가에 걸렸다.
“묻고 싶습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지만, 한 번도 당신에게 직접 물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서요.”
“…….”
“그렇게 저를 죽이고 싶습니까?”
“…….”
“제가 당신께 무슨 잘못을 그렇게 했기에, 어릴 때부터 그렇게 지독하게 저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 하는 겁니까? 나는, 당신의 아들인데요.”
이십여 년을 테오도르의 뱃속에서 웅크리고 있었을 질문이 마침내 세상에 드러났다.
“…….”
질문을 받은 대공비는 대답 대신 그저 테오도르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증오를 가득 담은 눈빛으로.
“말해 보십시오!”
“네가 내 아들이니까!”
침묵을 참지 못한 테오도르가 소리를 지르자, 감히 네까짓 것이 내게 소리를 지르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대공비가 소리를 지르며 맞받아쳤다.
“네까짓 괴물이 감히 내 아들이라고 태어났으니까! 내가 어떻게 얻은 자리인데! 콧대 높은 델마가 결국에는 후처로 결혼한다는 비웃음도 참아냈어. 전 대공비와 비교하는 시선도 이겨내고, 내 키만큼이나 큰 전처 아들도 웃으면서 받아들였어. 카르오 대공비 자리를 위해서!”
아니, 그건 그냥 소리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 또한 20년 동안 뱃속에서 묵혀있던 감정을 토해내는 소리였다.
“그런데 내가 낳은 카르오의 후계자가 괴물이었어! 내 인고의 결과물이 그런 것이라니! 내가 그따위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그 결과물을 없애려고 했다는 겁니까?”
“그래! 내 인생에서 너라는 오점을 지우려고 했어! 너는, 너는! 괴물이야! 너 같은 괴물은 죽어야 해! 살아 있어선 안 돼!”
발악이었다.
두 눈에 핏발이 선, 붉은 눈의 괴물이 발악하고 있었다.
예쁜 드레스를 입고, 예쁘게 화장했지만, 추악하기 그지없는 괴물이 정체를 드러냈다.
“괴물은 당신이야!”
그래서 소리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