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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94화 (94/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94

“이,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요?”

그녀는 무사할 것이다. 카르오 대공비라는 단단한 방패가 그녀를 막아주리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당신이야말로 하늘이 무섭지도 않아요?”

아마 하늘을 무서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애초에 무서웠다면 살인을 꾸미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주할 거야! 죽어서도 당신을 저주할 거야!”

그리고 이건 내 진심이었다.

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소리치며 슬금슬금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그런 내 속도보다 대공비의 호위 기사가 다가오는 속도가 더 빨라서 우리 사이의 간격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무릎걸음으로 재빨리 기는 것이 더 빠를지를 가늠하는 사이였다.

“!!”

내 뒤로 무언가가 턱, 닿았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단단한 지하 감옥의 돌벽이 내 뒤를 가로막고 있었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다급히 다시 고개를 돌리자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호위 기사가 보였다.

차라리 어떤 표정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적어도 그에게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그저 기계적으로 시키는 일을 한다는 듯이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아마도 그에게 나는 패야 하는 장작이나, 뽑아야 하는 잡초 정도로 보일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잡초를 뽑아내기 위해서 검을 휘둘렀다.

“읏!”

마지막까지 과녁을 주시할 것.

인스트의 말이 도움이 되었다. 검을 피하라고 알려준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호위 기사의 검을 보고 있다가, 거의 마지막 순간에 재빨리 몸을 옆으로 틀었다.

“카캉!”

검은 감옥 벽을 갈면서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그사이에 걸려 순간 찔끔 아팠지만, 머리가 잘리는 것보다는 훨씬 덜 아플 터였다.

“…….”

검을 고쳐잡으며, 호위 기사는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는 살짝 그의 눈에 감정이 깃든 것 같기도 했다. ‘짜증’이나 ‘귀찮음’ 같은 것이 말이다.

‘이쪽은 목숨이 달린 일인데, 당연하잖아!’

나는 속으로 성질을 내며 슬금슬금 몸을 옆으로 옮겼다. 뒤가 막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른쪽?’

조금 전에 남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아마도 오른손잡이인 그에게는 그쪽이 편하고 자연스러운 방향일 터였다.

‘왼쪽?’

하지만 조금 전에 내가 그 공격을 피해버렸으니, 다르게 공격하려고 할 수도 있었다.

이번에도 끝까지 보는 수밖에 없었다.

“…….”

“…….”

남자는 나를, 나는 남자를 서로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눈을 피하지 않는 나를 보며 남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영 체면이 말이 아닌가 봐요?”

툭 던진 말에 남자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내가 그가 생각하고 있던 것을 딱 건드린 모양이었다.

“겨우 조그만 여자애를 상대로 이렇게 시간을 끌고 있잖아요. 기사라는 것도 별것 아니네요.”

나의 도발에 검을 쥔 그의 손에 힘이 꾹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어느 쪽이지?’

내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남자는 나를 향해서 검을 찔러왔다.

‘나쁜 놈! 정면은 반칙이잖아!’

오른쪽도, 왼쪽도 아니라 내 심장에 제 검을 집어넣겠다는 듯이 찔러오는 남자의 행동에 나는 기겁했다.

내가 몸을 오른쪽으로 살짝 틀려고 하자, 그의 검 끝이 미세하게 오른쪽으로 바뀌는 것이 보였다.

‘아니거든!’

오른쪽은 페이크였다. 나는 오른쪽으로 몸을 트는 척하면서, 재빨리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거의 접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까강!”

또다시 검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는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단단한 것에 검을 부딪친 탓에 손과 손목에 전해져오는 진동으로 잠시 멈칫하고 있을 것이 눈에 선했다.

그러라고 일부러 도발한 것이었다. 그가 감정을 담아서 더욱 세게 검을 휘두르도록 말이다.

“으읏!”

내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손을 뻗어 허벅지에 박혀 있던 나무 파편을 뽑아냈기 때문이었다.

거친 나무 파편의 가시가 손에 박히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그것을 더욱 세게 거머쥐었다.

마치 단도처럼 그것을 쥐고 허리를 펴자, 내 예상대로 살짝 손을 떨고 있는 호위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눈이 살짝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바로, 지금이었다.

일부러 내게 무기가 없다고 말해서 내가 비무장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몸이 불편한 척하며 일어서지도 않고 있었던 것은 바로 지금을 위해서였다.

“하아압!”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내 허벅지에 박힐 만큼 날카로운 나무의 파편을 그대로 휘둘렀다.

“으윽!”

호위 기사는 비틀대며 뒤로 물러섰다.

카캉!

그리고 그가 쥐고 있던 검이 감옥의 바닥을 나뒹굴었다.

방금 호위 기사가 검을 쥐었던 팔의 위, 그의 어깨에는 조금 전까지 내 허벅지에 박혀 있었던 나무 파편이 박혀 있었다.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내 방의 문이었던 나무가.

“하아…… 하아…….”

그리 크게 움직인 것도 아닌데, 내 입에서는 거친 숨결이 흘러나왔다. 긴장한 탓에 잔뜩 숨을 참고 있어서인지, 극한의 상황에 몰리자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조절할 수 없는 호흡을 내뱉으면서 비틀거렸다. 상처를 막고 있던 것이 없어지자, 허벅지에서 피가 울컥울컥 솟는 것이 느껴졌다.

붉은 피가 촉촉하게 옷을 적시는 것 역시 확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힘없이 쓰려져 있을 수 없었다.

‘살아남을 거야.’

이곳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나갈 거야.’

나가서 할 일이 있었다.

‘테오도르를 만나고 싶어!’

나의 온전한 바람은 그것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건방진 것!”

비틀대며 물러나는 호위 기사를 보며, 대공비의 입에서 바득거리며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나를 향한 욕설이 내뱉어졌다.

“파르코! 뭐 하는 거야!”

대공비의 호명에 호위 기사는 고개를 들고 나를 노려보았다. 드디어 그의 눈에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나를 잡초나, 장작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칫!”

그는 이를 악물더니, 바닥에 떨어뜨렸던 검을 집어 들려고 했다.

하지만 원래 검을 잡았던 오른쪽으로 집으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곤 이를 부드득 갈더니 손을 바꿔 왼손으로 검을 집었다.

아무래도 내가 그의 오른쪽 어깨를 다치게 만들어서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듯했다. 물론, 내가 노린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인제 어쩌지?’

상황은 나아진 것일 수도, 나아지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호위 기사가 왼손은 검을 잘 쓰지 못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다리도…….’

좁은 감옥 안에서 절뚝거리는 다리로 얼마나 도망 다닐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는 수밖에 없지.’

약해지려는 의지를 다잡으며, 나는 주먹을 꼭 쥐었다. 이제 무기로 쓸만한 것은 없었다. 남은 것은 내 두 주먹뿐이었다.

“망할 년.”

드디어, 저 말 없는 호위 기사의 목소리까지 들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왼손으로 검을 든 채,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검을 휘둘렀다.

‘온다!’

나는 끝까지 검을 보며 몸을 뒤로 물렸다.

“읏!”

다리에 힘을 주자 이미 다친 상처에서 아찔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아파할 틈도 없이, 날아오는 검에 다시 허리를 숙이며 옆으로 물러났다.

주로 쓰는 손이 아니라서 그런지 호위 기사의 검은 처음과 같은 날카로움은 없었지만, 대신 그는 쉬지 않고 마구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단단한 감옥 벽에 어깨가 부딪히고, 내 발에 내가 걸려 넘어질 뻔하고, 허벅지에서 퍼져나가는 고통을 참아가며, 나는 겨우겨우 그의 검을 피했다.

“으읏!”

또다시 벽에 한쪽 어깨가 부딪혔을 때, 내 입에서 어쩔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오자 그가 히죽 웃었다.

그건 그냥 나를 조롱하는 웃음이 아니었다. 내 고통에 즐거워하는 웃음도 아니었다. 일이 제 뜻대로 굴러가자 만족스러워 짓는 웃음이었다.

‘당했다!’

나는 감옥의 모서리에 몰려 있었다. 마구 휘두른 듯했던 그의 검은 마치 사냥감을 몰 듯이 나를 구석으로 몰아넣기 위해서였다.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그리고 뒤로도 도망갈 수 없었다. 아무리 끝까지 검을 본다고 해도, 피할 곳이 없다면 소용이 없었다.

‘어쩌지?’

낭패감에 내가 입술을 깨물자, 호위 기사가 천천히 검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검 끝은 내 목을 향했다.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내겠다는 듯이, 그의 눈빛에서 단호함이 흘러넘쳤다.

‘끝이야!’

나를 향해 날아오는 검을 보며, 아무리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해서 시간을 끌었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았지만, 더는 방법이 없었다.

이제 마지막이었다.

“테오도르!”‘

나는 마지막으로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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