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93
지하 감옥의 바닥은 여전히 차디찼다.
“있잖아, 스기엔.”
왜 방의 문은 부서져 있고, 다리는 왜 다쳤으며, 왜 이런 음침한 데서 널브러져 있냐며 잔소리해대는 스기엔의 목소리 틈 사이를 재빨리 비집고 들어갔다.
“싫어.”
“아직 용건도 꺼내지 않았는데?”
“응. 그래. 싫어.”
스기엔은 딱 잘라서 거절했다. 하지만 어차피 스기엔이 일단은 거절하리라는 것을 난 이미 알고 있었다.
좋아, 필살기다!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도록 턱을 거의 목에 붙이고, 눈을 위로 치켜떠서 스기엔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스기엔이 살짝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지 말고, 내 부탁 좀 들어주면 안 돼?”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애교를 섞어서 몸을 약간 흔들며 말했다.
“…….”
토, 통했나? 스기엔은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세상에! 대체 어디를 얼마나 다치면, 언어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거지?”
뭐?
“미개한 인간들의 유일한 능력 중의 하나가 바로 종족 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걸 텐데, 이제 넌 그 능력마저 상실해버린 거야?”
“아, 아니야!”
나는 스기엔에 의해서 순식간에 유일한 능력을 잃어버린 인간이 되었고, 당연히 부정했다.
“하지만 방금 말한 그, ‘들어주명 앙댕?’이라는 건 분명히 뇌의 어딘가가 손상당한 것이 분명해! 아니면 언어기관 자체가 다쳤던가!”
아니! 내가 언제 그렇게 심하게 했어? 그냥 가볍게, 조금 애교를 섞어서, 혀 짧은 목소리로 부탁을 한 것뿐이잖아!
“말해봐! 어느 쪽이야?”
아니, 꼭 선택을 해야 하는 거야? 애교 좀 부렸다가, 뇌나 혀를 다친 사람 취급을 받아야 하냐고!
나는 억울했고, 해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기엔은 내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기 전에는 절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단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문을 부술 때, 아마도 혀를 좀 깨물었나 봐.”
결국, 나는 내가 혀를 다쳤다고 말하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래? 빨리 나아야 할 텐데. 그래야 내가 그런 해괴망측하고 괴상한 발음을 계속 듣지 않아도 될 테니까 말이야.”
“…….”
해명하고 싶었지만, 해명할 수 없었다. 다만, 다시는 그런 말투를 시도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어쨌든, 내 부탁 좀 들어 줘.”
“뭔데? 가서 빵 좀 훔쳐올까?”
“내가 그렇게 먹을 거에 집착하는 애 인줄 알아?”
“응.”
스기엔은 전혀 고민하지 않고 단숨에 대답했다.
같은 방에서 몇 개월째 살아서일까? 스기엔은 나를 너무 잘 알았다.
“그냥 테오도르의 방에 가서 아직 잘 있는지 봐줘.”
“또?”
“또라니?”
“전에도 걔보고 오라고 했잖아.”
“내가 그랬었어?”
“그래. 검정 머리에 고귀한 눈 색깔에 잘생긴 얼굴에 미끈한 몸을 가진 애를 보고 오라고 한 적 있잖아.”
스기엔의 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묘사는 분명히 테오도르가 맞았다.
스기엔이 말하는 과거가 언제인지는 분명히 기억나지 않지만, 과거의 나도 꽤 정확한 눈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테오도르가 취향을 뛰어넘는 미남이던가.
“어쨌든, 한 번만 보고 와줘!”
“아, 싫어.”
“왜?”
“귀찮아.”
스기엔은 진짜 귀찮아 죽겠다는 듯이, 벌러덩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
이를 어쩐다?
나는 여기서 나갈 수 없고, 테오도르는 잘 있는지 걱정되고, 자유로운 슬라임은 이렇게 뻗대고 있으니 곤란했다.
“그러고보니 스기엔. 우리 처음 만난 곳도 여기 아니야? 우리 별채의 지하 감옥에서 처음 만났잖아. 옛날 생각 난다, 그지?”
추억팔이는 실패였다. 스기엔은 미동도 없었다.
하긴, 추억이라고 하기엔 불과 몇 개월 전이니 그렇게 애틋할 정도는 아니겠다.
그럼 다른 방법을!
“스기엔…… 나 아픈데…….”
나는 슬며시 허벅지를 스기엔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더는 피가 나지 않았지만, 옷에는 말라붙은 피가 묻어 있었다.
이런 상처는 함부로 손대지 않는 좋다고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아서 제법 굵은 나무 파편이 여전히 내 허벅지에 박힌 채였다.
즉, 보기에 꽤 심각해 보일 수 있는 상처였다.
“아야야야~.”
슬쩍 스기엔이 내 쪽을 보는 것이 느껴지자, 나는 효과음까지 더해주었다.
“으이구~!”
벌러덩 드러누워 있던 스기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이렇게 손 많이 가는 인간을 왜 친구로 둔 건지!”
툴툴거리는 모양새가 내 부탁을 들어줄 모양새였다. 만세!
“이런 칙칙한대서, 다리는 어디서 구멍이나 뚫린 채면, 남 걱정이 아니라 네 걱정이나 해야 하는 것 아니야?”
“뭐, 내 걱정은 스기엔이 해주잖아?”
“내가 무슨 네 걱정을 한다고 그래!”
스기엔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면서 부정했다.
“내 걱정이 되니까 여기까지 찾으러 와주고, 아프다고 하니까 뭐라고 하고, 내 부탁도 들어주고 그런 것 아니야?”
“아니야!”
“아니면, 뭔데?”
“이건…… 이건…… 이건!”
스기엔은 내 말에 맞받아치고 싶지만, 딱히 받아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
결국, 스기엔은 입을 꾹 다물고 홱 뒤돌아 버리는 것으로 대화를 종료했다.
“앗! 스기엔! 올 때 주방에서 빵도 좀 훔쳐 와줘!”
통통거리며 벽 쪽으로 다가가는 스기엔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소리쳤다. 스기엔은 대답도 없이 천천히 벽에 스며드는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저렇게 드나드는 거면 빵은 가져오기 무리려나?
“모르겠다…….”
나는 오도카니 앉아서 스기엔을 기다렸다. 그리고 스기엔이 가져다줄 테오도르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리고 기왕이면 빵도.
* * *
지하 감옥 문이 열렸다.
갑자기 쏟아진 빛에 나는 눈을 뜨지 못하고 찡그렸다. 그리고 잠시 후에 역광으로 보이는 실루엣에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내가 원했던 키 크고, 넓은 가슴에, 실루엣마저도 잘생긴 형상이 아니었다.
“역시 출신이 그래서 그런가, 이런 곳에도 잘 자는군.”
드레스를 입은 고약한 실루엣이 말했다. 분명 몇 개월간 보지도 못했던 사람인데, 이제는 목소리만으로 누군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대공비 님…….”
그리고 그 목소리가 전혀 반갑지 않았다.
“닫아.”
대공비가 목을 까딱이며 명령하자, 그녀의 옆을 지키고 있던 호위기사가 두꺼운 지하 감옥의 나무 문을 닫았다.
다시 안은 깜깜해졌다. 아까와 다른 점은 이 어두운 감옥 안에 사람이 세 사람이나 서 있다는 것이었다.
대공비는 이곳에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존재는 이질적이었고, 불길했다.
“왜?”
나의 불길함을 눈치챈 것인지 대공비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무서운 모양이야?”
“…….”
“이제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달았어? 위에서는 그렇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더니, 지하에 처박히고 나서야 제정신이 드는 멍청한 년 같으니라고.”
또각, 또각, 또각.
감옥에 어울리지 않는 구두 소리가 나를 향해서 다가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그저 고개만 들어서 내게 다가오는 대공비를 바라보았다.
앉아 있는 지금은 괜찮았지만, 일어나면 분명 아플 것 같았다.
“처음부터 말을 잘 들었으면, 목숨만은 건졌을 텐데 네 멍청함이 네 목을 조르고 말았구나.”
나를 내려다보며 대공비는 그렇게 말했다. 바꿔말하자면, 지금은 날 죽이겠다는 말이었다.
“절 죽이겠다는 건가요?”
“어머! 이제야 말길이 좀 트인 모양이야?”
“치료제인 절 죽이면, 테오도르가 위험해져요.”
“하지만 여전히 멍청하고.”
나도 알고 있었다. 방금 내 말이 멍청했다는 걸.
그녀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테오도르가 위험해지는 것.
그래서 대공비는 나를 이곳에 가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죄명을 씌워서 말이다.
한가지 다행이라면, 테오도르의 광증이 가라앉은 직후이니 당분간은 괜찮으리라는 것이었다.
“내 계획은 이렇단다. 자비로운 나는 날 시해하려 한 너를 용서하고, 손수 여기까지 내려와서 사정을 물으려고 했어. 하지만 악독하기 그지없는 너는 반항했고, 다시 날 죽이려고 들었어.”
상냥한 미소 띤 얼굴로 대공비는 내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 상황에서 남을 가르치려고 드는 꼴이 아주 재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 호위가 널 죽인 거지. 아주 완벽한 시나리오이지 않니?”
“아뇨. 허술하기 짝이 없는데요.”
“뭐?”
“갑자기 감옥으로 끌려온 제가 무기도 없이 무슨 수로 대공비 님을 시해하죠? 맨손으로 그게 가능한가요? 그리고 시해 후에는요? 전 어떻게 여기서 빠져나가죠? 탈출 계획도 없이 일단 다짜고짜 살인하는 멍청한 사람이 어딨죠?”
“…….”
대공비는 내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그녀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당연했다. 악녀들이 항상 여주들을 죽이려다가 실패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온실 속에서 화초처럼 자란 그녀들은 자신의 계획이 완벽하다고 믿었다. 주변의 모두가 어여쁜 귀족 영애의 말이 옳다고 해주었을 테니까.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는 발상이었고, 어딘지 모르게 허술한 계획이었다.
그러니 항상 꼬리를 잡히고, 남주에게 들켜서, 파멸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네 말도 그럴듯하지만, 그건 중요한 건 아니지.”
잠시 생각에 빠졌던 대공비는 빙긋이 웃으면서 날 바라보았다.
“내가 그렇다고 하는데, 감히 딴지를 걸 사람은 없을 거야. 설사 건다고 해도 이미 넌 죽었는데 뭘 어떻게 하겠어?”
그런 것 따위는 정말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공비는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그 제스처도 정말 재수 없었다.
“정 안 되면, 그냥 네가 괘씸해서 내가 죽인 것으로 하면 되겠지. 대공비 시해 미수범인데 내가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
내가 한가지 잊은 것이 있었다.
권력이란 막강한 것이었다. 설사 이야기가 좀 허술하다 해도 죽은 하녀 따위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을 만큼.
“파르코.”
대공비는 우아하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 자리를 대신이라도 하듯, 이제까지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그녀의 호위 기사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자기 주인을 닮아 아주 재수 없게 우아한 자태로 허리춤에 있는 검집에서 검을 뽑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