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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90화 (90/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90

테오도르가 외출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잘된건지 아닌건지 미묘하게 생각하는 나를 발견했다.

당장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는 안도했지만, 이렇게 계속 테오도르를 피해야 한다면 여기서 생활하기에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 시중에서 잘리는 건 아니겠지?’

그럴 수도 있었다. 나는 클레어와 함께 채소를 다듬고 설거지를 하게 되거나, 방마다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아니면, 시골 출신이니까 저기 텃밭 담당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방도 옮겨야 할 수도 있었다. 내가 곁에 있는 것을 테오도르가 원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테오도르가 내게 차 시중을 드는데 재능이 있다고 했는데…….’

그냥 빈말일 수도 있었다. 내게 궁술을 가르치고 싶다는 인스트에게 테오도르는 어깃장을 놓고 싶어 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빈말이든 아니든 나는 테오도르의 차 시중을 드는 것이 좋았다.

리타 부인에게 차의 성질이나 효능, 우리는 방법을 배우는 것도 좋았고, 그날 날씨나 테오도르의 컨디션에 따라서 차를 고르는 것도 재밌었다.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내가 우린 차를 테오도르가 음미하고, 마시고, 꽤 괜찮다는 듯이 슬쩍 눈썹을 들어 올리는 그 순간을 좋아했다.

가끔 마주 보고 앉아서 함께 다과를 먹거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

갑자기 우울해졌다. 이제는 그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를 미워해.”

내가 어떻게 테오도르를 미워할 수 있을까?

자신을 미워하라고 말하면서, 제발 자신을 버리지 말라는 듯이 슬픈 눈을 하는데…….

그의 진심은 당연히 눈 쪽이라고 생각했다. 자고로 입은 거짓말을 하지만 몸은 솔직하다는 19금 명언도 있지 않은가?

“정말 곤란하네.”

나는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아무리 한숨을 내쉬어도 고민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답답함도 가시지 않았다.

누굴 붙들고 말을 좀 하면 나을까 싶었지만, 오늘따라 스기엔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스기엔만큼 좋은 대화상대가 없었다. 적어도 누군가에 말할 걱정이 없으니까 말이다.

뭐, 슬라임의 세계에서 내 소문이 날 수도 있겠지만, 마주할 일이 없으니 상관없지 않을까?

“문이라도 열까?”

바깥 공기라도 좀 쐴까 싶어서 창문을 열고, 그곳에 걸터앉았다.

아스텔라 언니가 봤으면 위험하니 당장 내려오라고 기함을 했을 위치선정이었지만, 살랑살랑 바람도 느껴지고 적당히 높아서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것이 경치도 좋았다.

기분이 나아질락 말락 하던 순간이었다.

“응?”

저 멀리서 별채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는 마차가 보였다.

“뭐야? 저 말 미친 거 아니야?”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마차를 쳐다보았다. 혹시나 말이 거품을 물고 있다거나, 눈이 맛이 갔다거나 하는 것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아직 너무 멀어서인지, 좋은 내 시력에도 말의 상태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들이 제정신이라는 것은 다른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마차를 몰고 있는 마부가 거의 자리에서 일어난 채, 미친 듯이 말을 몰고 있었다.

지금의 이 빠른 속도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는 연신 말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 마차가 미친 듯이 달리는 것은, 말이 날뛰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마부의 의지였다.

“저건…… 테오도르의 마차인데?”

몇 번 타 본 적이 있는 마차인지라 단번에 마차를 알아보았다.

“테오도르가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모양…… 치고는 이상하잖아! 아무리 급해도 저건 심해!”

나는 얼른 창틀에서 방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단숨에 문을 열고 현관을 향해서 달려 나갔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 테오도르 님이 외출을 처음 하신 것도 아니고, 돌아오시는 게 처음도 아닌데 왜들 이렇게 소란들이야?”

현관에 도착하자 리타 아주머니가 모여드는 고용인들을 쫓아 보내는 것이 보였다.

저런 미친 속도의 마차를 봤다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모여드는 것이 당연했다.

“리타 아주머니?”

나는 조용히 리타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나만은 그녀도 내쫓지 않았다. 그저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이었다.

“나도 아직 연락받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테오도르 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구나.”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속도의 마차를 보며, 리타 아주머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근처에 있던 고용인들을 다물린 다음에 손수 문을 열었다.

“워! 워~ 워!”

마침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온 마차가 현관 앞에 당도해있었다. 마부는 앞다리까지 들며 흥분한 말들을 진정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차의 문을 여는 것이 옳은지, 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니 지켜보는 것이 나을지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마차의 문이 열렸다.

“오르디?”

먼저 보인 얼굴은 오르디였다. 리타 아주머니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오르디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가 담요를 뒤집어쓴 사람을 이끌고 나왔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테오도르가 틀림없었다.

“일단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래요.”

오르디와 리타 아주머니가 말을 주고받는 동안, 나는 테오도르의 상태를 파악하려 애썼다.

‘손이?’

테오도르의 눈이 보이지 않자, 나는 재빨리 그의 손을 쳐다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정상으로 보였다.

언제나처럼 손가락이 길게 뻗은, 크지만 고운 손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단정하게 손질된 손톱이 있었다.

‘떨고…… 있어…….’

하지만 그 크고 단정한 손은 흡사 무슨 중독자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내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내 꽉 주먹을 움켜쥐긴 했지만, 그래도 떨림을 멈출 수는 없었다.

“테오도르 님, 괜찮으세요?”

나는 테오도르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

테오도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당연히 괜찮을 리 없었다.

손이 저렇게 떨리고 있다면, 분명 다리도 떨리고 있을 터였다.

언제부터 증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난번 그 백작 영애와 티타임 중에 증상이 발현된 것을 생각해보면 그랬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테오도르는 엄청난 인내심으로 버티고 있는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저기, 제가!”

나는 오르디가 부축하고 있는 쪽의 반대편으로 다가갔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테오도르를 번쩍 안아다가 2층으로 뛰어 올라가 그를 빨리 편하게 해주고 싶었지만, 극한의 인내심으로 광증을 참아내고 스스로 걸어서 올라가려는 테오도르의 의지를 존중했다.

“앗!”

하지만 테오도르의 손을 붙잡은 내 손은 그에 의해서 강하게 밀쳐지고 말았다. 엉겁결에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 버린 나는 당황해서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 사이에 테오도르와 오르디는 벌써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테, 테오도르 님!”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아까처럼 덥석 그의 손을 붙잡지는 못했다.

‘그래. 혹시 내가 다가가면 테오도르의 광증이 더 폭주하거나, 여기서 갑자기 날 물려고 들면 더 곤란할 거야. 오히려 내가 뒤따라 가는 게 낫겠어.’

나는 내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하며, 두어 걸음 뒤에서 둘을 따라갔다.

아마도 누군가 지금 내 모습을 봤다면, 주인을 따라가지 못해서 안절부절못하는 강아지 같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2층으로 올라가자, 원래 복도를 지키고 있던 사병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언제 올라온 건지, 리타 아주머니가 테오도르의 방문을 열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사병들도 리타 아주머니가 어딘가의 방에 모두 들어가 있으라고 말했을 것 같았다.

“인스트 님는요? 함께 나가지 않았나요?”

“인스트 님은 테오도르 님께서 따로 시키신 일이 있으셔서 따로 움직였습니다.”

“방 앞을 누군가가 지켜야 할 텐데요.”

“제가 지키겠습니다.”

“하지만…….”

리타 아주머니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그야 오르디는 신체 건장한 남자이긴 했지만, 광증의 테오도르는 신체가 건장한 정도로는 말릴 수 없었다.

신체 건장이라는 단어를 훌훌 뛰어넘는 인스트라도 테오도르를 막아내기는 버거울 텐데, 오르디에게 맡기자니 당연히 불안하겠지.

“그래요. 일단 그러는 게 좋겠군요.”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어느새 테오도르는 방 앞에 다다랐다.

“하아…….”

신음과 같은 한숨 소리가 테오도르의 입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숨소리와 함께 테오도르는 스스로 오르디의 부축을 풀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오르디는 당연하다는 듯이 방문 앞에서 멈춰 섰고, 리타 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광증의 테오도르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은 위험했다.

하지만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테오도르의 뒤를 따라 방에 들어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테오도르 님?”

테오도르가 입구에서 서서 나를 막아섰다. 마치 들어오지 말라는 듯이 말이다.

당연히 나는 당황했고, 당연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지 마.”

거칠고, 탁한 목소리가 내게 명령했다.

“하, 하지만, 제가 들어가서 테오도르 님을 진정시켜드려야 하는데요.”

“안돼.”

“저야말로 안 돼요.”

테오도르가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담요를 끄집어 내렸다.

“내가 널 죽일 거야.”

선혈과 같이 붉은 눈동자를 한 테오도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형이 네 어머니에게 그랬듯이.”

그 말을 들은 순간, 숨이 턱 막히고 온 몸이 굳어버렸다. 분명 저 멀리에 있던 죽음이라는 남자가 성큼 다가와 내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천천히 문이 닫혔다.

문틈 사이로, 아주 슬픈 붉은 눈이 언뜻 보이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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