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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89화 (89/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89

이 시간, 이 창가에서 내려다보면, 그 아이의 머리에는 항상 노란색 나비가 나풀거렸다.

그 아이가 움직일 때마다 나풀나풀 날아오르는 나비는 퍽 귀여워서 테오도르는 항상 그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그리고 슬며시 혼자 미소 지었다.

하지만 오늘 아니었다. 그 아이의 머리에 노란 나비는 없었다.

“…….”

테오도르는 조용히 커튼을 닫았다. 햇볕이 차단되고, 방은 금세 어두컴컴해졌다. 값비싼 테이블과 소파도, 최고급의 가구도, 모두 제빛을 잃었다.

순식간에 을씨년스럽게 변해버린 방의 한가운데로 걸어간 테오도르는 소파에 무너지듯 앉았다.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레나티스에게 자신을 미워하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 결과를 눈으로 마주하자 가슴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테오도르는 항상 레나티스가 제 몸만 한 왜건을 끌고 들어오던 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우린 차가 담긴 찻잔을 놓였던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가끔은 레나티스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던 소파에도 시선이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와 나눴던 키스를 기억해내고야 말았다.

소파만이 아니었다. 광증에서 반쯤 정신이 돌아왔을 때, 저 벽에 기대어 키스하고 있던 자신 또한 기억해냈다.

그 가빴던 호흡을, 자신을 애타게 부르던 목소리를, 그리고 습한 숨결과 짙은 눈빛까지.

곳곳에서 느껴지는 레나티스와의 기억에 테오도르는 끝내 눈을 감고야 말았다.

모든 것이 제 잘못이었다. 그녀에게 다가가지 말았어야 했다. 좋아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실을 캐내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레나티스 삶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망나니이긴 하나, 그녀의 아버지는 살아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진실은 영원히 묻혀 있었을 것이고, 레나티스가 그것을 알게 되어 슬퍼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 집에서 나가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함께 살아갔을 것이다.

햇살 같은 그녀는 눈부신 삶을 살아갔으리라.

‘에뮬이라고 했던가?’

테오도르는 레나티스가 편지를 보냈던 남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속으로 이를 바득거리며 보았던 이름인데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멍청한 새끼.”

테오도르는 혼자 욕설을 내뱉었다.

그 남자에게 보내는 편이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면서도, 테오도르의 마음속에선 그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욱 끈질기게 들었다.

보내고 싶지 않았다.

꼭 광증 때문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치료해줄 사람이 레나티스가 유일해서 그녀를 보낼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을 미워하라고까지 말했으면서도, 테오도르는 아직 레나티스를 놓지 못했다.

그녀가 살인자의 아들을 바라보며 괴로워하더라도, 자신의 옆에 있었으면 했다.

레나티스가 원수의 동생을 사랑한다며 죄책감을 느끼더라도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테오도르는 끝까지 이기적인 자신에게 넌덜머리가 났다.

입술을 깨물며, 그는 종을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르디가 방문을 열었다.

“부르셨습니까?”

어두컴컴한 방을 보고 흠칫했지만, 오르디는 별 내색하지 않고 테오도르에게 용건을 물었다.

“외출해야겠어.”

“곧 점심시간입니다. 식사하고 나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나가서 드실 예정이신가요?”

“생각 없어.”

입맛이 없었다. 뭘 먹어도 입안이 껄끄러울 뿐이었다. 지난 며칠 동안 계속 그랬다.

“하지만 뭐라도 드셔야 합니다.”

“그럼, 알아서 적당히 준비해줘.”

잔소리가 길어질 것을 안 테오도르는 대충 오르디에게 주문하며 재킷을 걸쳤다.

중요한 것은 티타임에 자신이 저택에 있지 않은 것이었다.

더는 레나티스를 문밖에 세워두고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자신이 선물한 리본을 매지 않은 레나티스를 마주해 고통을 자청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도망치는 것이었다.

* * *

친구가 없었다.

갈 곳도 없었다.

마차에 올라 오르디가 목적지를 물었을 때, 테오도르는 그것을 깨달았다.

언제 괴물로 변할지 몰라 전전긍긍했던 그는 카르오 저택의 별채에 가둬진 채 자라왔었다. 그것은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무작정 집을 나오면, 테오도르는 마땅히 찾을 친구나 갈 곳이 없었다.

“상점가로 가지.”

그나마 몇 번 가보았던 곳을 대었다.

익숙한 풍경이 테오도르를 스치고, 목적지에 도착하자 테오도르는 내렸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갈 곳 없는 처지인 것은 똑같았다.

그래서 그저 걸었다.

아무런 목적도, 방향도, 목표도 없이 걸었다. 그러다 문득 발이 멈춘 곳은, 이전에 레나티스와 함께 들렀던 여성복점이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전부! 로 하겠습니다.”

들뜬 목소리로 레나티스가 소리쳤던 것이 생각났다. 귀여운 표정에 그만 자기도 모르게 수표를 쓸 뻔했던 것 역시 기억이 났다.

제손을 겨우 멈춘 것은, 안 그래도 예쁜 레나티스가 이런 드레스까지 입는다면 너무 과하게 예쁠 것 같아서였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메이드복에 겨우 가려진 미모가 괜히 눈에 뜨여서 좋은 것은 없었다.

만약 누군가 레나티스의 미모를 알아보고, 좋아하기라도 하면 그건 최악이었다. 그 남자에게나, 레나티스에게나 그건 마찬가지였다.

“한 벌쯤은 사줄 걸 그랬나?”

테오도르는 조용히 속삭였다. 겨우 참으며 산 것이 그 리본이었다.

레나티스의 하얀 살결과 분홍 머리에 잘 어울릴 것 같은 노란색 리본.

리본 하나로 그녀가 얼마나 환하게 웃었는지, 매일 매일 그것을 하고 다니는 것이 얼마나 예뻤는지를 생각해내자, 테오도르는 레나티스에 옷 한 벌 사주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웠다.

“저기, 테오도르 님?”

옆에서 조용히 따르던 오르디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테오도르는 레나티스의 생각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특별한 목적지가 없으시다면, 지금 식사를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허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뭘 먹어도 맛도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지.”

하지만 달리 할 것도 없었다. 테오도르는 선선히 오르디의 제안을 받아 들었다.

어두웠던 오르디의 안색이 조금 밝아지는 것을 보며 테오도르는 그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최근 자신의 식사량이 너무 적고, 살이 빠져서 오르디가 노심초사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키지 않는 식사를 했다가는 탈이 나서 더 오르디가 걱정하게 만들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이미 알아봐 둔 식당이라도 있는 듯, 오르디가 앞장서서 길 안내를 했다.

그리고 그곳은 제법 괜찮았다. 안내된 개별룸은 조용했고, 실내장식이나 분위기는 깔끔했고, 음식도 맛있었다.

테오도르도 평온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이어나갔다.

후식으로 나온 푸딩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

테오도르는 가만히 제 앞에 있는 탱글탱글한 푸딩을 쳐다보았다. 푸딩의 맛을 궁금해했던, 그리고 정말 맛있었다고 이야기했던 레나티스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함께 나온 티스푼을 들고 조금 망설이다 푸딩을 한 스푼 떠먹자 부드럽고 달콤함이 이내 테오도르의 혀에서 녹아내렸다.

그러자 레나티스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맛있어했겠군.’

만약, 레나티스가 먹어보았더라면 말이다.

만약, 레나티스와 함께 왔더라면 말이다.

불필요한 가정이 테오도르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

결국, 테오도르는 스푼을 내려놓았다. 혀에서 녹아내렸던 달콤함이 쓰게 변했기 때문이었다.

“벌써 다 드셨습니까?”

룸을 나오자 이미 식사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오르디가 물었다. 방금 디저트가 들어간 것을 알고 있기에 물은 것이었다.

원래 테오도르가 단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차 마시는 것은 좋아하기에 좀 더 있다가 나오리라고 예상했었다.

“응.”

테오도르는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식당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오르디는 생각보다 이르게 나온 테오도르 덕분에 미처 하지 못한 계산을 하느라 빠르게 그를 쫓아가지 못했다.

식당에서 나온 테오도르는 그런 오르디를 기다리다 문득 옆 가게를 보았다.

그 옆 가게는 스포츠용품을 파는 잡화 상점이었다. 승마 도구나 요즘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공놀이 도구, 혹은 햇볕을 가려줄 모자 따위를 파는 곳이었다.

하지만 테오도르의 눈에 띈 것은 활이었다.

무기가 아닌 레저용으로 쓰이는 화살촉이 뭉툭하고, 쏘는 데 힘이 적게 들도록 만든 가느다란 활이었다.

‘레나티스가 쓰다간 단번에 부러져버리겠어.’

레나티스가 가볍게 활을 쏴보려고 하다가 가볍게 활이 부서져 버리자 당황하는 표정이 상상되었다.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고,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볼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아주 귀여울 거다.

그리고 나서는 무척이나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겠지. 물론, 그 표정 역시도 아주 귀여우리라고 테오도르는 장담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어느새 계산을 마치고 온 오르디가 질문하자, 테오도르는 비로소 상상에서 빠져나왔다.

그랬다. 그것은 완벽한 상상이었다. 이제는 이루어질 리가 없는 망상에 가까웠다.

‘여기는 안 되겠어.’

테오도르는 생각했다.

상점가는 이미 레나티스와 와본 곳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떠올릴 만한 물건이 너무 많았다.

자신은 다른 곳으로 도망쳐야 했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마침내 레나티스가 생각나지 않을 곳을 떠올렸다.

“도서관으로 가지.”

카르오 저택의 서재에도 적다고는 못할 책들이 있었지만, 구하기 힘든 책이나 고서들이 있어서 테오도르는 종종 국립도서관을 찾곤 했다.

“전 책은 안 좋아해요. 재미도 없고, 책 보면 졸려서요.”

적어도 레나티스가 싫어하는 곳이라면 그녀가 떠오르지 않으리라 기대하며, 테오도르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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