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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88화 (88/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88

우두커니 서서 멍하니 눈앞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너무 운 탓에 눈이 퉁퉁 부어서 잘 떠지지 않은데다가, 눈이 너무 따가웠다.

흐릿한 시야 안으로 분명하지 않은 형태의 노란색과 파란색이 보였다.

몇 번이나 눈을 깜박여 초점을 모으자 노란색과 파란색의 뚜렷한 형체가 보였다. 리본이었다.

“맞아. 나 옷 갈아입던 중이었지.”

사실 그 말은 틀린 말이었다. 옷을 갈아입던 중이라기보다는, 정신을 놓던 중이라는 게 더 옳았다.

아침 훈련을 위해서 남성용 셔츠와 바지를 입었다. 그게 테오도르가 사준 물건이라는 것은 알지만, 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머리를 묶을 타이밍이 되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늘 하던 대로 노란 리본을 들 수 없었다.

리본은 셔츠와는 달랐다. 이건 선물이었다.

테오도르가 나를 위해서 고른 선물이었고, 마음이었다.

“…….”

나는 말이 없이 노란 리본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그것을 집어넣고, 닫았다.

이제 남은 것은 파란 리본이었다. 언니가 만들어준 낡은 파란 리본으로 나는 머리를 묶었다.

“이제 됐어.”

나는 이게 어머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20년간 한 번도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궁금해하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은 불효막심한 딸이 가진 최소한의 예의.

어머니를 생각하자 또 죄책감으로 한쪽 가슴이 욱신거렸다.

나는 그녀가 언니와 나를 지키려고 이 카르오 저택에 왔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었다.

내가 언니를 대신해 이곳에 왔듯이, 어머니 역시 어린 우리를 보낼 수 없어서 자신이 왔을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도 난 한 번도 어머니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았어. 오히려 없어도 상관없다고, 언니가 있으니까 어머니는 없어도 된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니기까지 했어.’

만약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내 말을 들었다면, 얼마나 슬펐을까?

“하아…….”

과거의 무게가 내 어깨를 짓눌렀다.

“어머! 레나티스!”

힘없는 발걸음으로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가자, 놀란 얼굴의 클레어가 날 맞이했다.

“눈이…… 왜 그래? 벌에 쏘이기라도 했어?”

“아니야.”

“그럼 눈이 왜 그래? 설마…… 울었어?”

“그냥 그럴 일이 좀 있었어.”

나는 대강 말을 얼버무리며, 자리에 앉았다.

“어머! 레나티스!”

그리고 또 한 번 클레어의 놀라는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지금 빵을 하나밖에 안 먹는 거야?”

“너도 하나만 먹잖아.”

“난 늘 하나만 먹지! 하지만 넌 아니잖아. 어머, 어머, 어머! 거기다가 네가 사과를 1/4 쪽만 먹어?”

“…….”

“세상에! 그러고 보니 너 지금 감자는 아예 들고 오지도 않았네?”

클레어는 내 접시를 보곤 정말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심각하게 말했다. 평소에 먹던 것의 반의반도 안 들고 온 것이긴 했다.

오늘은 입맛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예 안 먹으면 클레어가 왜 아침을 먹으러 오지 않았냐며 내 방에 찾아올 것 같았다.

그리고 빈속으로 아침 훈련을 받을 수도 없을 것 같아서 이만큼이라도 억지로 들고 온 거였다.

“아니, 잠깐만. 오늘 무슨 틀린 레나티스 찾기라도 하는 거야?”

클레어는 아예 내 양어깨를 붙잡아서 자기 쪽으로 돌렸다.

“오늘은 그 예쁜 리본도 안 하고 왔잖아?”

그녀는 귀신같이 내가 평소와 다른 점을 찾아내고 있었다.

“가끔 다른 리본을 메기도 해.”

“거짓말! 그 리본을 매기 시작하고는, 매일 그 리본만 맸잖아? 난 네가 그 리본을 빨기는 하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고.”

“그럼 물어보지 그랬어.”

“만약에 물어봤는데, 네가 리본도 빠는 거냐고 되물으면 어떻게 해?”

클레어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지만, 진담인 것 같았다.

내가 그리 위생적으로 보이지 않았나? 가끔 늦잠을 자면 세수도 안 하고 아침을 먹으러 내려온 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 것…… 아, 아니었나? 원래 위생보다는 식사가 더 중요한 것 아니야?

“저녁에 빨았다가, 아침에 마르면 다시 묶었어.”

나는 차분하게 클레어에게 내가 매일 같은 리본을 맬 수 있었던 비결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다시 차분하게 몸을 돌렸다.

“아~ 그렇구나.”

클레어는 커다란 미스터리를 해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건 그렇고, 어쨌든 무슨 일이 있는 거지? 눈도 그렇고, 머리도 그렇고, 먹는 것도 그렇고, 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어.”

“응. 있어.”

어차피 없다고 해봤자, 속아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무슨 일이 있노라고 말해버렸다.

“무슨 일인데?”

“그냥 일이 좀 있어.”

하지만 그 일이 무슨 일인지 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 혼자 알기엔 버거운 사실들이긴 했지만, 누군가와 나누기엔 너무나 무거운 사실들이었다.

“말하기 싫어?”

“응.”

“그렇구나.”

의외로 클레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있잖아, 레나티스.”

아니었나? 그저 숨 고르고 나서 꼬치꼬치 캐물으려는 거였나?

클레어는 돌아갔던 내 몸을 다시 어깨를 붙들어 다시 자기 쪽으로 돌렸다. 덕분에 나는 당근 한 조각을 포크에 꿴 채,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파이팅!”

…… 뭐지?

클레어는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더니, 오른쪽 주먹을 하늘로 높이 들어 올렸다.

“힘내!”

그리고 이어서 이번에는 오른 주먹을 내리고, 왼 주먹을 하늘 높이 찔러 올렸다.

“와아~!”

그리고 마무리로 양손을 위로 들어 올리곤, 무지개 모양으로 반짝이를 만들며 내려왔다.

“그거…… 뭐야?”

“응원!”

클레어는 이제 다 끝났다는 듯이 의자를 끌어당겨 자기 접시 앞으로 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힘냈으면 좋겠어.”

앙~ 하고 빵을 입에 넣으며 클레어가 말았다.

“그래서 다시 예쁜 노란 리본을 맨 예쁜 눈의 예쁜 레나티스를 보게 되면 좋겠어.”

오물오물 빵을 씹으며, 클레어는 방긋 웃었다.

그리고 나는 찔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 *

“어?”

인스트가 나를 처음 보자 보인 반응이었다.

“어어?”

그리고 눈을 끔벅이고 나서 보인 반응.

“어어어?”

그리고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 나서 보인 반응이었다. 정확하게는 내가 거의 인스트의 코앞까지 오고 나서야 보인 반응이었다.

저렇게 반응이 늦은데 어떻게 기사가 된 건지 모르겠네.

“내 기억에 혼동이 온 거야, 아니면 못 본 며칠 사이에 네가 못생겨진 거야?”

아무래도 인스트가 기사가 된 이유는 기사는 말이 필요 없어서가 아닐까? 적어도 음유시인이 되지 못한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스쾃을 먼저 할까요, 뺑뺑이를 먼저 할까요?”

나는 인스트의 헛소리에 대답하는 대신 훈련 순서를 물었다.

“스쾃부터.”

인스트의 말에 나는 군말 없이 스쾃을 시작했다. 혹독하게 몸을 몰아붙여서 그저 힘들다는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으면 했다.

“음…… 저기 말이야. 너희 아버지 일은 유감이야.”

하지만 인스트는 내가 고통에 빠져들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괜찮아요. 오히려 제가 인스트 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드려야겠죠. 어찌 됐든,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찾아주셨잖아요.”

“하지만 누군지는 묻지 않네?”

“제가 안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복수를 할 수도 없고, 감사의 인사를 할 수도 없죠.”

“왜?”

“둘 다 제 몫이 아니니까요. 전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으니, 복수를 할 수 없어요. 그렇다고 아버지를 죽인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를 할 수도 없고요.”

점점 숨이 차올랐다. 말을 하고 있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보통의 부녀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어렵네. 그건 애증 관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 상관 없는 관계도 아니고, 뭐지?”

“글쎄요.”

“그럼 운 건, 아버지 때문은 아니겠군.”

인스트의 말에 내 다리가 뭐에 걸리기라도 하듯, 덜컹 멈춰버렸다. 못생겨졌느니 뭐니 했지만, 내가 울어서 눈이 부은 것이라는 걸 진작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어제는 내가 널 차지 않았으니, 나 때문에 운 것도 아니겠고?”

“아니, 그러니까! 전 인스트 님을 좋아하지 않는다니까요!”

“알아.”

평소와 같이 버럭 소리쳤지만, 인스트는 평소와 같이 맞받아치지 않았다. 그저 씨익 웃었을 뿐이었다.

“그럼, 다른 사람에게 차여서 울었나 봐? 좋아하는 사람에게?”

“…….”

“그러게. 그냥 날 좋아하고, 나에게 차이지 그랬어. 그러면 그렇게 울 일은 없었을 텐데.”

방금 인스트의 발언이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알 수 없어서 나는 멍해졌다.

그러자 인스트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이건 또 뭔가 싶어서 인스트와 눈을 맞추자, 그는 다시 씨익 웃었다.

“파란 리본도 어울린다. 귀여워”

오늘 처음 들은 칭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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