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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87화 (87/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87

좋아한다고 말하려고 했다.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그 표정이 좋다고,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좋다고, 나를 바라보며 짓는 미소가 좋다고, 함께 했던 시간이 다 좋았다고, 그래서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내게 자신을 미워하라고 했다.

나의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가 바로 자신의 형이니, 자신을 미워하라고.

“그리고, 너의 아버지를 죽인 것도…… 내 아버지야.”

“네?”

이어지는 소식에 나는 다시 한번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아,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주 잠깐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금쯤 시골로 내려갔을까? 아니면 아직 가고 있으신 중이려나? 뭐, 이제 나랑 상관없는 일이지.

하지만 집에 도착하지 못하고 죽었으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으리라고 생각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 내 눈으로 직접 봤어. 범인이 네 아버지를 찌르는 광경을.”

테오도르의 말에 나는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나는 아버지가 사는 꼬락서니를 보며, 언젠가 누군가에게 칼을 맞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술집에서 외상값을 떼어먹거나, 술에 취해서 시비를 걸거나 하는 것을 보며 말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 현실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한 적 없었다. 심지어 그게 아버지의 사인이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인스트가 그동안 네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으러 다녔어. 그자가 떨어뜨린 검을 보고 분명 어디서 본 것 같다고 하더군. 그 검의 주인과 대련을 해본 것같으니 범인을 찾아보겠다고 했어.”

나는 그동안 인스트가 아침 훈련에 빠졌던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저 테오도르가 나를 피하고 있어서 인스트도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인스트는 사실 내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 범인을 찾았다고 인스트가 보고했어.”

테오도르가 문을 연 이유는 이것이었다.

내가 문 너머에서 그에게 고백할 것을 알아차려서가 아니었다.

“범인은 카르오 가문의 사병 중에 있었어. 인스트가 그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일부러 기습해서 그자의 검이 새것인 것까지 확인했지.”

복도에서 내가 부끄러운 상황에 놓일까 봐 구해준 것이 아니었다.

“혹시나 해서 알아봤지만, 수도 출신으로 네 아버지와는 접점이 전혀 없었어. 일면식도 없는 네 아버지를 그자가 사사로이 죽였을 리는 없겠지. 그러니, 카르오 대공의 명령으로 그자가 네 아버지를 죽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거야.”

그는 자신이 알아낸 것을 내게 말해주기 위해서 문을 연 것이었다.

“네 아버지 원수의 아들인 나를 미워해도 좋아.”

그리고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저는…….”

바싹 마른 입술을 열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몰랐지만,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테오도르 님도 아시겠지만, 아버지를 그리 썩 좋아하지 않아요.”

이건 변명일까?

“이렇게 말하면 정말 나쁜 딸 같겠지만, 어릴 때는 아버지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언니와 내 앞에서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이게 변명이라면 누구를 위한 변명일까?

“솔직히 지난번에도 이제 다시는 제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어요. 제가 아버지에게 활을 쏜 순간, 저와 아버지의 인연은 끝났다고 생각해요.”

아버지 원수의 아들인 테오도르에 대한 변명인지, 아니면 계속 그를 좋아하고 싶은 나를 위한 변명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누구를 위한 변명인지 모를 변명만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만약에 카르오 대공님께서 저희 아버지를 죽이셨다고 해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게 왜 제가 테오도르 님을 미워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지요.”

“…….”

테오도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저 나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아주 슬픈 눈으로.

“그럼, 너의 어머니는?”

한참 만에야 테오도르의 입술이 움직였다. 나만큼이나 메마른 입술에서 나온 잠긴 목소리가 내게 물었다.

순간, 나는 멈칫했다. 아버지의 경우와는 달리 곧장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릴 때 돌아가셨다고 했지?”

“네.”

“기억이 거의 없다고?”

“네.”

“그래서 내 형이 네 어머니를 죽였다고 해도, 별 느낌이 없어?”

기억도 나지 않는 내 어머니, 벨 그라티아.

우습게도 20년을 함께 산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죽음에 카르오 가문이 얽혀있다는 것이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심지어, 이제껏 내가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는 것에 죄책감까지 들었다.

물론 내가 물어봤자, 진실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나 언니의 태도를 봤을 때 그들도 어머니가 그렇게 죽었다고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평범하게 죽은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평범한 죽음에 대해서도 한 번도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아마도 네 어머니가 에멘스 형의 광증을 조절하고 있었던 사람이었으리라고 생각해.”

나는 조용히 테오도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 분홍 머리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어머니 역시 카르오 집안의 광증을 가라앉혀줄 수 있는 치료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다만, 이제까지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했었다.

내가 읽은 소설에서 ‘테오도르와 아스텔라’가 그랬듯, 또 ‘테오도르와 내’가 그랬듯, 막연히 비슷한 또래가 매칭될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나를 보며 테오도르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하셨죠.”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어린 테오도르가 너무 잔인한 장면을 목격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 어린아이만을 신경 쓰고, 보듬어 주고 싶어 했다.

나는 한 번도 죽은 여자가 가엾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 여자가 어떻게 죽었는지, 누군지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 여자가 내 어머니인 줄도 모르고.

“정말 찰나의 만남이었지만, 그녀는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

그제야 테오도르는 떨궜던 고개를 들었다. 지금 테오도르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그의 치료제이자 하녀인 레나티스’를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나는 그날 정원의 수풀에 숨어 있었어. 유모는 가정교사가 올 시간이라고 나를 데리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나는 지루한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았거든.

유모가 나를 찾으러 다른 곳에 가고 나서도 나는 한참을 거기에 숨어 있었어. 그러다가 네 어머니가 날 발견했지. 그녀는 도망가고 있었어. 그때는 몰랐지만 내 형으로부터 도망가는 길이었겠지.”

지금 테오도르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가해자의 가족이 피해자의 유족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슬픔과 미안함, 그리고 애잔함이 뒤섞인.

“그녀는 이미 다쳐 있었고, 다급해 보였어. 그런데도 그녀는 멈춰 섰어. 나 때문에.”

나는 테오도르가 들려주는 그 날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나의 어머니 이야기에, 내가 모르는 어린 테오도르의 이야기에, 그 둘의 과거 이야기에.

“도망가야 한다고 했어. 위험하다고, 자기와 함께 도망가자고 했어. 형에게 발견되면, 내가 위험하다고 생각해서였겠지.”

테오도르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표정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보라색 눈동자만은, 곧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처럼 슬퍼 보였다.

“어린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자신도 두려웠을 그 상황에서 억지로 웃으면서 내게 손을 내밀어 주신 분이었어. 그래서 난 그 손을 잡으려고 했어.”

이미 결말을 아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이다음에 얼마나 처참한 일이 벌어질지 알기에.

누군가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때 형이 나타났어. 에멘스 형이 그녀를 붙잡았어. 형의 손톱이 네 어머니의 살을 파고들었어.”

테오도르 형의 손톱이 얼마나 날카로웠을지, 나는 알았다.

“형이 그녀의 목을 물었어. 피가 뿜어져 나왔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지.”

날카로운 송곳니에 물리는 것이 얼마나 아픈지도, 나는 알았다.

“그렇게 에멘스 형이 네 어머니를 죽였어.”

다만 몰랐던 것은, 어머니가 그렇게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진실이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

“레나티스.”

나를 부르는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슬펐다.

“내가 아니었다면, 네 어머니가 그때 날 발견하지 않았다면, 어린 나를 구하려 들지 않았다면, 그녀는 도망갈 수도 있었어.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있을는지도 몰라.

네 어머니를 죽인 건, 에멘스 형만이 아니야. 나도 마찬가지야.”

나를 바라보는 테오도르의 눈빛이 슬펐다.

“나를 미워해. 넌 그럴 자격이 있어.”

하지만 나는 이제 그런 테오도르를 위로할 수도, 안아줄 수도 없었다.

“…….”

그리고 테오도르도 그것을 알았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앞의 의자는 이제 비어 있었다.

그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도, 방을 나가는 것도 모두 알았다. 하지만 잡을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방문이 닫히고 나서 참았던 숨과 함께 울음을 토해내는 것이었다.

달래는 이도, 안아주는 이도 없이, 나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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