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86
“할 수 있다.”
테오도르 침실의 커다란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나는 주문처럼 ‘할 수 있다’를 외치고 있었다.
스기엔의 말이 옳았다. 찐따처럼 방구석에서 땅굴이나 파고 있는 건 나답지 않았다.
언니가 베드 엔딩을 맞지 않도록 야반도주를 시킨 것도 나였고, 테오도르를 위해서 장르를 바꾸려고 한 것도 나였다.
성공했든, 성공하지 못했든, 어쨌든 시도해보는 것이 나였다.
레나티스 그라티아는 어떻게든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똑똑똑.
맑은 노크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
하지만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일부러 티타임이 아닌 시간을 골랐기 때문에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법도 한데, 마치 밖에 있는 사람이 나인 것을 아는 것처럼 대답이 없었다.
“테오도르 님?”
대답이 있거나 말거나 나는 테오도르의 이름을 불렀다.
복도를 지키는 사병이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내가 테오도르의 차 시중을 들려고 왜건을 끌고 왔다가 문만 두드리다가 가는 것을 며칠째 봤기 때문일까? 그의 시선에는 측은함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절대로 이 문 안으로 들어가고 말 거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테오도르 님. 저예요. 레나티스예요.”
목소리에 벌써 나인 것을 알았을 테지만, 나는 내 이름을 밝혔다.
“…….”
여전히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평소라면 이쯤에 돌아갔을 테지만, 어림없지! 나 레나티스 그라티아야! 한다면 하는 여자라고!
오늘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
“테오도르 님. 안에 계신 것 알아요.”
사실은 모르지만, 일단 질렀다.
“문 좀 열어주세요. 얼굴 뵙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나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
하지만 여전히 안에서는 말이 없었다.
“좋아요. 그럼 그냥 얼굴 보지 않고 이야기할게요. 제 목소리는 듣고 계실 테니까요.”
나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 말을 여기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얼굴도 보지 않고 이야기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다면 어쩔 수 없었다.
“테오도르 님.”
테오도르의 이름을 부르는 내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마른 입술에 남은 침을 적셨다.
“사실은, 전…….”
아직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뱃속이 간지러웠다.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둥둥둥 북을 치는 것처럼 들렸다.
어젯밤, 내가 얼마나 많은 말들을 연습했는지 떠올렸다. 그리고 그중에서 고르고 고른 말을 이제 내뱉으려고 하고 있었다.
“테오도르 님을…….”
떨리는 입술이 다음 단어를 내뱉기 직전이었다.
“…….”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문 틈으로 드디어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테오도르 님!”
나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테오도르의 얼굴은 그 순간 일그러졌다.
그것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분명, 싫어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무언가 징그러운 것이나 혐오하는 일그러짐도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고통과 안타까움, 그리고 슬픔에 짓눌린 일그러짐이라고 보는 것이 적당했다.
“테오도르 님?”
나를 보자마자 보인 테오도르의 표정이 당황스러워서 재차 그의 이름을 부르자, 언제 그런 표정을 보였나 싶을 정도로 테오도르의 얼굴은 바뀌어 있었다.
반듯한 이마와 눈썹, 그리고 그 아래 아름다운 보라색 눈과 날렵한 코. 그리고 도톰하고 어여쁜 입술까지.
내가 아는 그대로의 테오도르였다.
다만, 마치 내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처럼 찬바람이 쌩쌩 도는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들어와.”
한쪽으로 비켜서며, 테오도르가 말했다.
‘앗싸! 일단 들어오는 건 성공했어!’
테오도르의 침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방에 들어오는 것이 제일 어렵다고 생각했었다. 테오도르가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문을 부술 각오까지 했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문 수리비로 모아둔 내 월급이 몽땅 날아가고, 오르디에게 엄청나게 혼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까지 할 생각이었다.
적어도 이곳에서 할 일 있는 나는 실직의 걱정은 없었다. 그렇다면 돈이야 일해서 갚으면 그만이고, 혼이야 나면 그만이었다.
“앉아.”
나의 이 무대포적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오도르는 의자를 권했다. 그리고 자신도 그 앞에 앉았다.
‘어?’
오랜만에 보는 테오도르의 얼굴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초췌해 보였다.
식사를 거르기라도 한 건지 마지막에 내가 봤을 때보다 조금 살이 빠져 보였고, 얼굴은 핼쑥해 보였다. 눈그늘도 살짝 지고, 피부도 어쩐지 거칠어 보였다.
그게 조금 기뻤다면, 나는 나쁜 아이일까?
적어도 테오도르가 나를 거부하는 것을 즐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자 조금 기뻤다.
적어도 내가 힘들어하는 동안 테오도르도 고민하고 힘들어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약간의 위안이 되기도 했다.
“…….”
“…….”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테오도르의 얼굴과 눈치를 살피기에 바빴고, 테오도르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나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물론, 나는 그렇게 바라만 보고 있는대도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조금 초췌한 테오도르는 그 나름대로 잘생김을 뽐내고 있었다. 온종일 바라보라고 해도 볼 수 있었다.
20년 동안 올곧은 나의 취향이 흔들린 것은 아니었다. 취향은 취향이고, 잘생긴 건 잘생긴 거였다.
하지만 언제든 테오도르의 마음이 바뀌어서 방에서 나가라고 하면, 나는 쫓겨날 처지였다.
그래서 내가 문을 부수고 다시 들어와야 한다면, 앞서 말했듯 나는 문 수리비로 돈을 날리고 오르디에게 엄청나게 혼이 날 테니, 급한 쪽은 내 쪽이었다.
“저를 주제도 모르고, 되바라진 아이라도 생각하셔도 좋아요.”
나는 어제부터 연습했던 말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저는…….”
고개를 들고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살짝 경직되어 있었다.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안다는 듯이.
그래. 알 것이다.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알아차릴 것이다.
어젯밤 거울을 보며 연습하면서 나도 알아보았으니까.
상대방이 눈앞에 있지 않았다. 그저 연습이었다.
눈앞에 테오도르가 있다고 가정하고 연습하는 것인데도, 거울 속의 나는 지금이 실제인 듯 얼굴을 붉히고, 눈을 깜박이고, 숨을 들썩거렸다.
그러니, 테오도르도 알아볼 것이다.
“테오도르 님을…….”
내가 지금 그를 좋아한다고 말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레나티스.”
막 가장 중요한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테오도르는 더는 들을 수 없다는 듯이 다급하게 내 말을 막았다.
“내가 먼저 할 말이 있어.”
이건 또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테오도르 님이 먼저요?”
그 말에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고, 설레기 시작했다.
나는 테오도르가 약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내 마음의 향방을 정했다. 어쩌면 테오도르 역시 그랬을지도 몰랐다.
클레어의 말에 의하면 테오도르가 약혼하게 될 여성분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귀족 영애일 것이라고 했다.
사교생활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테오도르 역시 그분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 유명한 지아 언니에게 듣기론, 귀족들의 결혼이란 다 그런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누군지도 모르지만, 결혼을 한다는 것.
그러니, 테오도르 역시 누군지도 모르는 영애와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마음을 자각했을 수도 있었다.
아니, 마음은 훨씬 오래전에 스스로 알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런 그림을 그린다거나, 나에게 농담을 한다거나, 키스한 것일 거다. 나는 테오도르가 했던 말들이, 행동들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귀족인 테오도르가 집안에서 정해준 약혼을 어기고 나를 선택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과연 옳은 선택인지 고민하기 위해서 나도 만나지 않고, 이렇게 초췌해질 만큼 심각하게 고민할 시간이.
‘드디어 테오도르가 답을 내린 거야.’
나는 긴장감에 치마를 꼭 움켜쥐었다. 내가 좋아하는 메이드 복이 구겨지든 말든 상관없었다.
“레나티스.”
진중하게 테오도르가 내 이름을 다시 불렀다.
나는 기대감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굳이 내 말을 막고, 자신이 먼저 말하겠다고 한 행동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만약, 테오도르가 내게 마음이 없었다면, 그래서 거절할 참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내가 고백을 하고 그걸 거절하는 것이 훨씬 편할 테니까.
내가 인스트에게 고백하지도 않았는데 차였던 것처럼, 내가 그에게 고백도 하기 전에 테오도르가 거절할 리는 없었다.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치자 테오도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표정을 보자 내 안에 차오르고 있던 희망과 설렘이 한순간에 사그라졌다.
테오도르는…… 괴로워 보였다.
“너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야”
그야말로 뜬금없는 주제였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당황할 틈이 없었다. 그것보다 나는 테오도르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괴로움만 보고 있었다.
그는 아주 힘겹게 입을 열고 있었다. 마치 입 안에서 바늘을 토해내는 것처럼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어쩌면, 광증의 고통에 시달릴 때보다 테오도르는 더욱 힘들어 보였다.
“……이야.”
그의 표정과 고통에 너무 집중해서일까? 일순간,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네?”
아니, 어쩌면 나는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너의 어머니를 죽인 건, 내 형이야.”
하지만 테오도르는 다시 한번 또박또박 내게 말해주었다.
“그러니 너는 나를 미워해야 해.”
테오도르는 내게 불가능한 일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