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85
악몽이 속삭였다.
"네가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감히, 테오도르는 자신이 행복하리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다만,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을 뿐이었다.
‘레나티스…….’
테오도르의 머리 속에서 레나티스가 떠올랐다. 달콤함이 묻어날 것만 같은 분홍색 머리카락의 그녀는 그것보다 더욱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하지만 그것은 찰나였다.
천천히 레나티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고 있던 입술을 오무라들었다. 사랑스러움이 가득 담긴 눈은 천천히 어둠으로 물들어갔다.
‘안돼…….’
맑은 레나티스의 눈에 어느덧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금방이라도 눈물 한 방울을 툭 떨어뜨릴 것 같은 그 얼굴에 테오도르는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울지 마.’
하지만 테오도르의 애원이 무색하게도 끝내 레나티스의 얼굴에서 굵은 물방울이 툭, 떨어져 내렸다.
툭, 툭. 투둑.
마치 처음의 눈물이 신호라도 된 양, 눈물이 넘쳐흘렀다. 걷잡을 수 없는 소나기 마냥 떨어지는 눈물에 테오도르는 무릎을 꿇고야 말았다.
‘제발, 울지 마. 레나티스. 제발…….’
"넌 영원히 행복할 수 없어."
악몽이 속삭였다.
* * *
날이 흐려서일까? 몸이 영 찌뿌둥했다.
“꿈자리도 뒤숭숭해서 잠도 잔 것 같지 않네.”
이리저리 팔을 돌려보지만, 그런다고 컨디션이 나아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밤에 분명 무슨 꿈을 꾼 것 같기는 한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굉장히 기분 나쁘고 밤새 시달렸다는 느낌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오늘은 인스트도 없고.”
나는 고개를 돌려 인스트가 돌에 눌러 놓은 메모를 다시 쳐다보았다. 내용은 간단했다.
일이 좀 생겨서 아침 훈련에 동참할 수 없으니 자율 훈련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매일 인스트가 시키는 루틴대로 혼자 연습하는 중이긴 했지만, 컨디션도 좋지 않은데다가 봐주는 사람까지 없으니 잘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영 꽝이네.”
과녁에 닿기도 전에 바닥으로 꼬꾸라져 버린 화살을 보며 중얼거렸다.
테오도르의 어쩌고저쩌고 조상님이 힘이 정말 세긴 했던 건지, 인스트가 줄을 갈아준 활은 장력이 엄청났다. 내 힘으로도 겨우 당기는 수준이었다.
만약에 세월 때문에 장력이 약해진 게 아니었더라면, 그날 난 아버지를 쏠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다시 시골로 내려가셨으려나?”
내가 오르디를 따라서 이곳에 올 때, 마차로도 한참 걸리는 거리였다.
언니의 편지를 받고 왔다면, 올 때는 어떻게 마차를 빌렸든 얻어탔든 한 모양이지만, 갈 때는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만약, 걸어서 갔다면 아직 집에 도착도 못 했을 수도 있었다.
“뭐, 알게 뭐람.”
나는 가볍게 아버지의 존재를 무시했다. 이제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대신 다시 활에 화살을 걸고 과녁을 노렸다. 신중하게 조준을 하고, 시위를 놓았다.
“…… 진짜 오늘은 꽝이네.”
어찌어찌 과녁의 근처까지 가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근처일 뿐이었다. 화살은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나뭇가지에 걸려버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화살을 수거하러 터덜터덜 걸었다.
흐린 하늘만큼이나 마음이 별로였다.
.
.
.
“어?”
돌아가다 마는 손잡이에 나는 당황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 시중을 들 준비를 하고, 노크하고,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테오도르 님?”
다시 노크하고, 기다렸지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깜박 낮잠이라도 주무시나?’
요즘에는 또렷한 눈으로 날 기다리고 있는 테오도르였지만, 예전에는 뭔가 나른한 자태였던데다가, 한번은 꾸벅꾸벅 존 적도 있던 터라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생각이 흘렀다.
‘그럴 수도 있긴 하지만, 그럼 문은 언제 잠근 거지?’
혹시 내가 방향을 착각했나 싶어서, 다시 문손잡이를 잡고 이번에는 시계방향과 반시계 방향, 둘 다 돌려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손잡이는 어느 순간에 덜컥 멈춰버린 채, 더 돌아가지 않았다.
“테오도르 님? 계세요?”
다시 한번 노크 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문이 잠긴 걸 보면, 분명 누군가가 안에 있긴 했다.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혹시 테오도르가 안에서 광증이라도 일으킨 게 아닐까? 마지막으로 증상이 나온 지 꽤 되었으니까 그럴지도 몰라.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위험할까 봐 문을 잠그고……!’
“테오도르 님!”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급해진 나는 더 큰 소리가 나게 문을 두들겼다. 안에 누가 자고 있더라도 충분히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아주 세게.
“……차는 됐어.”
내가 시끄럽게 문을 두드린 소리의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테오도르 님? 안에 계세요?”
나는 즉각 문을 두들기는 것을 멈추고, 대신 귀를 문에 바싹 붙였다.
“그래. 차는 됐으니까, 돌아가.”
짧은 말이었다.
어떤 이유나 설명은 조금도 붙이지 않은, 짧은 명령이었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
“오늘 차는 유자차인데, 이게 싫어서 그러시다면 다른 차를 가지고 올 수도 있어요. 음…… 페퍼민트도 있고, 홍차도 있어요. 그리고 다른 과일 차도 있고요.”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조용한 침묵만이 무거운 거절을 뜻할 뿐이었다.
“…….”
문은 닫혀 있었고, 나는 그 문을 열 수 없었다.
다음 날도, 다음 날도, 그리고 그다음 날도.
* * *
며칠째, 테오도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 일 때문인가?”
나는 테오도르와 마지막 나눈 대화가 아스텔라 언니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아니면, 그일?”
그리고 내가 물어보지 못한 일도 아직도 마음에 걸렸다. 테오도르의 약혼 말이다.
어쩌면 지금의 상황이 더 나은 것일 수 있었다. 나는 아스텔라 언니에 대해서 질문을 받지 않아도 되고, 테오도르의 약혼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렇지만…….”
그렇지만 계속 테오도르의 얼굴도 보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지는 것은 괴로웠다.
보고 싶었다.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도, 신비한 보라색 눈도, 오뚝한 코도, 예쁜 입술도.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테오도르의 큰 키도, 예쁘게 각진 어깨도, 체격에 비해서 넓은 가슴도, 긴 다리까지도 전부 보고 싶었다.
“문 두 개만 열면 바로인데.”
나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커넥팅 룸의 문을 바라보았다. 문은 당연히 잠겨 있었다. 어쩌면 저 방에 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벌써 며칠째 귀를 쫑긋 세우고 있지만, 옆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자기 침실에서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
나는 며칠 째 보지 못한 테오도르의 대신이라도 하듯, 그가 선물해준 리본을 꺼내서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불안한 마음이 조금 가시는 기분이었다.
“아주 닳아서 문드러지겠네.”
“스기엔?”
어느샌가 창문에 스기엔이 서 있었다. 아니, 앉아 있는 건가?
흐음……. 슬라임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다리인 건지 알 수가 없네.
“애지중지하더니만, 손으로 문질러서 천이 닳아 없어지게 만들셈이야?”
“그, 그정도로 문지르진 않았어!”
“아니긴? 여기 구멍날거 같은데?”
“뭐?”
나는 깜짝 놀라서 리본을 살폈다. 아무리 내가 힘이 세긴 해도 문지르는 힘까지 엄청나진 않는데!
“그걸 믿냐?”
숙인 정수리에 내려 꽂힌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웃음을 참으려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스기엔의 얼굴이 보였다.
“쯧쯧. 순진한 인간. 내가 이렇게 널 단련시키는 걸 다행인 줄 알아. 그냥 밖에 내놨다가는 어느 사기꾼에게 홀딱 전 재산을 털릴걸, 내가 방지해주고 있는 거야.”
스기엔은 혀를 차며 창문에서 침대로 풀쩍 뛰어 내려왔다.
“그런 단련 필요 없는데…….”
“어허! 모르는 소리! 인간 중에 얼마나 나쁜 인간이 많은 줄 알아? 너같이 순진해 빠진 애는 눈 뜨고 코 베어 가도 모를걸?”
“말도 안 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코를 베어 가는데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나는 스기엔의 말에 까르르 웃어버렸다.
“…….”
하지만 스기엔은 웃지 않고 심각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포동포동한 분홍색 몸체와는 어울리지 않는 매우 진지한 표정이었다.
“…… 진짜야?”
갑자기 더럭 겁이 나서 스기엔에게 물었다.
“…….”
스기엔은 아무 말 없이 여전히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손을 올려 내 코를 감싸쥐었다.
“바보. 또 속냐?”
스기엔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 피식 웃었다.
“…….”
나는 또 슬라임에게 농락당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그래. 맞아. 난 바보야.”
인간의 존엄마저 사라져버린 것 같아 나는 그대로 침대에 꼬구라져 버렸다.
“알긴 아네.”
그리고 스기엔은 얄밉게도 내 말에 맞장구를 치며 내 뒷통수에 올라 탔다. 슬라임의 묵직함이 내 머리를 통해서 그대로 전해져 왔다.
“내려와, 스기엔. 나 지금 장난칠 기분이 아니야.”
“나도 장난 아니야.”
뒷통수를 타고 스기엔의 목소리가 울렸다. 마치 내 머리 속에서 말하는 것같은 느낌이 이상했다.
“풀 죽어 있는 건 너랑 안 어울려.”
그럼 나와 어울리는 건 뭔데?
“그냥 다 때려 부수고, 뭐라도 시도해보고, 안되면 엉엉 우는 게 레나티스같은 거지, 이렇게 찐따처럼 방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궁상이나 떨고 있는 건 너랑 안 어울려.”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스기엔이 말했다.
“너답게 해, 레나티스.”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