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84
“아빠?”
아스텔라는 무서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루베르의 바지를 잡아당기며 그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 루베르가 고개를 들자 이미 카르오 대공도, 그의 시종도, 그가 타고 온 화려한 마차도 이미 떠나고 없었다.
남은 것은 테이블 위에 놓인 이 집에 어울리지 않는 붉은 색 벨벳 주머니뿐이었다.
“아빠?”
아스텔라는 다시 아빠를 불렀다. 여전히 두려움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아빠가 아니라 낯선 사람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아빠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다른 사람 같았다.
텅 빈 눈동자나, 다물지 못하고 반쯤 벌린 입이나, 우는 동생을 달래지는 않고 묘한 시선으로 바라만 보고 있는 것도 그랬다.
“…….”
루베르는 아무 말 없이 안고 있던 아기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비척이며 방 밖으로 나갔다.
붉은 벨벳 주머니가 보였다.
벨의 유산이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리고 배신의 산물이었다.
“감히, 주제를 모르고, 내 아들을 유혹하려고 들었어.”
“네 부인은 정숙하지 못했어.”
“내 아들의 침대에서는 때때로 분홍색 머리카락이 발견되었지.”
“과연 그 아이는 네 아이일까?”
쉭. 쉭.
여전히 루베르의 귓가에 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돈주머니를 움켜쥐고 숨 막히는 집을 걸어 나갔다.
“아빠?”
아스텔라는 조그만 발로 루베르를 따라 나갔다.
“아빠?”
하지만 절대로 혼자서 나가면 안 된다는 집 밖으로 루베르가 나가버리자 문간에서 아스텔라는 더 나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어머니나 어버지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면 위험하니 절대로 혼자 밖에 나가면 안 된다고 배웠다.
아직 어리고 착한 아스텔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거스를 용기가 없었다.
“아!”
멀어져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발만 동동 구르며 쳐다보고 있던 아스텔라는 퍼뜩 아버지가 바닥에 내려놓은 동생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레나?”
아스텔라는 거실을 가로질러 방바닥에 놓인 동생을 향해서 다가갔다. 울다 지친 것인지 어느새 레나티스는 울음을 그치었다.
“착한 우리 레나.”
아스텔라는 작은 손으로 어떻게든 동생을 안아 들려고 했다. 그게 쉽지는 않았다.
아스텔라의 몸은 아직 아기를 안기에는 너무 작았고, 그녀는 너무 어렸다.
“괜찮아, 레나. 언니가 있잖아.”
결국 동생을 안아 드는 데는 실패했지만, 아스텔라는 그 대신 작은 손으로 레나티스의 가슴을 토닥토닥했다.
아직 눈물을 머금은 연하늘색의 눈동자가 또렷하게 아스텔라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방긋, 웃었다.
“예쁜 내 동생!”
레나티스의 미소에 아스텔라도 방긋 웃었다.
자매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 * *
“쿨럭!”
20년 전 그날에 대해서 테오도르에게 말해주던 루베르는 울컥, 피를 토해냈다. 테오도르의 옷에 붉은 피가 튀었지만, 두 사람 다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그날부터 자신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는 것, 어린 아스텔라가 제 동생을 돌보았다는 것, 애들이 어떻게 이렇게 컸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까지.
“허억…… 허억…… 허억…….”
하지만 루베르에게는 그런 기나긴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었다. 스스로가 그것을 더욱 잘 알고 있었다.
“네 아버지가…… 죽인 거야.”
핏발 가득한 눈을 부릅뜨고, 루베르는 소리쳤다. 그가 남겨야 하는 가장 중요한 말은 그것이었다.
지난 20년간, 그를 괴롭힌 것은 벨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벨의 배신을 확신했다면, 그는 벨을 욕하고 금방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제정신으로 있고 싶지 않아 술을 마시게 한 것은, 스스로 제 인생을 진창에 처박게 한 것은, ‘의심’이었다.
벨이 자신을 배신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레나티스가 자신의 아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
그것에 대한 답을 가진 벨은 이미 죽고 없었다. 루베르는 물어볼 곳이 없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의심하고, 의심했다. 제 인생을 갉아먹기에 충분할 만큼.
“나도, 벨도…… 네 아버지가…….”
“……죽인 거지.”
루베르의 뒷말을 테오도르가 받았다. 그러자 오히려 루베르가 그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을 평생토록 괴롭힌 의심의 답을 자신은 죽음의 순간에서야 찾아냈다.
20년 만에 만난 카르오 대공을 자신이 알아보았지만, 그는 모른 척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인, 분홍 머리카락의 레나티스가 또 그 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누군가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의심을 어떻게든 확인하려 했을 때, 대공은 자신을 죽이려 했다.
그래서 루베르는 깨달았다.
자신이 간악한 뱀에게 속았다는 것을.
그리고 또 깨달았다.
벨 역시 간악한 뱀이 죽였으리라는 것을.
“내가 그 현장에 있었으니까.”
테오도르는 담담히 루베르에게 그 이유를 알려 주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이 남자를 죽였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았다. 그의 평생을 괴롭혔다는 것도 새삼스럽지 않았다.
카르오 대공은, 테오도르의 아버지는, 니제르라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 외에는 모두가 하찮은 사람.
자신 외에는 어떻게 되든지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
아니, 오히려 자신 외에는 모두가 불행하기를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래야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테니.
“진실을 알려 줄까?”
그리고 테오도르 또한, 그 피를 이어받은 자였다.
“벨을 죽인 것은 카르오 대공의 아들이야.”
테오도르는 천천히 자신이 아는 진실을 루베르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아들을 죽인 것은 카르오 대공이지.”
그것은 죽어가는 자에게 마지막으로 베푸는 자비가 아니었다.
“벨은, 네 아내는, 한 번도 널 배신한 적 없어.”
오히려 죽어가는 자의 목에 칼날을 쑤셔 박는 행위였다.
“아내의 마지막 부탁을 저버린 것은 너지. 아이들을 잘 돌보기는커녕 방치하고, 학대했지. 넌 아버지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몹쓸 인간이야.”
루베르의 검은 눈동자가 후회와 절망으로 물들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아빠라고 부르며 자신을 따랐던 아이들의 눈에 두려움만이 가득하게 만든 것은 자신이었다.
아예 자라서는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가게 만든 것 역시 루베르, 자신이었다.
“나는…… 나는…….”
루베르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러지 않으리라.
아내를 믿고, 아이들을 사랑하고, 단출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리리라.
“네가 네 아내를 배신한 거야. 네가 네 아이들을 배신했어.”
그것이 루베르의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천천히 루베르의 눈에서 빛이 꺼져갔다. 혼탁한 절망이 그의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대로 끝이었다.
“…….”
테오도르는 루베르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린 레나티스를 학대한 자였다. 죽어가는 순간에 한 고해성사 따위로 후련하게 세상을 떠나게 할 수 없었다. 그자는 오로지 절망과 후회 속에서 죽어야 했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그렇게 만들었다.
니제르가 루베르 육체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면, 테오도르는 루베르 영혼의 숨통을 끊은 것이었다.
‘그러는 너는?’
낮은 목소리가 테오도르의 귓가에 속삭였다.
‘절망하지 않아? 후회하지 않아?’
그럴 리가.
당연히 절망했다. 당연히 후회했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선명히 기억나는 20년 전의 그날이 다시 또 떠올랐다.
한 여자가 달아나고 있었다. 여자의 절뚝거리는 다리에서는 피가 흘렀고, 군데군데 찢어진 옷에서도 피가 배어 나와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많은 피에 테오도르는 수풀에 숨어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아……. 아, 아가야…….’
그러다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우는 듯, 웃는 듯한 표정으로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무서워하지 말렴.’
피를 흘리는 것은 자신이면서도, 여자는 겁먹은 자신을 달래려고 하고 있었다.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 같았다.
‘아가야, 여기 있으면 위험해. 나랑 같이 가자, 응?’
여자는 손을 내밀며 테오도르에게 다가왔다. 내민 손에도 피가 묻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더는 두렵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아주 조심스럽게 수풀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래. 착하지?”
여자는 살짝 미소 지었다. 여전히 두려움에 가득 찬 눈이긴 했지만, 테오도르를 안심시키려 웃고 있었다.
“아!”
찰나의 순간이었다.
여자의 미소가 얼어붙었다. 그리고 여자의 하얀 목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삐죽이 솟은 송곳니가 여자의 목덜미에 박혀 있었다. 희고 날카로운 송곳니의 위로 테오도르의 시선이 올라갔다. 거기에는 붉은 눈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번쩍일 것 같은 무섭도록 붉은 눈이었다.
붉은 눈이 테오도르와 마주친 순간, 테오도르는 그 눈의 주인공을 알아보았다.
“형?”
테오도르의 형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잘생기고,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며,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테오도르가 가장 닮고 싶은 사람.
테오도르의 형 에멘스가, 레나티스의 어머니 벨을 죽였다.
진실은 잔혹하고, 선명한 붉은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