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83
루베르는 말없이 테이블에 놓인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빨간색 벨벳의 주머니는 루베르가 손수 만든 오래되고 낡은 나무 테이블에 비해 터무니없이 고급스러워 보였다.
분명 저 주머니를 열면 그것보다 더 터무니없는 돈이 들어 있으리라.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루베르는 시선을 들어 제 앞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시간이 지났고, 계절이 바뀌었다. 지난번에 보았을 때는 얇은 차림이었던 남자는 이제 두툼한 겨울 옷을 입고 있었다.
“벨이 죽었다고 했어.”
하지만 고압적인 태도나 하찮은 시선은 여전했다. 짧게 제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왜…….”
조금 전에 들은 말이었지만, 벨이 죽었다는 말은 여전히 루베르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찌나 충격이었던지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잘 지내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편지 한 통 받지 못했지만,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만이 할 수 있는 일 때문에 카르오 저택으로 간 부인이 자유롭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이해했다.
그저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생각하며 루베르는 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벨과 자신의 분신인 두 딸을 키우며, 벨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몇 개월 만에 돌아온 것은 벨이 아니라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남자와 돈이 든 주머니였다.
“벨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나?”
대공의 말에 루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했다. 그에게는 설명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믿을 수 없었다.
“아주 간 큰 년이더군.”
이미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매달고 자신을 바라보는 루베르를 보며 니제르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제 말에 얼빠진 촌뜨기 놈이 당황하는 것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약해빠져서 고작 그 정도 죽어버려? 에멘스 놈이 목을 물어뜯어도 살았어야지. 허벅지를 후벼 팠어도, 끈질기게 목숨이 붙어 있었어야지. 제까짓 년이 감히 죽어서 내 계획을 어그러뜨려?’
니제르는 지난달에 있었던 소동을 생각하면,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에멘스는 니제르의 인생에서 꽤 괜찮은 작품이었다. 그럴듯한 외관뿐만이 아니라 똑똑했고, 몸도 잘 썼다.
제법 괜찮은 후계자가 되어 훗날 니제르가 은퇴하게 되었을 때, 완벽한 마무리가 될 재목이었다.
그 빌어먹을 광증만 제대로 컨트롤 된다면 말이다.
“처음에는 얌전히 맡을 일을 잘하는 것 같았지.”
에멘스가 증상을 보이면, 벨을 에멘스가 있는 방에 밀어 넣었다.
다음 날이면 에멘스는 평소와 다름없이 완벽한 모습으로 방에서 걸어 나왔다. 벨은 피투성이로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지만, 그건 딱히 니제르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런데 촌뜨기가 저택 생활을 조금 하다 보니, 눈깔이 돌아버린 모양이야.”
당연히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카르오 가문의 남자들이 대대로 광증을 가진 채 태어난다는 것도, 분홍 머리카락의 여자만이 그 광증을 가라앉힐 수 있다는 것도, 가끔 광증을 가라앉히다가 실패하기도 한다는 것도 비밀이었다.
“감히, 주제를 모르고, 내 아들을 유혹하려고 들었어.”
하지만 니제르는 사실 대신 그럴듯하게 포장된 거짓말을 해줄 생각도 없었다.
그에게 벨은 자신의 계획을 틀어지게 만든 망할 년이었다. 오히려 비참하게 기억되는 벌을 내리고 싶었다.
“그, 그럴 리가요.”
눈앞에 벨의 남편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당연했다. 자신이 아는 벨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건가?”
“아, 아니, 그런 것은 아닙니다.”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는 루베르의 뒤통수를 보며 니제르의 입꼬리가 살짝 꿈틀거렸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머리를 굽히고, 비굴하게 비는 모습은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카르오의 후계자인 내 아들은 당연히 그 유혹에 넘어갈 생각이 없었어. 오히려 매몰차게 그녀를 거절했지. 결국 궁지에 몰린 벨은…….”
니제르는 일부러 말꼬리를 흐렸다. 자신이 생각해낸 결말을 루베르의 눈을 보고 말해주고 싶었다.
“네?”
니제르의 말이 잘 들리지 않자, 루베르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니제르가 원하는 대로 똑바로 눈과 눈을 마주하고 말았다.
“내 아들을 죽이고, 자살했어.”
루베르의 눈이 커졌다. 커진 눈 안에 당황스러움과 놀람, 슬픔, 그리고 의혹이 마구 뒤엉켰다.
니제르는 루베르의 눈동자 안에서 일어난 그 혼란을 매우 재밌게 지켜보았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혼란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루베르는 거의 반사적으로 니제르의 말을 부정하는 말을 내뱉었다.
“내가 왜 너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벨이, 벨이 그럴 리가 없으니까요.”
“그럼 넌 네 부인에 대해서 잘 몰랐던 모양이야. 내 말을 못 믿겠으면, 수도에 와서 네가 직접 알아보던가.”
“진짜 벨이 죽었다면, 벨의 시체는 어디에 있습니까?”
“3층에서 떨어져 머리가 박살 난 시체를 내가 여기까지 끌고 왔어야 한다는 건가?”
“…….”
“넌 죽은 네 부인만 걱정하지, 네 부인의 손에 살해당한 내 아들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는군?”
그래. 에멘스를 죽인 것은 벨이었다.
에멘스가 충분히 벨의 피를 마시기만 했어도, 벨이 죽을 것같은 두려움에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벨이 죽지만 않았어도, 에멘스의 광증은 폭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에멘스를 죽인 것은 벨이었다.
니제르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에멘스를 꿰뚫은 창을 가진 이가 자신의 사병이라는 것도, 그 사병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 자신이라는 것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잘못은 감히 도망치고, 감히 제멋대로 죽어버린 벨에게 있었다.
“저, 저는…… 그게…….”
햇볕 아래에서의 노동으로 새까맣게 그을린 루베르의 안색이 창백하게 되는 것은 퍽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니제르가 보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을 위해서 이 시골까지 그가 직접 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신의 계획을 어그러뜨린 망할 벨의 최후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녀가 지키고 싶었던 것을 똑같이 부서뜨리기 위해서 니제르는 몸소 그녀의 집을 찾아온 것이었다.
“아빠?”
닫혀 있던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아스텔라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제 아버지를 찾았다.
‘그래. 저것도 있었지.’
니제르는 자신이 직접 이곳을 찾은 또 다른 이유를 발견하곤 속으로 웃음 지었다.
자신에게는 스페어가 하나 더 있었다.
비록 에멘스보다는 한참 모자랐지만, 어쨌든 카르오 가문의 대를 끊었다는 오명을 남기지 않을 수는 있는 테오도르가 있었다.
그리고 테오도르를 위한 스페어도 아직 남아 있었다.
“아스텔라. 방에서 얌전히 기다리래도.”
루베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스텔라에게로 다가갔다. 대공에게 뭐라고 해야할 지 몰라 당황스러웠던 터라 실은 아스텔라의 부름이 구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레나가 깬걸요? 으엥으엥 울어요. 아스텔라가 울지 말라고 해도 울어요.”
아스텔라는 또래보다 말이 빠른 편이었다.
아직 발음하기 힘든 동생의 이름은 멋대로 줄여 부르긴 했지만, 제법 또박또박 자신이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밖으로 나온 이유를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방안에서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래. 그래. 레나티스, 착하지?”
루베르는 얼른 방으로 들어가 울고 있는 레나티스를 안아 들었다. 포근한 아기 냄새에도 심하게 뛰는 루베르의 심장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벨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과 벨이 자살했다는 말 중에 어느 것이 더 충격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 그래. 레나티스.”
제 어머니의 죽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기는 쉽게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루베르 역시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아이가 아주 예뻐.”
뒤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루베르는 황급히 뒤를 돌았다. 문간에 카르오 대공이 서 있었다. 자신의 바로 옆에 선 어린 아스텔라를 내려다보며.
“제 어미와 똑같은, 사랑스러운 분홍색 머리카락에 뽀얀 얼굴, 그리고 예쁘장한 것까지 참 닮았어. 안 그래?”
“대, 대공님.”
“그런데 둘째는…… 좀 다르게 생겼군. 머리카락은 제 어미와 똑같지만, 어딘지 모르게 좀 달라. 널 닮은 것 같지는 않고, 제 언니와도 그다지 닮지 않은 것 같고.”
독사와 같은 눈이 루베르가 안은 레나티스를 바라보았다. 조그만 아기쯤은 꿀떡 삼킬 것 같은 눈이었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 루베르 역시 자신이 품에 안은 레나티스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분홍색 머리카락은 벨을 닮았다. 하지만 이 곱슬머리는 대체 누구를 닮은 것일까? 벨도, 자신도 곧은 직모였다.
눈물 고인 눈동자는 벨의 시리도록 맑은 청안과 비슷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연한 물색에 가까웠다.
확실한 것은 자신의 검은 눈동자를 닮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자신의 오뚝한 코를 닮은 아스텔라와는 달리 레나티스의 코는 동그랬다.
‘입은? 입은 누굴 닮은 거지? 벨의 입술이 어땠더라? 귀는? 귀는 동그란가? 내 귀는 어떻지? 귓불이 어떻던가?’
루베르의 머릿속에 미친 듯이 질문들이 솟아났다. 물음표에 가리어 벨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네 부인은 정숙하지 못했어.”
그랬나? 벨이?
“반반한 얼굴과 제법 괜찮은 몸매를 믿고, 가난한 집을 탈출해 인생을 고쳐보려고 했지.”
그래. 좀 이상했다.
그날 그렇게 갑자기 벨이 떠나버린 것은 벨답지 않았다. 이렇게 어린아이를 둘이나 놔두고 돈을 벌겠다고 집을 나간 것은 정말 벨답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내가 벨을 몰랐던 게 아닐까?
“벨이 카르오 저택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아나?”
어느새 다가온 카르오 대공이 루베르의 귓가에 속삭였다. 루베르는 멍하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루베르는 벨이 저택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
“내 아들의 침대에서는 때때로 분홍색 머리카락이 발견되었지.”
쉭. 쉭.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이게 보고 싶었지.’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오로지 절망만이 루베르의 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침내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본 니제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뱃속 한가운데에 파정이라도 한 것처럼 느긋한 만족감이 그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과연 그 아이는 네 아이일까?”
니제르는 마지막으로 루베르를 지옥에 처박을 주문을 외웠다.
홀린 듯 그를 바라보고 있던 루베르가 고개를 떨구고 레나티스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아이는 울고 있었다. 작은 주먹을 꼭 쥐고, 못내 서럽고 억울하다는 듯이 울고 있었다.
‘이 아이는 과연 내 아이일까?’
아기 울음소리가 점점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