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82
화창한 5월이었다. 녹음은 짙었고, 하늘은 푸르렀다.
루베르 그라티아의 인생이 바뀐 날은 그런 아름다운 날이었다.
“그, 그러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아직 몸을 푼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보시다시피 큰 아이도 아직 어려서 엄마가 필요합니다.”
루베르는 당황해서 입도 못 여는 아내를 대신하여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의 아내인 벨은 상냥하고 착한 여자였다. 그리고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기도 했다.
수도에서 왔다는 높으신 분의 앞에서 입도 못 열 터였다.
물론, 루베르 역시 높으신 분에게 말을 거는 것이 무서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남편인 자신이 대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용기를 낸 것이었다.
실제로 벨은 갓난아기인 레나티스를 보듬어 안은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어린아이들을 떼어두고, 자신이 낯선 수도의 저택으로 일하러 갈 수는 없다며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제시한 금액이 적어서 그러는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루베르는 자기 무릎에 앉은 아스텔라를 추켜 올리며 대답했다.
자신의 앞에 앉은 카르오 대공이라는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다.
평생 처음 보는 높은 신분 때문인지, 딱 보기에도 고급스럽고 비싸 보이는 것들을 몸에 둘렀기 때문인지, 고압적인 말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의 눈빛 때문일 수도 있었다.
차마 높으신 분과 얼굴을 마주할 수 없어 똑바로 그의 눈을 쳐다보지는 못했지만, 루베르는 카르오 대공이 얼마나 자신을 하찮게 쳐다보고 있는지는 피부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다만,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엄마가 필요하고…….”
“천만 루나를 더 얹어주지.”
루베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카르오 대공이 말했다. 심지어 그는 이제 끝났다는 듯이 루베르에게 시선을 거두고 벨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카르오 대공이 말한 금액은 충분히 그럴만했다.
그가 처음에 벨이 카르오 저택에서 일하게 된다면 받을 수 있는 1년 보수로 제시한 금액은 5천만 루나였다.
루베르와 벨이 1년 동안 농사를 짓고, 틈틈이 산에서 버섯과 열매를 채집하고, 밤에는 나막신까지 깎아가며 버는 돈이 천만 루나가 될까 말까 한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큰 액수였다.
하지만 루베르와 벨은 그것을 거절하고, 네 식구가 함께 사는 것을 택한 것이었다. 함께 일하고, 함께 웃고, 함께 행복한 것을.
‘6천만 루나…….’
너무도 달콤한 금액이었다. 눈 딱 감고, 벨이 3년만 일한다면 4식구가 풍족하게 살기에 충분한, 유혹적인 금액이었다.
‘하지만…….’
루베르는 제 무릎에 앉은 아스텔라를 바라보았다. 태어날 때부터 순했던 아이는 낯선 손님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얌전히 앉아서 아빠의 손을 만지며 놀고 있었다.
아빠의 품에 있으면 무서울 것은 하나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자 곤히 잠든 둘째 레나티스가 보였다. 언니와는 달리 우렁차게 우는 건강한 아기였다. 하지만 아직은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 아기이기도 했다.
‘벨…….’
루베르의 시선을 느낀 듯, 벨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햇볕에 그을려도 타지 않아 루베르가 늘 신기하게 여기는 뽀얀 피부와 그것보다도 더 신기한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자신의 아내.
하지만 루베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은 흰 피부도, 분홍 머리카락도 아니었다.
항상 자신을 믿음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파란 눈 때문이었고, 자신과 눈이 마주치면 슬며시 짓는 아름다운 미소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착하고 여린 벨을 자신이 지켜줘야겠다고 루베르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청혼한 것이었다. 평생토록 그녀를 지켜줄 수 있도록.
‘그래. 벨과 아이들은 내가 지켜야 해.’
루베르은 큰 금액에 흔들렸던 자신을 반성했다.
자신은 가장이었고, 가족을 지켜야 했다. 뿔뿔이 따로 떨어져서 사는 것은 진정한 가족이라고 할 수 없었다.
“말씀해주신 제안은 정말로 감사합니다만…….”
“딸이 엄마를 닮았군.”
이번에도 루베르의 말은 끝을 마치지 못했다.
카르오 대공은 정작 아이들은 쳐다도 보지 않고, 여전히 벨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루베르는 카르오 대공의 말이 아이들이 벨을 닮아서 예쁘다고 말한 것인줄 알고 그렇게 대답했다.
감히 카르오 대공에게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얀 피부나, 희귀한 분홍 머리카락까지 꼭 닮았어.”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벨의 하얀 얼굴이 더욱 하얗게 되며, 이미 안고 있는 아기를 더욱 자신의 품으로 바싹 당겨 안았다.
마치 카르오 대공이 당장 레나티스를 잡아먹을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아까 말했듯, 지금 카르오 저택에는 분홍 머리의 하녀가 꼭 필요해. 그래서 이렇게 하녀를 고용하는 것치고는 매우 많은 금액을 제시하는 거고.”
벨의 반응을 보며, 카르오 대공이 싱긋 웃었다. 이제껏 그저 하찮은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에서 그제야 생기가 돌았다.
재밌게 가지고 놀 쥐를 발견한 뱀의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잔인한 시선이 아무것도 모르고 제 아버지의 손을 가지고 놀고 있는 아스텔라에 이어 자신의 품에 안긴 어린 레나티스에게 마저 향하자 벨은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제가…….”
벨은 그 얼어붙은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그제야 카르오 대공이 느릿하게 레나티스에서 벨에게로 시선을 옮겨왔다.
뱀과 같은 눈이 아이들이 아니라 자신을 향하게 되자, 그제야 벨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잡아먹히는 것이 나았다. 저 사악한 뱀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딸들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제가 가겠어요.”
벨은 카르오 대공의 시선에서 딸들이 벗어났다는 사실에 용기를 내며 나머지 말을 내뱉었다.
“벨!”
하지만 벨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는 루베르는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루베르.”
하얀 손이 허공을 더듬어 루베르에게 다가왔다.
붙잡은 그 손은 너무나 차가워 항상 따스하게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손과 같은 손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걱정하지 마. 몇 년만 일하면 큰돈이 생기잖아. 그 돈이면 우리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고, 걱정 없이 키울 수 있어.”
눈앞의 대공이 아이들을 해칠 것 같다는 말은 차마 그의 앞에서 할 수 없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저 여자의 직감과 엄마의 보호본능만으로 카르오 대공이 나쁜 짓을 저지를 것 같다고는 더더욱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귀족 모독죄로 벨은 끌려가고 말 것이다.
‘그래. 처음부터 선택지는 없었어.’
루베르가 용감하게 카르오 대공의 제안을 거절하긴 했지만, 거절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벨은 알았다.
영주도 잘 찾지 않는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루베르와는 달리 벨은 제법 큰 도시의 출신이었다.
하지만 분홍색 머리가 마녀라는 사람들의 편견과 부모 없는 고아라는 딱지를 붙인 채 젊은 여자가 도시에 살기란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이런 시골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카르오 대공이 이 집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이미 아무것도 자신들의 뜻대로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벨은 예감했다.
“하지만……!”
“내가 없어도 아이들을 잘 돌봐줄 거지?”
“…….”
“사랑스러운 아스텔라와 귀여운 레나티스를 당신이 잘 키울 수 있지?”
벨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이 당부가 자신의 유언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제발, 루베르.”
그래서 루베르에게 대답을 듣고 싶었다.
아이들을 잘 키울 거라고, 자신이 없어도 사랑하는 딸들은 잘 자랄 거라는 말을.
“그래. 알았어.”
벨의 간절함이 통한 것일까?
갑작스러운 벨의 결정에 당황하고, 화까지 났던 루베르는 끝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자, 이건 선금일세.”
카르오 대공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벨은 두 눈에 가득 고여있던 눈물을 끝내 후드득 떨어뜨렸고, 곤히 자고 있다가 벨의 눈물이 머리에 닿자 깜짝 놀란 레나티스가 눈을 번쩍 떴다.
“레나티스. 내 아가.”
연한 물색의 순진무구한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보자, 벨은 레나티스의 이름을 부르며 아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잠에서 깨어나면 칭얼거리기 마련인 아기도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아는 것처럼 조용했다.
“엄마?”
엄마가 우는 것을 처음 보는 아스텔라는 깜짝 놀라 엄마를 불렀다.
“아스텔라, 사랑하는 내 딸.”
벨은 손을 뻗어 아스텔라의 작은 손을 잡았다.
“레나티스를 잘 부탁한다. 너는 언니니까 동생을 잘 돌봐주겠지?”
“네, 그럴게요. 엄마.”
아스텔라는 울먹이며 그저 작은 머리를 끄덕였다. 어린 그녀는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몰랐다. 엄마와 이별하게 되리라는 것도 몰랐다.
그저 엄마가 우는 것이 슬펐고, 제가 알았다고 하면 엄마가 눈물을 그칠까 봐 그런 것이었다.
“루베르.”
“벨.”
부부는 조용히 눈빛을 교환했다. 눈으로 작별을 하고, 나중에 다시 만나기를, 훗날 다시 만나 행복한 가족이 되기를 약속했다.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