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81
“없다고?”
오르디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자, 방금 대답한 경비대원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수도의 경비대원이 된 지 10년이 넘은 그였지만, 이런 거물이 경비대를 찾은 것은 처음이었다.
무려 카르오 대공가의 사람이라니!
하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 거물이 찾는 범인이 이미 여기에 없다는 것이었다.
“네. 오늘 아침 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보석이라니? 연고도 없고, 돈도 없는 자라서 보석금을 낼 수가 없었을 텐데?”
오르디는 테오도르를 대신해서 경비대원을 채근했다.
“그, 글쎄요? 하지만 분명 오늘 아침 그자의 보석금인 30만 루나와 그자가 무전취식 한 금액에 여관주인이 제시한 합의금까지 더해서 20만 루나까지 내고 풀려났는데요.”
“그럼 보석금을 가지고 온 사람은 누구지?”
“마침 그때부터 제가 근무를 서고 있었긴 합니다만,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웬 남자가 찾아와서 그자에게 돈을 건넸고, 그 돈으로 보석금과 합의금을 내서 풀려났습니다.”
경비대원은 자신이 아는 것을 순순히 털어놓았다.
“일단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루베르의 행방을 파악한 뒤에도 혹시 몰라 계속 감시를 붙여놓고 있었으니, 그자를 찾아 말을 나눠보는 것이 더 빠르겠습니다.”
오르디는 경비대원에게서 더는 얻어낼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테오도르에게 말했다.
“서둘러. 어쩌면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나직하게 말하는 테오도르의 목소리에는 심각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 * *
오르디는 루베르의 행적을 쫓으며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루베르에게 붙여놓은 감시자가 남겨놓은 표식이 틀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길드에서 소개받은 실력자였다.
그렇다고 선두에서 감시자가 남겨놓은 표식을 확인해 일행을 이끄는 인스트가 틀릴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나이에 비해서 뛰어났고, 전장의 경험까지 있는 기사였다.
하지만 지금 루베르가 향하고 있는 곳은 시골로 내려가는 길이 아니었다. 레나티스를 데릴러 직접 가보았던 오르디이기에 그것은 확실했다.
그렇다고 수도에 당도한 관광객이나 여행자가 갈법한 장소도 아니었다.
오히려 루베르는 수도에 사는 사람들도 잘 가지 않을, 북쪽 숲 깊은 곳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좁은 숲길로 들어간 루베르덕분에 일행들도 타고 온 말을 숲 입구에 매어두고, 한 줄로 서서 그를 쫓고 있었다.
‘거기다가 그 동행인이라는 남자가 신경 쓰여.’
무전취식 한, 돈 한 푼 없는, 거기다가 갚을 능력도 없을 루베르였다.
그런 그의 보석금을 선뜻 낸 자라면, 거기다가 이런 외딴곳으로 루베르를 데려가고 있다면,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이 확실했다.
“이쪽입니다.”
감시자가 꺾어 놓은 나뭇가지를 보며 인스트는 왼쪽으로 길을 틀었다.
오르디의 눈에는 다 그 나무가 그 나무 같았지만, 기사인 인스트는 감시자가 남긴 표식을 알아보았다.
‘이런!’
왼쪽 길을 보며 오르디는 탄식했다. 왼쪽 길은 오른쪽 길보다 더 좁은 길이었고, 빽빽한 나무들 덕분에 그늘이 져 음침해 보이기까지 했다.
인스트의 뒤를 묵묵히 따라가는 테오도르를 보며, 오르디는 더욱 마음이 조급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사병을 더 데려왔을 것이다. 아니면 듬직한 하인이라도.
그저 경비대에서 루베르와 대화를 나누리라 생각하고 대공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하면서도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테오도르의 말에 그를 호위할 인스트만 불러 함께 온 것이 후회되었다.
이렇게 뭐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인적 드문 숲으로 올 줄 알았더라면, 결코 이렇게 단출하게 수행원을 꾸리지 않았을 것이다.
‘테오도르 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만약에 일어날 일과 그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는지, 최악의 상황에서는 테오도르를 위해서 몸이라도 던지겠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이 상황과는 아무 상관 없는 동그란 얼굴 하나도 문득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와중에 그 애가 왜……?’
오르디는 쓸데없는 생각을 지워내며 들고 있던 나무 몽둥이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없었다.
“흔적이 끊겼습니다.”
앞쪽에서 인스트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르디는 얼른 앞을 바라보았다.
“놓친 건가?”
“잘 모르겠습니다. 길옆으로 빠진 흔적은 아직 없는 것 같긴 합니다.”
“그럼 일단 길을 따라서 진행해보도록 하지.”
테오도르의 판단에 인스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앞을 향해서 걸었다.
하지만 몇 걸음을 채 가기도 전에, 한 손을 올려 뒤를 따르고 있는 테오도르와 오르디를 멈추게 했다.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감시자의 흔적이 끊긴 것도, 남자의 신음 같은 소리가 난 것도 수상했다. 거기다가 앞이 굽은 길이라 시야가 차단된다는 것이 더욱 거슬렸다.
인스트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검을 뽑아 들었고, 그것을 보며 뒤에 서 있던 테오도르 역시 자신의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누구냐!”
인스트가 앞쪽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그리고 테오도르가 약간의 시차를 두고 인스트의 대각선으로 검을 겨누며 섰다.
오르디 역시 인스트에게 급하게 배운 대로 숲속에서 주운 나무 몽둥이를 제 앞으로 들며 혹시나 모를 뒤쪽을 경계했다.
“치잇!”
인스트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남자의 입에서 낭패감이 실린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테오도르 일행의 출현에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는 재빨리 자신의 검을 두 사람 쪽으로 돌렸다.
“웬 놈이냐? 누굴 해친 것이지?”
“ …….”
남자의 검에 붉은 선혈이 묻은 것을 본 인스트는 남자를 향해서 호령했지만, 남자는 말 없이 피 묻은 검을 사이에 두고 인스트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 사람이 그러고 있는 사이, 테오도르는 그의 뒤쪽에 누워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리고 좀 더러워지긴 했지만, 그 옷차림을 본 적이 있는 것을 기억해냈다.
“…….”
“…….”
“…….”
제 앞에 검을 겨눈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로 경계하며, 타이밍을 재고 있을 뿐이었다.
“위험합니다!”
“!”
“으앗!”
한순간이었다. 남자가 피 묻은 칼을 테오도르를 향해서 날린 것은.
인스트는 테오도르의 앞으로 달려들며, 검을 쳐냈다. 뒤쪽에서 소리를 질렀던 오르디는 인스트가 검을 튕겨내는 것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인스트!”
정작 당사자인 테오도르는 놀란 기색도 없이 남자가 자신에게 검을 날리는 것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가, 그가 정말 자신을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려고 그랬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인스트의 이름을 불러 신호를 보냈다.
“저자를 쫓아!”
“네!”
테오도르의 명령에 인스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망가는 남자를 쫓기 시작했다.
“오르디, 받아.”
“네? 아, 아니, 저기!”
테오도르는 자신의 검을 오르디에게 건넸다. 남자는 도망갔고, 인스트가 그를 쫓고 있기는 하지만, 혹시 그 남자와 한패가 있을지도 몰랐다.
한 번도 검을 잡아 본 적이 없는 오르디는 제 손에 들어온 검에 당황하긴 했지만, 어깨너머로 봐온 인스트를 흉내 내며 주변을 경계했다.
그 사이, 테오도르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으…… 으……. 살려…… 줘…….”
배에 흥건히 피를 묻힌 남자는 테오도르를 보자마자 목숨을 구걸했다.
“…….”
하지만 테오도르는 그에게 그다지 가망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여기는 숲 한복판이었고, 남자의 상처는 깊었다.
남자의 옷을 흠뻑 적시다 못해 바닥으로 스며들고 있는 피가 그것을 증명했다.
“루베르.”
테오도르는 나지막이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누가 널 이렇게 만든 건지 아나?”
“그, 그자야……. 그자가 날 죽이려고 사람을 보낸 거야.”
제 죽음을 드디어 깨달은 것일까?
루베르는 자신의 곁에 앉은 테오도르를 보며 더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대신 유언처럼 자신을 해친 사람을 밝히려고 하고 있었다.
“그자가 누구지?”
“카, 카르오 대공.”
“…….”
이미 짐작했던 이름이었다. 예상과 다르지 않은 결말에 테오도르는 이를 악물었다.
과연 카르오 대공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항상 어쭙잖은 새끼 호랑이를 보는 듯하던 그의 시선이 생각났다.
그의 생각이 옳았다. 자신은 아직 미숙했고, 카르오 대공은 능숙했다.
모든 것이 제 생각보다 한발 빨랐고, 모든 행동이 자신보다 앞서 있었다.
‘카르오 대공…….’
테오도르는 또다시 자신이 한발 늦었다는 생각에 주먹을 꼭 쥐었다. 손톱이 제 살을 파고들었지만, 아프다는 생각 따위는 나지 않았다.
그저 분할 뿐이었다.
“모두…… 모두…… 그 놈 때문이야.”
헐떡거리는 루베르의 목소리에 테오도르의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루베르, 정신 차려! 카르오 대공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지?”
“그자가…… 그자가……!”
“카르오 대공을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
“그래!”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꺼져가던 생명의 불꽃에 기름을 부은 듯, 죽어가는 사람 같지 않게 루베르의 목소리가 커졌다.
“나는 그자를 본 적이 있어. 20년 전에!”
이야기의 시작은 거기서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