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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80화 (80/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80

“아, 아스텔라 언니를요?”

내 입에서 나온 아스텔라 언니의 이름이 이렇게 낯설었을 때가 있었나?

말까지 더듬으며 간신히 테오도르에게 되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테오도르는 아스텔라 언니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 글쎄요.”

나는 나를 쳐다보고 있는 테오도르의 시선을 피하며, 애매하게 말을 돌렸다.

“지금은 언니랑 연락하지 못하고 있어서요. 지난번에 아버지가 찾아오신 것 보셨죠? 그럼 언니는 아직 제 편지를 받지도 못했을걸요?”

“그럼 내가 지금 네 언니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볼 수도 있어.”

“아뇨!”

테오도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거의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내 큰소리에 테오도르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구,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제가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저와 언니는 아버지를 피해서 도망친 것이거든요. 제가 언니가 어딨는지 알게 되면, 아버지가 언니의 위치를 알아버릴 수도 있고, 그럼 언니는 곤란해질 거예요. 테오도르 님도 저희 아버지를 보셨잖아요. 당장 언니를 찾아가서 깽판을 칠걸요?”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다급한 마음에 정리되지 않은 말들을 속사포로 내뱉고 있었다.

어떻게든 테오도르와 언니가 만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차는 다 드신 걸까요?”

테오도르의 찻잔이 빈 것을 보고 나는 물었다.

“차를 더 드릴까요? 아니면 치워드릴까요?”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나는 재차 물었다. 제발 테오도르가 아스텔라 언니에 관한 관심을 거두기를 바랐다.

“레나티스, 진정해.”

테오도르의 그 말에 나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대로 굳었다. 그저 뻣뻣하게 굳어서 테오도르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고장이 난 인형처럼.

“널 곤란하게 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

그렇게 말하는 테오도르의 표정이 오히려 더 곤란해 보였다. 그는 난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네가 싫다면, 네 언니의 소재에 대해서 알아보지 않을게.”

테오도르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순간, 비로소 숨이 내쉬어졌다. 갑갑하게 갇혀 있던 숨이 밖으로 나오자 그제야 경직되어 있던 몸도 풀렸다.

“그러니까, 진정해.”

아주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덫에 걸려 잔뜩 겁먹은 짐승을 치료하기 위해서 달래는 것 같은.

그리고 실제로 테오도르는 손을 뻗어 아주 부드럽게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커다란 손의 온기가 느껴지자 아주 조금 마음이 진정되었다.

“난 네가 언니를 보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어. 넌 언니 이야기를 할 때면 늘 아주 행복해 보였고, 지난번에 가족이 찾아왔다고 했을 때도 언니인 줄 알고 아주 많이 설레했으니까 말이야.”

나는 테오도르가 내 감정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데에 놀랐다.

내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언제나 무심한 표정이었고, 지난번에 아버지가 찾아왔을 때도, 내가 언니인 줄 알고 나 혼자 만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별 고민도 하지 않고 아주 쉽게 승낙했다.

그래서 나는 내 이야기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귀 기울여서 듣고 있는 줄도 몰랐었다.

“저는…….”

나는 어떤 이야기도 쉽게 할 수 없었다. 솔직하게 언니가 보고 싶다고 말할 수도 없었고, 보고 싶지 않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입술만 깨물고 바닥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내가 곤란하게 했다면 미안해. 신경 쓰지 마.”

내 말을 한참 기다리던 테오도르를 마침내 내게 대답을 들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는지 저 혼자 대화를 정리했다.

“차는 다 마셨고, 내어가도 좋아.”

이 대화는 이제 끝이 났고, 모든 것은 괜찮다는 듯이 테오도르는 내 손을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네.”

그 말에 비로소 나는 몸을 움직여 테오도르의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렸다. 제발 테오도르가 그 사실을 알아채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찻잔을 정리하고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휴우…….”

방을 나와서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뱃속 가득 들어차 있던 묵은 숨이 밖으로 빠져나오자 그제야 숨을 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건을 끌고 복도를 지나가는데, 아래층에서 황급히 올라오는 오르디가 보였다. 오르디 역시 날 발견하자 서두르던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안녕하세요, 오르디 님.”

“아, 그래. 오후 티타임이었군.”

오르디는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의외였다. 오르디는 항상 철두철미한 사람으로 보였는데.

“그…… 레나티스?”

“네?”

오르디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내가 대답하자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테오도르 님은 방에 계신 거지?”

“아, 네.”

질문에 대답하긴 했지만, 오르디가 원래 하려던 말은 그 말은 아니었을 것 같았다.

내가 방금 차 시중을 들고 나왔고, 테오도르가 이 복도를 지나간 적이 없으니, 당연히 그가 지금 방에 있으리라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오르디는 그런 당연한 것을 물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

오르디는 고개를 끄덕이곤, 지나가도 좋다는 듯 한쪽으로 비켜섰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내게 말을 하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안 그래도 테오도르가 지금이라도 방에서 불쑥 나와 다시 언니의 일을 묻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불안했던 터라, 나는 오르디를 더 붙잡지 않았다.

내 뒤로 오르디의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 * *

“루베르 그라티아의 소재를 알아냈습니다.”

오르디의 말에 테오도르는 얼른 말하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였다. 저택에서 내쫓긴 지 채 몇 시간이 되지도 않았는데, 레나티스의 부친은 행적이 묘연했다.

그런 그의 소식을 며칠 만에 알아냈다고 하니 당연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루베르 그라티아는 지금 경비대에 붙잡혀있다고 합니다.”

“경비대에?”

뜻밖의 소식에 테오도르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경비대에 붙잡혀 있다면 어디로 도망가지 못할 테고, 사방에 경비대원들이 있으니 안전할 터였다.

카르오 대공이 말한 처리가 어떤 방식의 처리인지는 쉬이 짐작이 가지 않았으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은 분명했다.

돈 혹은 폭력.

“그자가 왜 거기 있는 거지?”

혹여 카르오 대공이 쓴 방법이 폭력이라면, 그래서 그가 지금 경비대의 감옥에 들어가 있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짐작한 테오도르가 물었다.

“죄명은 무전취식이라고 합니다. 그를 신고한 여관에 물어보니, 수도에 당도한 뒤 일단 여관에 짐을 풀고, 식사와 술을 마신 모양이더군요.

아마도 여관비는 레나티스에게 뜯어내서 내려고 했겠지만, 아시다시피 실패했죠. 그래서 여관비를 떼먹고 몰래 도망을 가려다가 붙잡힌 모양입니다.”

“기가 막히는군.”

오르디의 설명에 테오도르는 무슨 그런 대책 없는 자가 있나 싶어서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 치졸한 인간에게 참으로 잘 어울리는 죄명과 처지이다 싶었다.

레나티스에게 돈을 뜯어내고, 협박했을 뿐만 아니라, 때리기까지 한 인간이었다. 더 나쁜 것은 그 짓을 그녀가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는 것이었다.

어린 레나티스가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일해서 번 돈을 착취하고, 그 작고 여린 몸을 때린 것을 생각하면 자면서도 저절로 이가 갈리는 테오도르였다.

그에게 조금의 시간이 있었더라면, 레나티스를 대신하여 그자를 응징했을 것이다.

테오도르는 그자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레나티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말이다.

“수도에는 연고가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으며, 당연히 돈도 없어 보석금을 낼 사람도 없어 일단은 경비대에 계속 붙잡혀 있는 모양입니다. 아마 이 상태가 이어진다면 강제노역형에 처하겠죠.”

조금 전, 복도에서 레나티스를 마주쳤을 때 오르디가 그녀에게 말할까 말까 망설였던 것도 바로 이 소식을 딸인 레나티스에게 전해야 할까 생각해서였다.

그자가 불쌍해서라거나, 딸인 레나티스가 그자의 보석금을 내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네 아버지는 지금 붙잡혀 있어서 이곳에 찾아올 일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 말을 전하지 못한 것은 굳이 아버지의 일을 더 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고민이 있어 보이는 레나티스에게 걱정을 더 하고 싶지 않아서 오르디는 일단은 그녀에게 아버지 일을 말하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그 전에 내가 그자를 좀 만나봐야겠군.”

테오도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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