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79
지금 내 앞에는 두 개의 리본이 있었다.
하나는 예전에 도저히 작아져서 못 입게 된 옷을 잘라 언니가 만들어준 리본이었고, 다른 하나는 테오도르가 선물해준 노란 리본이었다.
평소라면 고민할 것 없는 문제였다. 아니, 애초에 예전 리본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테오도르가 노란 리본을 선물해준 이후로 나는 다른 리본으로 머리를 묶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침이면 일어나 세수를 하고, 거의 습관처럼 노란 리본으로 머리를 묶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
두 개의 리본을 꺼내고, 그중에서 어느 것으로 머리를 묶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야, 자냐?”
뒤쪽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서 자는 거야?”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고 있었던 스기엔이 어느새 일어나 뒤에서 말을 걸고 있었다.
약간 시비조이긴 했지만, 그건 스기엔이 평소와 똑같다는 뜻이었다.
“그냥…… 리본을 고르고 있었어.”
고르고 있었다기보다는 심란해하고 있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지만, 슬라임이 심란이라는 단어를 알까 모르겠다.
“그게 고민할 거리가 돼?”
스기엔은 아침부터 발랄하게 통통 튀어 올라 내 쪽으로 왔다. 거기다가 마지막에는 아주 힘껏 뛰어올라 내 어깨 위에 올라왔다.
거의 내 머리만 한 사이즈의 스기엔이 어깨 위에 앉자 묵직함이 느껴졌다.
“당연히 왼쪽이지!”
스기엔이 말한 왼쪽에는 노란 리본이 놓여있었다.
“야! 오른쪽 건 완전히 낡은 데다가 색깔도 구닥다리 시퍼런 색이잖아. 대체 저런 리본을 누가 달고 다녀?”
“우리 언니가 만들어준 건데.”
“……내 말은 파란 리본은 매우 빈티지한 색상이라 소화하기가 쉽지 않은 색상이라는 거지.”
스기엔은 재빨리 말을 바꿨지만, 그다지 설득력 있는 말 바꿈은 아니었다.
누가 봐도 파란 리본은 낡았고, 스기엔의 말대로 나한테 파란색은 그리 어울리는 색상은 아니었다.
거기에 비해 노란 리본은 나한테 잘 어울리는 색상인데다가 아직 새것이었다. 고르라고 한다면 당연히 노란 리본이었고, 나 역시 항상 노란 리본을 골랐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선뜻 손이 그쪽으로 가지 않았다.
‘약혼이라…….’
어제부터 내 머릿속을 맴돌던 단어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테오도르가 약혼하게 되면, 약혼자가 생기게 되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테오도르의 광증을 치료하고, 저택의 하녀인 것은 변함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건 내가 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외의 것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다.
“네가 귀여운 것, 너도 알고 있냐고.”
그런 말을 다시 들을 수 있는 걸까?
“눈은 어떻게 생겼는지, 코는 어떻게 생겼는지, 입술은 또 어떤지. 하나하나 훔쳐보고, 내 눈에 새기고, 내 머리에 그리고 있어.”
그런 말을 다시 들으면 안 되는 것 아닐까?
“레나티스.”
테오도르가 내 이름을 다시 그렇게 부르는 것을 들을 수 있을까?
“야.”
스기엔이 다시 나를 불렀다.
“야, 우냐?”
어느새 바닥으로 내려간 스기엔이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니.”
“우는 것 같은데?”
“아니거든?”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맞는 거 같은데?”
“아니라니까!”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
“…….”
소리를 지른 나도 깜짝 놀라서 입을 다물어 버렸고, 처음으로 나에게 큰 소리를 들은 스기엔도 놀란 눈을 끔벅이고 있었다.
그런 스기엔을 보자 미안함이 와락 밀려왔다. 스기엔에게 짜증 낼 일이 아니었는데…….
“저기…….”
“야.”
내가 사과의 말을 하기 전에 스기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울지 마.”
아까처럼 놀리는 기색도 평소처럼 툴툴거리는 말투도 아닌, 핑크빛 슬라임에게 어울리지 않을 진지한 목소리와 말투였다.
당연히 화를 낼 거로 생각했다. 스기엔은 평소와 다름없이 장난을 친 건데, 평소와 다르게 화를 낸 것은 나였으니까.
하지만 뜻밖에도 스기엔은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내게 울지 말라고 말했다.
“안 울었는데…….”
“‘아직 안 울었는데’겠지.”
스기엔은 안 봐도 뻔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울 정도 고민이면, 그냥 노란 리본으로 해.”
스기엔은 노란 리본 옆에 튀어 올라앉으며 말했다.
“이게 더 너한테 어울려.”
확신에 찬 목소리로 스기엔이 말했다.
“그게 더 어울리는 건 나도 알아. 다만…….”
“다만?”
“…….”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애먼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리본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이 리본을 선물해준 사람이 문제였다.
“다시 한번 말한다.”
스기엔의 목소리에 어느새 바닥으로 떨궈졌던 고개를 들었다.
“노란 리본이 예뻐.”
스기엔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레나티스.”
* * *
어색한 침묵이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은근한 기름 냄새도, 테오도르의 실없는 농담도, 꼿꼿하게 앉아 있는 것이 힘들어 나도 모르게 자꾸만 나왔던 질문들도, 언제 그런 것이 이 방에 있었냐는 듯이 존재하지 않았다.
“…….”
“…….”
나는 그저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고, 테오도르도 다리를 꼬고 앉아서 책만 쳐다보고 있었다.
힐끗거리는 테오도르의 시선이 내게 닿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모른 척하고 있었다.
자꾸 머리의 리본이 신경 쓰였다.
‘이 리본을 달지 말 걸 그랬어.’
나는 스기엔의 말을 따라, 노란 리본으로 머리를 묶었다.
분명 평소에는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던 가벼운 리본이 자꾸만 내 머리를 짓누르는 느낌 때문에 그 리본으로 묶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언해준 스기엔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스기엔은 날 위해서 조언해준 것이었고, 선택은 내가 한 것이니까.
“레나티스.”
결국, 계속 나를 힐끗거리며 쳐다보고 있던 테오도르가 내 이름을 부르고야 말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뇨.”
무슨 일은 없었다. 적어도, 내게는 없었다.
어쩌면 그게 문제였다. 테오도르에게는 약혼이라는 일이 있는데, 나에게는 없다는 것이었다.
‘테오도르 님, 약혼하시나요?’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어느 분과 하시나요?’
말한다 한들, 내가 알까? 적어도 지난번 그 영애처럼 나쁜 사람이 아니기를 바라야 할까?
‘약혼 축하드려요.’
과연 내가 그 말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내가 제일 묻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제게 했던 말들과 키스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이었나요?’
내가 테오도르에게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었다.
우리의 대화와 키스와 시간은 전부 나 혼자에게만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냐고, 우리가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냐고.
“그럼 내가 너에게 말해도 될까?”
테오도르의 말에 갑자기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그제야 알았다. 테오도르가 진짜 약혼하는 것인지 궁금하긴 했지만, 나는 그걸 그의 입으로 듣고 싶지는 않았다.
“네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돼.”
내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테오도르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내게 다시 말했다.
그의 말에서 테오도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게서 대답을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뭘 물어보시려는 건데요?”
적어도 그가 하려는 말이 약혼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에 조금 마음을 놓으며 테오도르에게 물었다.
“네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야.”
하지만 테오도르의 입에서 나온 주제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가 왜 갑자기 내 부모님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거지?
“네 아버지는 친아버지가 확실한 건가?”
“그건 왜 물으세요?”
“그냥, 지난번에 봤을 때 아무래도 너랑 닮은 구석이 없어 보여서 말이야.”
“지난번에 저희 아버지가 한 말 때문에 그러신다면, 불행하게도 그건 그냥 아버지가 화가 나서 뱉은 말일 거예요. 아버지 성미는 제가 아는데 만약 제가 친딸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내다 버렸을 거예요.”
“지난번에 어머니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 그럼 혹시 남아 있는 초상화 같은 것은 없어?”
“평범한 평민 여자가 왜 초상화를 그리겠어요? 그 돈이면 몇 달 치 먹을 식량을 사겠죠.”
“어머니의 생김새 같은 건 전혀 기억나지 않아?”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럼, 그 언니라는 사람은?”
“네?”
“네 언니 말이야. 아스텔라라고 했던가?”
테오도르의 입에서 아스텔라 언니의 이름이 나온 순간, 나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입술에서 ‘아스텔라’라는 단어가 나온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소설 속에서 본 ‘테오도르’가 ‘아스텔라’의 입술에 키스하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침실에서, 감옥에서, 서재에서, 욕조에서, 수없이 불렀던 이름이었으니까.
“언니……도 잘 모를 거예요.”
변명처럼 부정하는 내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하지만 언니는 너보다 나이가 좀 더 많고, 어머니랑 보낸 시간도 더 길 테니 기억할 수도 있지 않아?”
“언니도 어려서 잘 기억나지 않을 거예요. 저더러 엄마와 많이 닮았다고 했지만, 제 생각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거든요. 거기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듣기론 어머니의 눈동자 색은 파란색이었다고 해요. 저는 그것보다 훨씬 연한 하늘색에 가깝잖아요. 오히려 언니가 더 닮았을 거예요. 언니는…… 눈동자가…… 파란색이거든요.”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깨닫고는 천천히 말이 늦어졌다. 테오도르에게서 언니를 떼어놓는 것이 나의 첫 번째 목표였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나서서 언니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래?”
심지어 내가 한 말에 테오도르는 언니에게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그럼 혹시, 내가 네 언니를 만나볼 수 있을까?”
그리고 테오도르의 입에서 내가 가장 우려하던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레나티스. 네 언니를 만나보고 싶어.”
고개를 들자,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테오도르가 보였다.
그는 진심으로 아스텔라 언니를 만나고 싶어 했다.
자신의 아름다운 여자 주인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