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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78화 (78/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78

카르오 저택 본채에서 가장 햇볕이 잘 들고, 가장 정원의 경치가 아름답게 보이는 곳에 자리한 것은 카르오 대공의 집무실이었다.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볕이 들었고, 창문 너머로 꽃이 활짝 핀 정원이 보이는 경관은 참으로 화사했다.

하지만 그 집무실에 마주 보고 있는 두 남자 사이의 분위기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최근에 저를 자주 찾으시는군요.”

“그랬던가?”

“네. 지난 일 년보다 최근 한 달 사이에 대공님의 얼굴을 더 자주 뵌듯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리 반가운 얼굴은 아니구나.”

“제가 할 말을 대공께서 대신해주시는군요.”

서로 얼굴 보기 싫은 것은 피차 마찬가지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로 얼굴 볼 일이 없는 것이 두 사람에게 가장 나은 상황이라는 것이 옳았다.

“네 약혼녀는 아르보 백작 가의 차녀로 정했다.”

명백한 통보에 테오도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어떠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아버지가 마음대로 일을 추진할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지난번에 말한 대로 그가 말한 영애들이 누군지도 몰랐다.

자신의 약혼자 후보들을 들은 뒤에도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전혀 관심 밖이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테오도르의 관심 안에 있는 것은 오직 레나티스뿐이었다.

‘방심했어.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는데.’

니제르가 얼마나 자기 잇속을 챙기는 사람인지 알기에, 테오도르는 그가 좀 더 상황을 재어볼 줄 알았다.

어느 영애가 가장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지, 혹은 어느 가문이 자신에게 가장 충성을 맹세할는지 말이다.

하지만 이미 많은 권력을 가진 카르오 대공께서는 그야말로 그 누구라도 상관없었던 모양이었다.

겉으로 그럴듯하게 후계자가 약혼하고, 결혼하고, 대가 끊기지 않게 후계자만 낳는다면 말이다.

“제가 싫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테오도르는 치미는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그것은 제멋대로 자신을 휘두르는 아버지에 대한 화였고, 제 아버지가 얼마나 제멋대로인 인간인 줄 알면서 방심하고 있던 자신에 대한 화였다.

“싫어도 네 할 일은 해야지. 어떻게 사람이 저 좋은 일만 하고 살 수 있겠느냐?”

마치 아들에게 크나큰 인생의 교훈이라도 주는 양, 엄하면서도 인자한 목소리로 니제르가 말하자 테오도르는 꾹꾹 눌렀던 화가 더욱 강하게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대공께선…….”

테오도르가 니제르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집무실의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테오도르는 말을 하려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멈추고 그쪽으로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에 걸린 것은 이 어두운 서재에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카르오 대공비였다.

“이런! 제가 좀 늦었나 봅니다.”

그녀는 앉아 있는 자신의 남편과 아들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는 척을 했다.

과장된 그 표정에서 니제르와 테오도르는 지금 델마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델마 역시도 그 두 사람이 자신의 출현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족의 중요한 경사를 의논하는 자리인데, 제가 빠져서는 안 되지요.”

하지만 델마는 개의치 않고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가 소파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의논?”

니제르는 델마가 한 말의 말꼬리를 잡았다.

“언제부터 내가 가문의 일에 당신과 의논을 해야 했지?”

“가문의 일이기도 하지만, 제 며느리가 될 사람을 뽑는 일이잖아요. 제가 매일매일 얼굴을 맞대고 봐야 하는.”

“웃기는 일이군. 제 아들 얼굴도 일 년에 한두 번도 볼까 말까면서, 며느리는 매일 얼굴을 볼 거라고 말하는 건가?”

“적어도 일 년의 몇 번은 봐야 하는 사람인데,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면 그 일이 얼마나 곤욕이겠어요?”

“마치 지금은 곤욕을 치르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는군?”

“그럼요. 결혼 전에 아주 중요한 결점 사유를 말해주지 않는 남편 덕분에 제가 아주 곤욕을 치르고 있지요.”

그 결점 사유라는 것이 카르오 가문이 대대로 광증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라는 걸 이 자리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델마가 말하는 결점 그 자체인 테오도르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그렇게 결점이었다면, 이혼을 청하지 그래.”

하지만 이 자리에 그것을 쉬쉬하는 사람은 없었다. 니제르는 코웃음을 치며 델마에게 말했고, 델마는 이를 앙다물고 니제르를 노려보았다.

델마가 결코 대공비 자리를 포기할 리 없다는 것을 델마도, 니제르도 알았다. 그리고 그건 테오도르도 마찬가지였다.

우습게도 서로를 싫어하는 세 사람은 그런 점만은 똑 닮아 있었다. 재빠른 상황 파악과 눈치 빠름, 그리고 깔끔하게 상대방을 무시하는 것까지.

“제가 이혼녀가 될 용기는 없지만, 저와 똑같은 처지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을 구할 수는 있지 않겠어요?”

“구한다고? 어떻게? 자신의 생생한 체험담이라도 전할 텐가?”

“어쩌면요.”

“지금 그 발언이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지 충분히 고려한 것이라 믿어.”

이제까지는 이죽거리며 델마를 놀리는 듯했던 니제르의 표정과 눈빛이 변했다.

그는 순식간에 표정을 없애고, 대신 싸늘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델마를 노려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니제르였다.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부귀영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사람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제 아내를 처치하는 일 같은.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자, 바로 그 아내인 델마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 그런 일은 없어요.”

델마는 니제르의 눈빛을 피하며 결국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제 꼬리를 문 이리와 같은 형상인 카르오였지만, 결국 누가 꼬리이고 누가 이빨인지는 정해져 있었다.

아프긴 하겠지만, 꼬리가 잘린다 해도 이리는 살아갈 수 있었다.

“훗!”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테오도르의 입에서 실소가 나오고야 말았다.

“두 분께서 이렇게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시니, 참으로 결혼에 대한 욕구가 솟아오르는군요. 대공께서 정하신 제 아내와 두 분처럼 물고, 뜯고, 싸울 생각을 하니 참으로 가슴 한쪽이 훈훈해집니다.”

테오도르의 비웃음 섞인 말에 니제르의 차가운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조금 전, 테오도르와 둘만 있을 때는 그럭저럭 그의 빈정거림을 수용할 만큼 여유가 있었던 니제르였다.

그래봤자 쥐를 잡아먹기 전에 장난을 치는 고양이의 마음 정도의 여유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델마가 자신의 예민한 곳을 들쑤신 덕분에 지금은 그마저도 없었다.

“지난번에 말한 그 마음에 둔 사람 때문이냐?”

니제르는 인상을 찌푸리며 테오도르에게 물었다.

“네가 원하면 그 아가씨도 네 약혼자 후보에 넣어주마. 어느 가문의 영애냐?”

하지만 테오도르는 그 질문을 싸늘하게 무시했다. 그가 레나티스에 대해서 언급을 하는 것 자체가 기분이 나빴다.

“제가 원하는 건, 절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겁니다. 이제까지 별채어 저를 버려두신 것처럼 말입니다.”

테오도르는 더는 할 말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오도르.”

니제르는 낮은 목소리로 테오도르를 불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테오도르를 붙잡을 수 없었다.

* * *

“마음에 둔 사람…….”

델마는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 니제르가 한 말을 곱씹었다.

“테오도르가 마음에 둔 사람…….”

니제르가 별채에 사람을 보내 테오도르를 불렀다는 말을 전해 듣고, 서둘러 집무실로 간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리고 정작 그 말을 내뱉은 니제르는 그게 누구인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델마는 어렴풋이 그게 누구인지 알 것도 같았다.

세상 무슨 일에도 무심한 것 같았던 테오도르가 갑자기 손을 써서 한 영애를 수도원에 보내버린 일을 두고 델마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거기다가 테오도르가 분홍 머리 마녀를 데리고 상점가를 두 번이나 방문했다는 것도 델마는 알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대공비 님. 제가 테오도르 님을 꼭 낫게 해드릴게요.”

델마의 머릿속에 해맑은 얼굴로 웃으며 테오도르에 대해서 말하던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의혹이 피어오르긴 했지만, 설마 싶었다.

델마의 눈에 레나티스는 얼굴이나 몸매는 좀 봐줄 만했지만, 너무 철없는 어린애인데다가,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해 사람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무식한 평민이었다.

델마가 몇 번이나 자신을 위해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말했건만, 도통 말귀를 알아먹지 못하는 멍청한 계집애였다.

그녀의 상식에서는 그런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그녀가 테오도르를 싫어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아이 외에는 짐작 가는 게 없는데…….”

델마는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미학이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상황으로 보면 그 분홍 머리 하녀 외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하긴, 제정신이 아니니 여자 보는 눈도 정상은 아니겠지.”

결국, 델마는 테오도르가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가 분홍 머리 하녀라는 결론을 내렸다.

“차라리 잘됐어.”

델마는 싱긋 웃었다. 드디어 그녀가 염원하던 소원을 이룰 기회가 찾아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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