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77
나는 해명을 바라며 이 그림의 창작자이자, 내가 움직일 때마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던 깐깐한 예술가를 바라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캔버스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은 한 여인의 초상화가 아니라 붉은색과 초록색 그리고 그 둘이 합해진 검붉은색의 물감들이 여기저기에 칠해져 있었다.
“확실히 아무도 저인 줄 모르겠어요. 아니, 사람인 줄도 모를 것 같은데요.”
“추상화야.”
“네?”
“너의 내면을 추상적으로 형상화 시킨 그림이지.”
“…….”
테오도르의 설명에도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내면이 이렇게 먹다 만 시금치 수프에 으깬 토마토를 뒤죽박죽으로 섞어놓은 느낌이라는 건가? 그것도 깜깜한 밤의 야식으로 말이지?
“제 내면이…… 이런 색인가요?”
나는 해명을 바라며 더욱 빤히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아니. 사실은 멀쩡한 물감이 이것밖에 없었어. 하도 오래돼서 말라비틀어졌더군.”
“언제 그림을 마지막으로 그리셨는데요?”
“다섯 살.”
“…….”
“별로 재능이 없다더군.”
그리고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이런 걸 그리는데, 왜 모델이 필요한 거예요?”
“필요 없지.”
너무 깔끔해서 나는 또 한 번 할 말을 잃었다.
“사실 난 널 대놓고 훔쳐보고 싶은 거뿐이었거든.”
그렇게 말하고 테오도르가 또 웃었다.
못내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다는 듯이.
그런 테오도르를 보며 나도 결국 웃고 말았다.
* * *
테오도르가 그린 그림은 내 반대에도 불구하고 응접실에 걸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굳이 그림 그 자체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테오도르의 말은 옳았다.
“레나티스, 레나티스, 그 소문 들었어?”
저녁 식사가 담긴 그릇을 들고 내 옆에 앉자마자 클레어가 말했다. 제법 큰 목소리에 식탁에 앉아 있던 다른 고용인이 우리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무슨 소문?”
“응접실에 새로 걸린 그림말이야. 그거 엄청나게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이래!”
클레어가 호들갑스럽게 전하는 말에서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그 이상한 빨간색과 초록색이 들어간 그림은 어느새 유명화가가 그린 그림이 되어 있었고, 자연스럽게 아주 비싼 그림이 되어 있었고, 아주 예술적인 작품이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오르디가 그림을 걸며, 청소 담당 하인들에게 각별히 주의해서 청소하라는 당부가 그렇게 와전이 된 듯했다.
“응. 나도 들었어.”
나는 클레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가 내가 듣기론 화가가 엄청나게 잘생겼대.”
심지어 내가 소문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정말? 그럼 넌 화가가 누군지 아는 거야?”
“누군지는 잘 모르지만, 그냥 잘 생겼다고만 들었어.”
“와아! 저렇게 예술적인 그림을 그리는데 얼굴까지 잘생겼다니, 정말 완벽한 사람인가 봐!”
“저기, 클레어? 그 그림의 어디가 예술적인 건지 알아?”
이건 정말 순수한 의문이었다.
“아니.”
그리고 클레어의 답변도 순수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솔직하게 모른다고 실토했다.
“그냥 유명하고 잘생긴 작가의 비싼 그림이라기에 대단한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했지. 아주 대단하다고 말이야.”
“그래. 대단한 작가의 대단한 작품이지.”
아주 여러모로 말이지.
“아! 그럼 이 소문은 들었어?”
“또 무슨 소문이 있어?”
그래봤자 별일은 아닐 것 같았다. 기껏해야 마손 아저씨와 소피 언니라는 사람이 결혼한다는 이야기나 헤어졌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드디어 약혼하시는 모양이야!”
아아~ 역시.
“그렇구나.”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토마토를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마손 아저씨와 소피 언니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뭐야, 이 이야기도 알고 있었어?”
“아니. 몰랐어.”
“그런데 왜 그렇게 시큰둥해?”
“그야, 잘 모르는 사람의 결혼은 남의 일 같아서.”
“아직 결혼하시는 건 아니지만, 약혼한다면 곧 그렇게 되시긴 하겠지?”
“그렇겠지.”
클레어의 말에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손 아저씨라는 분이 대체 연세가 어떻게 되길래 클레어가 자리에도 없는 사람에게 저렇게 꼬박꼬박 존대를 하는 건지는 좀 궁금했다.
“신부는 누굴까? 뭐, 들어봤자 얼굴도 모르는 분이시긴 하겠지만 그래도 궁금해!”
“뭐? 얼굴도 모른다고? 너 그 소피 언니라는 사람이랑 친한 것처럼 이야기했잖아?”
“응? 소피 언니? 여기서 소피 언니 이야기가 왜 나와? 으어어억? 테오도르 님이랑 약혼한다는 사람이 소피 언니야? 갑자기? 그게 무슨 막장 로맨스 소설 같은 소리야?”
“뭐? 테오도르 님? 테오도르 님이 여기서 왜 나와? 소피 언니라는 사람이랑 마손 아저씨라는 분이랑 결혼…… 하시는 것 아니야?”
서로 당황스러워하는 상대방 덕분에 클레어와 나는 더욱 당황했다.
“클레어 네가 말한 약혼 한다는 사람이…….”
“테오도르 님이었어.”
“테오도르 님이…… 약혼을 한다고?”
그리고 클레어의 정확한 말을 들은 나는 앞보다 더욱 당황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한테는 그런 말씀 없으셨는데…….”
“누가? 테오도르 님이?”
클레어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렸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도르 님이 왜 너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겠어?”
“응?”
고개를 들어 클레어를 바라보자, 클레어는 내가 방금 한 말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테오도르 님의 차 시중 담당이고, 바로 옆방에 널 둘 만큼 각별하게 예뻐하신다는 건 알지만, 넌 하녀잖아. 테오도르 님이 왜 너에게 자신의 약혼이나 결혼 이야기를 하시겠어?”
테오도르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클레어가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었다. 사실은 클레어의 말이 당연하였다.
“그래. 맞아.”
토해내고 싶은 쓰디쓴 침을 삼켰다.
“테오도르 님은 귀족이고, 나는 하녀지.”
잠시 잊고 있었던 진실이었다. 테오도르가 남주라는 사실보다, 내가 그의 광증을 치료하는 마녀라는 사실보다, 더 현실적인 진실은 그것이었다.
원래 진실은 쓴 법이었다.
* * *
“어?”
언제나처럼 테오도르 님의 차 시중 준비를 위해서 1층으로 내려갔다가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왜건을 보고 당황했다.
원래라면 리타 아주머니가 오늘 날씨나 테오도르의 컨디션을 고려한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처음에는 내가 시간을 잘못 안 것일까 생각했지만, 오늘 길에 점심 설거지까지 끝내고 쉬는 주방 담당들을 봤기 때문에 그건 아니었다.
‘혹시 리타 아주머니가 아프시기라도 하신 걸까? 하지만 아프시더라도 준비는 확실하게 해놓으실 분이신데…….’
알게 된 지 몇 개월이 되지는 않았지만, 내가 본 리타 아주머니는 그랬다.
“아, 레나티스.”
뒤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다행히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의 리타 아주머니가 보였다.
“앗! 아주머니! 어디 아프신 건가 하고 걱정했어요.”
“테오도르 님의 차 시중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말이지?”
리타 아주머니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 말했다.
“오늘은 테오도르 님의 차 시중을 들지 않아도 된단다. 테오도르 님은 조금 전에 본채에 가셨어. 빨리 돌아오셔서 차를 드시겠다고 하시면 준비를 해주도록 하마.”
“본채에요?”
테오도르가 본채에 갔다는 말은 이상할 필요가 없었다.
테오도르는 카르오 대공 가의 후계자였다. 그런 테오도르를 부를 만한 사람은 대공이나 대공비밖에 없었다.
그러니 테오도르는 부모의 부름에 부모님이 사시는 본채로 간 것이었다.
무엇 하나 이상할 것 없는 말이었고,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내 귀에는 불길하게 들렸다.
“본채에는 무슨 일로 가셨어요?”
조심스럽게 묻는 내 목소리는 약간 떨렸다.
“글쎄다.”
리타 아주머니는 자기도 잘 모른다는 듯이 말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는 어느 정도는 상황을 알고 있다는 표정이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일개 하녀인 클레어도 알 정도의 일을 별채의 하녀장인 리타 아주머니가 모를 리 없었다.
오히려 리타 아주머니는 클레어가 알기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테오도르가 약혼한다는 사실을.
차 시중 준비를 해주며, 테오도르가 혼자 먹기에는 많은 다과를 챙겨주거나, 가끔은 테오도르가 먹지 않을 법한 단 것을 챙겨주는 것을 보면 그녀는 나와 테오도르의 관계를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내 질문에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표정과 내가 딱하다는 눈빛을 동시에 하는 것이겠지.
‘어쩌면, 테오도르도 알고 있었을는지 몰라.’
그럴 것이다. 자신의 약혼인데 테오도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나와 키스하기 전부터. 아니, 그것보다도 더 오래전부터였는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나타나기 전. 아니면 내게 키스 마크를 새기기 전.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
“어쨌든 그렇게 되었으니, 오늘은 차 시중을 들지 않고 쉬어도 된단다. 혹시 테오도르 님이 차를 마신다고 하시면, 내가 부르마.”
“네, 리타 부인.”
나는 힘없이 뒤돌아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