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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76화 (76/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76

차 시중을 들기 위해서 방에 들어서자 오늘도 기름 냄새가 나를 반겼다.

‘어제 그림을 제대로 그리긴 했나 모르겠네.’

내 생각엔 그림을 그린 시간보다 키스하고 있던 시간이 더 길었던 것같…….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얼굴이 화끈해졌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짓말을 하고, 무슨 정신으로 테오도르와 그렇게 길게 키스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테오도르는 피폐물의 남주니까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나는 그냥 일반인인데!

“안녕하세요, 테오도르 님.”

“응.”

테오도르는 나를 보자 붓질을 하고 있던 손을 멈췄다. 언제부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인지, 그의 손에 언뜻 초록색 물감이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내 눈에는 그게 쓸데없이 섹시해 보였다.

“오늘도 그림을 그려야 하나요?”

“응. 조금 더 하면 완성될 것 같아.”

“그럼 차를 먼저 마시는 게 어떨까요?”

나는 얼른 찻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말했다. 어제 딴짓을 하느라 물이 다 식어버리는 바람에 준비해온 차를 마시지 못했었다.

고스란히 되돌아온 차와 다과를 보며 리타 부인이 의아해하며 테오도르 님이 차를 거절하신 거냐며, 컨디션이 혹시 좋지 않아 보이더냐며 물어보셔서 둘러대느라 혼났었다.

컨디션이 너무 과하게 좋아서 못 드셨다고는 말을 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오늘은 페퍼민트를 준비했어요. 얼마 전에 뒤뜰에 핀 페퍼민트 꽃을 따다가 말린 차라서 향이 아주 좋아요.”

“네가 직접?”

“네.”

“그래?”

테오도르는 옆에 있던 젖은 수건에 손을 쓱쓱 닦아내곤 소파로 다가왔다. 그가 다가오자 은근한 기름 냄새가 더욱 진하게 났다.

“그리고 아몬드 쿠키를 준비했어요. 리타 부인께서 테오도르 님이 과자류를 좋아하시지 않지만, 아몬드 쿠키는 달지 않고 고소해서 테오도르 님이 잘 드신다고 하시면서 챙겨주셨어요.”

평소 티타임의 다과는 거의 크래커나 많이 달지 않은 과일, 혹은 약간의 견과류였다.

오늘은 드물게 쿠키가 나와서 리타 부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부인께서 웃으며 대답해주셨다.

“맞아.”

테오도르는 쿠키를 하나 집어서 입으로 가져가며 대답했다.

“먹어봐. 맛있어.”

그리고 내게도 아몬드 쿠키를 권했다.

분명 맛있어 보이기는 했지만, 내가 이걸 먹어도 되나 싶어서 아주 살짝 눈치를 보자 테오도르는 다시 한번 고갯짓으로 어서 먹어보라는 동작을 취했다.

그럼 어디?

……오!

테오도르의 말대로 아몬드 쿠키는 맛있었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테오도르도 잘 먹을 만큼 쿠키는 과하게 달지 않았고, 안에 콕콕 박힌 아몬드가 씹혀서 오히려 고소함이 더했다.

“맛있어요!”

나는 테오도르에게 내가 느낀 감상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그러자 테오도르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잘생긴 미남자가 웃는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안면근육이 풀리며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덕분에 우리는 마주 보고 웃는 모양새가 되었다.

공기 중에는 희미한 기름 냄새가 떠다니고, 입안에는 달콤하고 고소한 맛이 가득했다. 그리고 눈앞에는 테오도르가 웃고 있었다.

저절로 미소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게 행복이라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니가 침대맡에서 잠들기 전에 이야기해주었던 옛날이야기의 결말에 나오는 말들.

그리하여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거기서 말하는 행복이라는 것이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서, 너무 좋아서, 웃음이 저절로 나오는 이런 순간을.

“오늘은 초록색을 칠하셨네요?”

“아아~. 그래, 맞아.”

아직 테오도르의 손등에 남아 있는 물감을 보며 내가 말했다. 그러자 테오도르도 자신의 손등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 속에 제가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있나요?”

설마 머리카락이 초록색일 리는 없을 것 같아서 물었다. 그럼 어제 보았던 붉은 색이 내 머리카락 색인 걸까?

“뭐, 비슷하지.”

“그럼 머리카락이 붉은색이고요?”

내친김에 속으로 생각하던 것을 묻자,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아니고 부정하는 것도 아닌 묘한 몸짓을 취했다.

“붉은색 머리카락도 괜찮겠네요. 상상은 안 되지만요.”

혹시 내가 붉은 머리카락을 싫어할까 봐 저런 애매한 몸짓을 취하는 것인가 싶어서 나는 얼른 덧붙였다.

“보통은 머리카락이 분홍색인 게 상상이 안 될 텐데, 넌 반대로 분홍색 머리카락이 아닌 게 상상이 안 되는군.”

또 다. 테오도르가 웃었다.

그리고 또 잘생겼다.

“왜?”

내가 테오도르를 빤히 쳐다보고 있자, 그가 웃는 것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아깝다! 너무 빤히 쳐다보지 말걸! 그러면 테오도르가 웃는 것을 더 볼 수 있었을 텐데.

“아, 아뇨.”

나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사실, 오르디 님이 말해주기 전까지 제 머리카락이 특이한 것인지도 모르고 살았어요.”

그리고 내가 테오도르의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아무 말이나 꺼냈다.

얼굴을 밝히는 여자로 비치고 싶지 않았다.

내 취향이 아닌 테오도르의 얼굴에 홀린 것을 보면 얼굴을 밝히는 건 맞는 것 같지만, 그걸 굳이 본인에게 들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래? 제국뿐만이 아니라 대륙에서도 희귀한 머리카락일 텐데?”

“그렇다고 듣긴 했는데, 저희 마을에서는 그렇게 희귀한 취급을 받지 않았거든요. 50명 남짓한 작은 마을에서 이 머리카락인 사람이 셋이나 되었으니까요.”

“세 명이나?”

“네. 저랑 언니,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요.”

나는 하나하나 손을 꼽아가며 테오도르에게 말했다.

“돌아가신 어머니도 머리카락이 분홍색이었나?”

“네. 그래서 아마 이 머리카락은 어머니의 머리카락 색을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그럼 혹시 얼굴도 어머니를 닮은 건가? 전에 보니 아버지와는 전혀 닮지 않은 것 같은데?”

“글쎄요. 저도 어머니를 본 적은 없어서 그건 잘 모르겠어요. 언니는 저더러 분명히 어머니를 닮았다고 하는데, 언니도 사실은 아주 어릴 때 어머니를 본 거라서 자세하게 설명은 못 했거든요.”

언니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 어머니는 세계 최고의 미녀에 천사 같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사실, 어머니는 닮은 것은 내가 아니라 언니일 가능성이 더 컸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언니의 상상 속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미화되었던 것이든지.

“네가 어머니를 닮았다면, 분명 어머니께서는 굉장한 미인이시겠군?”

방심하고 있다가 기습을 당해버렸다. 슬쩍 웃으며 던진 테오도르의 농담에 나는 그만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그, 글쎄요. 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어서요. 워낙에 어릴 때 돌아가셔서요.”

“그럼 한 20년쯤 전에 돌아가신 건가?”

“네. 아마 그럴 거예요.”

순간, 분위기가 살짝 어두워졌다. 기억에도 없는 어머니였지만, 죽음이라는 주제는 늘 대화를 어둡게 만들었다.

“어쨌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작은 마을에 어머니에다가 언니, 저까지 분홍 머리가 셋이나 있었으니 이게 특이한 머리카락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랑 언니도요.”

나는 어깨에 닿아 있는 분홍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테오도르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다 얼핏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는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왜 그러세요?”

“응?”

“여기, 이렇게, 인상을 찌푸리셔서요.”

나는 테오도르를 흉내 내 미간을 좁혔다.

“아, 아니. 다 먹었으면 이제 다시 작업을 시작할까 하고.”

“어? 차가 아직…….”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테오도르는 아직 차가 반쯤 남아 있던 찻잔을 들어 훌쩍 원샷을 때렸다.

귀족님들의 테이블 예절에 원샷이 있는 줄은 몰랐네.

쿠키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내가 하나씩 하나씩 야금야금 주워 먹었던 터라 벌써 빈 접시만 남아 있었다.

“그럼 다시 그림을 그리도록 하지.”

테오도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자세를 잡아 주었다.

어제와 똑같이 손을 포개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허리를 꼿꼿이 편 자세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다.

“움직이지 마.”

캔버스 앞에 서서 테오도르는 내게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

.

.

나는 이제껏 배신을 당한 적이 없었다.

아스텔라 언니는 언제나 내게 신뢰만을 주었고, 아버지는 애초에 믿은 적이 없으니 배신당할 일이 없었다.

그 외의 사람들도 내 인생에 그리 깊이 관여할 일이 없으니, 나는 이제껏 스무 살이 되도록 한 번도 배신당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오늘, 지금 이 순간 전까지는 말이다.

“이건…….”

해가 어스름하게 질 때쯤, 드디어 그림이 완성되었다.

나는 거의 허리가 부러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내가 조금이라도 자세를 흐트러뜨릴 때마다 테오도르가 주의를 시키었기 때문에 나는 거의 틀에 갇힌 사람처럼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당연히 매우 힘들었다.

나는 겨우겨우 그렇게 몸을 일으켜서 뿌듯한 표정으로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테오도르의 곁으로 다가갔고, 마침내 이틀 동안 내가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몸을 혹사한 결과를 마주하게 되었다.

“……뭔가요?”

그림을 본 내 입에서 나온 소리는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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