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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73화 (73/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73

어제도 빠졌는데, 오늘도 훈련에 빠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손수건으로 목을 대충 가리고 뒤뜰로 나갔다.

“왔어?”

먼저 나와 있던 인스트가 평소와 같은 인사를 건넸다. 어제의 소동도, 내 목에 있는 손수건도, 모두 없던 일인 것처럼.

“안녕하세요, 인스트 님.”

꾸벅 인사를 하고, 언제나처럼 스트레칭을 먼저 하려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 뜨인 것 때문에 나는 스트레칭 대신 그걸 쳐다보고 있었다.

“어제 그 활 아닌가요?”

내 연습용 활이 놓여있어야 할 자리에는 어제 내가 쏘았던, 카르오 아무개씨가 생전에 쓰셨다는 활이 놓여있었다.

“호, 혹시 제가 써서 고장이라도 난 건가요?”

그래서 저더러 그걸 물어내라고 여기에 가져다 놓으신 건가요? 라는 말은 차마 무서워서 묻지 못했다.

“아니. 멀쩡하던데?”

휴~. 다행이다.

인스트의 말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로부터 겨우 지켜낸 월급을 딱 한 번 쏜 활의 수리비로 몽땅 털어 넣는 줄 알고 순간 얼마나 마음 졸였는데!

“너, 이게 누가 쓰던 활인지 알아?”

아무개 카르오 씨……라고 말하면 안 되겠지?

“아뇨. 그냥 카르오 가문의 어떤 분이 쓰신 것이라고만 들었어요.”

“현 카르오 대공의 숙부셨던, 델피오 드 카르오 님께서 사용하셨던 활이야. 당대의 신궁이라고 불리셨던 분이지.”

“그렇군요.”

“신궁 델피오 드 카르오에게는 다른 별명도 있었어.”

“뭔데요?”

“괴력의 델피오.”

순간, 혹시 그분이 광증이 있었던 때에 누군가 그분을 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이내 그 생각을 지워냈다.

광증은 카르오 가문의 비밀이었다. 누군가가 그렇게 쉽게 목격할 리도, 목격하게 내버려 둘 리도, 그런 별명이 붙게끔 놔둘 리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사람은 타고나기를 그냥 힘이 센 사람이었을 것 같았다. 나처럼.

“굉장히 힘이 센 분이셨다고 해. 그래서 신궁이라고 불리셨을 수도 있어. 이전에 내가 너에게 말했듯, 궁술은 보기와는 달리 힘을 바탕으로 하거든.”

인스트의 말에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넘쳐나는 카르오 가문이니 당연히 당대의 유명한 무기 장인에게 본인이 쓰실 활을 주문하셨지. 괴력이라고 불릴 정도의 힘을 가진 사람이 사용하던 활이니 일반인은 당연히 쏠 수가 없었고, 그분이 돌아가신 뒤에는 응접실에 전시되게 된 거야.”

그러고 보니 카르오 대공이 어제 응접실을 나가면서 내 쪽을 보고 말했었지? 활이 오래되어 삭은 모양이라고.

그건 아무도 다루지 못하던 활을 내가 쏜 것을 보고, 내가 힘이 세서 그렇다기보다는 활이 약해져서 그런 것으로 치부한 모양이었다.

“세월이 세월이니만큼, 지금은 나도 어느 정도는 당길 수 있지만…….”

인스트는 화살 없이 활을 당기는 시늉을 해보였다.

“새로 줄을 간다면, 나도 끝까지 당길 수 있을지 모르겠어. 거기다가 이 장력을 이기고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힐 수 있을지는 더더욱 장담 못 하겠고.”

그렇게 말하며 인스트는 천천히 활시위를 놓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활을 내게 넘겼다.

“…….”

나는 그 활을 받아서 가만히 인스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가만히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 저더러 뭘 어쩌라는……?

“이제 네 거야.”

“네?”

뜻밖의 대답이었다.

“테오도르 님께서 너 주라고 하더라고.”

“그렇지만, 근데, 아니, 근데, 이거, 응접실에 전시가 될 만큼 비싸고 귀한 물건 아닌가요?”

“그렇지.”

“그런데 이걸 저 주신다고요?”

“아까도 말했지만, 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응접실에 전시해둔 거였어. 아, 물론, 네가 말한 것처럼 비싸고 좋은 물건이라서 응접실에 전시해둔 것도 있지. 그리고 우리 가문에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고 자랑할만한 물건이기도 하고.”

“그런데 이걸 절 주신다고요?”

“비싸고 귀하긴 하지만, 그건 장식품이 아니라 활이니까.”

인스트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테오도르 님의 말씀에 나도 동의해. 누군가가 나에게 넌 잘생겼으니 우리 집 응접실에 장식해놓겠다고 하면 싫을 것 같거든. 난 기사로 쓰임을 받는 게 훨씬 좋아.”

“그건 좀 다르지 않나요? 사람을 응접실에 장식해놓겠다는 정신 나간 사람이 어딨어요?”

“오? 내가 잘생겼다는 것에는 딴지를 걸지는 않네?”

“뭐, 그거야, 인스트 님은 객관적으로 잘생기긴 하셨죠.”

“훗! 역시! 그래서 지금 또…….”

“반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얼른 인스트의 뒷말을 듣지도 않고 대답했다. 대체 언제가 되면 내가 자기에게 반하지도, 반할 예정도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될까?

“어쨌든 물건은 각자의 쓰임에 맡게 쓰이는 게 옳아. 활은 활로 쓰이는 게 가장 좋지.”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해. 이제 네 활도 생겼네.”

인스트는 내 팔을 툭 치며 말했다. 그 말을 듣자 갑자기 활을 든 손이 무거워진 기분이었다.

무거워진 활을 들기 위해 나는 손에 힘을 주고, 그것을 붙잡았다. 손가락에 감겨오는 나무의 촉감이 좋았다.

갑자기 힘이 샘솟는 기분이었다. 꼭 활이 앞으로 잘해보자고 내게 말하는 것처럼.

“인스트 님!”

나는 이미 돌아선 인스트를 향해서 소리쳤다.

“응?”

이제 막 스트레칭을 시작하려고 자세를 잡던 인스트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저! 열심히 할게요!”

* * *

“안녕하세요, 테오도르 님!”

기운차게 차 시중을 들 왜건을 끌고 안으로 들어서자, 희미한 기름 냄새가 나를 반겼다.

훈련을 너무 빡세게 하면 코에서 기름 냄새가 나는 부작용이 있던가? 그건 아닐 것 같은데?

거기다가 보통 소파에 앉아서 책을 보는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는 테오도르도 오늘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뭐 하시는 거예요?”

커다란 판자 같은 것을 세워두고, 그 앞에 서 있는 테오도르를 보고 내가 물었다.

“어?”

쪼르르 그의 곁으로 가자 기름 냄새가 더욱 진해졌다. 테오도르의 곁에 있는 색색 가지의 물감에서 나는 냄새였다.

그림이라는 것을 카르오 저택에 와서 처음 보았던 나는 물감도 당연히 처음이었다.

애초에 전생의 기억이 없었다면, 이게 물감이라는 것도 몰랐을 수도 있었다.

“그림도 그리실 줄 아세요?”

“응접실에 적당히 뭘 걸어놔야 하니까.”

“아! 그 활이 있던 자리 말씀이신가요?”

“그래.”

“오늘 인스트 님께 활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저, 더 열심히 연습해서 훌륭한 궁수가 될게요!”

뭔가 순서가 뒤죽박죽된 것 같긴 했지만, 나는 테오도르에게 넙죽 인사를 했다.

“그 활을 쏠 수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거 같으니, 너한테 가는 게 맞지.”

“그래도, 그건 엄청 비싸고, 좋은 활이잖아요.”

“그럼 그 활을 대신해서 걸어 놓을 그림을 그리게, 저기에 대충 앉아 봐.”

테오도르는 고갯짓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그가 항상 앉아서 책을 보던 그 자리였다.

“절 그리시겠다고요?”

“그래.”

“응접실에 걸어놓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절 그린다고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걸요?”

“머리카락을 분홍색으로 칠하지 않으면, 넌 줄 모를 거야. 애초에 거기에 걸린 그림을 유심히 보는 사람은 없어.”

“네? 클레어의 말로는 응접실에 있는 건 다 비싸고 귀한 것들이라고 했는데요?”

“그럼, 거기에 뭐가 있는지 알아?”

“음……. 커다란 수사슴이랑 엄청 화려하고 큰 도자기랑 또 그림이랑…….”

“그 그림에는 누가 그려져 있었는데?”

“빨간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요.”

“어떻게 생긴?”

“어…….”

순간, 말문이 막혔다. 분명 응접실에는 빨간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 그림이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생긴 부인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젊었어? 늙었어?”

“아마도, 젊었던 것…… 같은데요?”

조금 헷갈리긴 했지만, 내 기억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테오도르가 피식 웃었다.

“무덤 속에서 내 조상님이 들으셨다면 아주 기뻐하셨을 거야.”

“왜요?”

“사람에 따라서 기준은 다르겠지만, 88세의 생일을 맞이한 기념으로 그린 초상화를 보고 젊은 귀부인이라고 하면 틀림없이 기뻐할 테니까.”

“네? 88세요?”

아득한 숫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접실에 걸려 있던 빨간 드레스의 주인공이 그렇게 나이가 많았다고?

“그러니까, 내가 활 대신 그림을 그려서 그 자리에 대신 놔둔다고 해도 아무도 모를 거라는 거야. 어쩌면 나중에 아주 유명한 화가의 아주 비싸고 귀한 그림이라는 설명이 붙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테오도르의 말에도 나는 여전히 찜찜했다.

“내가 널 그려서 액자에 걸어놓고, 제7대 카르오 대공비라고 설명을 적어 놓으면, 다들 그런 줄 알걸?”

“카르오 대공님께서는 아시지 않을까요? 7대손이면 대공님과 관계가 어떻게 되는 거죠?”

“할머니의 할머니 정도 되겠지. 하지만 카르오 대공이 널 알아볼 리는 없어. 그 사람은 자기 조상에는 관심이 없거든. 아니, 조상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다고 해야겠지.”

더는 기다려주지 않겠다는 듯이 테오도르는 내 손목을 붙잡고 소파로 끌고 갔다. 그리고 나를 앉히고, 손으로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테오도르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뭔가 마음에 드는지 슬쩍 미소를 홀렸다.

그 미소가 그야말로 그림 같아서 내가 아주 잠깐 설렜다는 것은 비밀로 해두는 것이 좋겠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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