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72
“테오도르 님. 오후 티타임입니다.”
오르디의 목소리에 테오도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이 오후 3시라면, 자신이 혼자 이렇게 서재에 앉아 있은 지 2시간이나 지났다는 이야기였다.
“차를 이쪽으로 가지고 오라고 할까요?”
“아니. 내가 올라가지.”
이곳으로 레나티스를 데려오고 싶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더러운 이야기가 오간 곳에 그 애를 앉힐 수는 없었다.
“차 준비를 레나티스가 한 건가? 많이 놀랐을 텐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테오도르는 문득 차 시중을 들 사람이 레나티스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뚝뚝하고 차가워 보이는 오르디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고용인들을 섬세하게 배려했다.
특히나 여자나 어린애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가정 형편이 딱하거나, 사정이 있는 사람에게는 배려가 거의 무한에 가까웠다.
그리고 레나티스는 이 모든 조건에 들어맞는, 오르디가 편애하기에 딱 좋은 고용인이었다.
그러니 오늘 험한 꼴을 당한 레나티스를 배려하여 쉬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컸다.
“아뇨. 오늘은 쉬라고 일러두었습니다.”
“그렇군.”
오르디의 말에 테오도르는 금방이라도 일어서려던 몸을 다시 소파에 붙였다.
차는 서재로 가져오라고 하고, 대공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 더 골몰해보는 것이 좋을 듯했다.
“본인은 일을 빠지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좀 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방에 먹을 것을 좀 올려보내 줘. 저녁에는 푸딩을 좀 만들고.”
테오도르는 소동이 있기 전에 레나티스가 식사하던 중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오르디에게 지시했다.
더불어 레나티스가 좋아하는 디저트를 만들라는 말과 함께.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레나티스의 아버지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겠어?”
그리고 이어 자신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당장은 모릅니다만, 수소문해볼까요? 아직 저택을 떠난 지 한두 시간밖에 되지 않았으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한번 알아봐.”
“뭐 때문에 그러십니까? 딸에게 호되게 당해서 복수라도 하겠다고 다시 찾아올까 봐 그러신 거라면, 그런 일 없도록 경비를 단단히 세우겠습니다.”
“하찮은 인간이야. 오늘은 오해 덕분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거지, 그자가 카르오 저택의 경비를 뚫고 레나티스를 만나 해코지를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럼 뭐 때문에 그러십니까?”
“카르오 대공이 석연찮은 말을 했어.”
“대공님께서요?”
테오도르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이름에 오르디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자가 레나티스와 관련이 있는 자라고 알고 있더군. 치료제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말했어. 그자가 레나티스의 아버지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레나티스 양을 직접 데리고 온 것은 저이긴 합니다만, 제게 그 지시를 한 것은 대공님이십니다. 그러니 레나티스 양에게 아버지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셨지 않을까요?”
“물론 그건 알고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방금 네가 말했듯, 레나티스를 직접 데리러 갔던 것은 너야. 카르오 대공께서는 괴물이 자신에게 해를 가하기라도 할까 봐 별장으로 피신한 뒤였어. 그는 레나티스 아버지의 얼굴을 몰라.
그러니 어느 날 갑자기 카르오 저택의 응접실에 피 흘리고 있는 망나니 같은 작자가 레나티스의 아버지라고 단박에 알아보는 건 말이 되지 않지.”
테오도르가 서재에서 2시간 동안 골몰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카르오 대공이 한 말을 곱씹고, 또 되뇌며 그가 한 말속에 숨어 있는 진실을 캐내는 것.
너무 작은 실마리였지만, 테오도르는 그 실의 끝을 끈질기게 붙들고 있었다.
“그자가 레나티스 양을 향해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 그렇게 짐작한 것은 아닐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그것 역시도 수상한 건 마찬가지야.”
“네? 어떤 점이요?”
“그자가 남의 말을 그렇게 주의 깊게 듣고 있을 리가 없어. 그것도 남루한 차림새의 평민 남자의 말을 듣고 세심하게 추리까지 할 리는 더더욱 없고. 대공의 귀에는 남루한 평민 목소리라면 모깃소리보다도 작게 들릴 테니까.”
테오도르는 코웃음을 치며 간단하게 카르오 대공의 인성을 비하했다.
그리고 그것이 영 틀린 말은 아닌지라, 오르디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테오도르의 말을 듣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아! 테오도르 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상하다고 하니, 오르디의 머릿속에 번뜩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오늘 레나티스 양이 잡았던, 그 활 말입니다.”
* * *
“후아아아아아……. 정신없다.”
방에 돌아온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아빠에, 거기다 대고 활을 쏴버린 나, 마지막에 나타나 상황을 정리한 카르오 대공에, 대공에게 불려가 버린 테오도르까지.
“아, 아직도 들고 있어 버렸네.”
나는 내가 지금까지 그 활을 들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나중에 잘 닦아서 다시 응접실에 걸어놓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빗나간 화살은 어떻게 됐더라? 응접실 벽 어디에 박혔나? 아니면 그냥 바닥에 떨어져 있으려나?
“…….”
화살을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내가 아버지를 쏘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피가 뚝뚝 떨어지던 아버지의 귀와 놀란 아버지의 얼굴, 그리고 이내 나를 죽일 듯이 쳐다보았던 그 눈빛까지.
드디어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났다는 후련함과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죄책감, 그리고 내가 사람을 쏘고 말았다는 두려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아~ 모르겠어. 일단은 좀 쉬어야겠어.”
들고 있던 활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터덜터덜 침대로 향했다. 짧은 시간에 휘몰아치듯 일어난 일들 때문에 너무 피곤했다. 당장 침대에 누워서 쉬고 싶었다.
“응?”
막 침대에 엎어지려는 찰나였다. 늘 내가 눕는 쪽이 아닌 저쪽 편 베개에 뭔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이게 뭐야?”
침대 위를 엉금엉금 기어서 가까이 가자, 알록달록한 그것들이 나무 열매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왜 여깄지? 바람에 날려서……?”
고개를 돌려 창문을 쳐다보았다. 창문이 열려있긴 했지만, 이렇게 나무 열매만 쏙쏙 골라서 방안으로 굴러들어올 리가 없었다.
거기다가 창가 근처에는 이런 열매가 열리는 나무도 없었다.
“누가 가져다 놓은 것 같은데, 누구지?”
빨갛게 잘 익은 열매부터, 아직 덜 익은 것 같은 푸릇한 열매까지 있는 걸 보면 어디서 사온 것은 아닌 것 같았고, 누군가가 딴 것 같은 것이었다.
“어? 이건 뒤뜰에서 봤던 열매인데? 어? 이것도 그러네? 이것도.”
좀 더 자세히 보자 그게 다 뒤뜰에 있는 열매인 것을 알아보았다.
가끔 훈련하다가 쉬는 시간에 목이 마르거나 당이 떨어진 느낌이면 하나씩 따먹던 열매라서 알고 있었다. 거기다가 서둘러서 딴 것인지 이파리 몇 개도 섞여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아침도 못 먹은 걸 알고, 누가 가져다준 건가?”
하지만 배고픈 사람에게는 빵 같은 걸 가져다주지, 이런 열매를 따다 주는 사람이 어딨담?
“어?”
갑자기 짐작 가는 바가 생각났다.
“어어?”
나는 소담스럽게 모여있는 나무 열매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배고프다고 투정을 부린 것을 들은 유일한 생명체가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스기엔이?”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람이 땄다면 얼마 안 되는 양이었겠지만, 내 머리통보다 작은 슬라임이 땄다고 생각하면 꽤 많은 양이었다.
아마도 폴짝폴짝 뛰면서 열매를 따고, 작은 몸으로 낑낑거리며 나무에 올라갔을 것이다.
그리고 늘 투덜거리는 고 작은 입은 ‘인간 주제에 감히 고위 마족 님을 이렇게 귀찮게 만들다니!’ 같은 말을 떠들고 있었을 거다.
상상하자 더 웃음이 나왔다.
“그래. 사람이라면 빵이겠지만, 스기엔은 사람이 아니니까 훔치지 않고서야 빵이 없겠지.”
나무 열매 중에 하나를 입에 넣자, 새콤달콤한 과즙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고마워, 스기엔.”
그리고 어디 있는지 모를 스기엔에게 감사의 말을 건넸다.
“오르디 님도, 인스트 님도, 모두 모두 감사해요.”
내 비명에 헐레벌떡 달려온 오르디와 내내 아버지를 경계해준 인스트에게도 감사의 말을 했다.
“그리고 테오도르 님도요.”
그가 나를 믿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망설이고 있었을는지도 몰랐다.
모두에게 고맙고, 감사했다.
“다 잘될 것 같은 느낌이야.”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