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71
“약혼이요?”
테오도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달콤한 단어를 내뱉었다.
“그래.”
우습게도 그 단어의 출처는 테오도르보다도 더 그 단어가 어울리지 않은 카르오 대공의 메마른 목소리에서 나왔다.
“너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슬슬 결혼을 준비해야지. 오히려 주변의 다른 귀족 자제들에 비하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카르오 대공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제국의 어지간한 가문들은 보통 유력한 가문 간 결속을 위해서 서로의 자식들을 결혼시켰다.
결혼을 시키기에 곤란한 처지이거나 너무 어린 나이라면, 약혼식을 올렸다.
그러니 그의 말처럼 올해 24살이나 되었지만, 아직 결혼이나 약혼을 하지 않은 테오도르는 늦은 감이 있었다.
“제가 광증이 있다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언제 발작을 일으킬지 모르는 미친놈을 어떻게 결혼시킨다는 겁니까?”
그리고 테오도르의 결혼이 늦은 이유는 당연하게도 바로 그 문제 때문이었다. 언제 테오도르의 광증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것.
물론, 카르오 대공 가가 다른 가문과의 결합으로 가문의 부흥을 꾀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작용했다.
만약 자신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면, 카르오 대공은 미쳐 날뛰는 테오도르에게 목줄을 채워서라도 결혼식장에 들여보냈을 테니까.
“그게 결혼과 무슨 상관이야? 물론 네가 결혼식장에서 갑자기 광증이라도 일으킨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거야 날짜를 잘 잡으면 상관없을 거다.”
“그래요? 그럼 신혼여행지에서 발작을 일으켜도 상관이 없고, 첫날밤에 발작을 일으켜도 상관이 없을 거라는 겁니까?”
“내가 너에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줘야 하는 것이냐?”
카르오 대공은 참으로 귀찮고 하찮은 질문을 받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리고 그런 대공의 모습에 테오도르는 괜한 질문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애초에 그는 그런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을 사람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남들 다하는 자식의 결혼을 그럴듯하게 치러내는 생각밖에 없을 것이 틀림없었다.
테오도르의 광증에 대한 불안감도, 아무것도 모른 채 광증을 가진 남편을 맞이해야 하는 신부의 심정도, 카르오 대공의 체면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었다.
“아르보 백작 가의 차녀나 리브리 백작 가의 삼녀, 페르눔 자작 가의 장녀 정도를 후보로 생각하고 있는데, 혹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말해보려무나.”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영애들이 누군지도 저는 모릅니다. 언제 발작을 일으킬지 몰라 제 성년식 이외의 모임에는 제가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도 잊으신 겁니까?”
“그랬나? 그럼 오히려 더 좋겠구나. 아무런 편견 없이 고를 수 있을 테니. 자고로 물건을 볼 때는 이것저것 고르는 것보다는 제일 처음에 눈에 들어오는 것이 나을 때도 있어.”
귀족 영애들을 시장물건 취급하듯 말하는 카르오 대공의 말에 테오도르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릴 뻔했다.
하지만 카르오 대공에게 그런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테오도르는 태연함을 가장했다.
그저 무심히 무슨 더러운 소리를 하냐는 듯이 카르오 대공을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 치더라도 지금은 치료제가 확보되어 있으니, 그리 큰 소란도 일지 않을 테고.”
하지만 레나티스를 한 명의 인간이 아니라 단순한 물건으로 취급하는 듯한 카르오 대공의 발언에 테오도르의 한쪽 눈썹이 씰룩이고 말았다.
천천히 눈을 치켜뜨고 제 아버지를 바라보는 테오도르의 눈빛에는 싸늘한 불꽃이 타닥타닥 피어오르고 있었다.
“곱게 자란 귀족 영애에게 그 치료제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하시려고요? 제 남편과 정기적으로 밀실에 들어가는 하녀를요.”
“굳이 설명할 것까지 있나? 어차피 남자에게 정부 한둘쯤이야, 그리 큰 흠이 되지도 않을 텐데.”
레나티스를 정부쯤으로 치부하는 카르오 대공의 말에 이번에는 테오도르의 입꼬리가 어쩔 수 없이 살짝 떨렸다.
그의 눈에 서려 있던 싸늘한 불꽃도 제 덩치를 불렸다.
“물론, 첫날밤 침대에 다른 여자를 끌어드린다면 신부가 기함할 테지만, 이미 식까지 치렀는데 제까짓 것이 뭘 어쩌겠어? 못 볼 꼴 보기 싫으면 제가 나가든가, 아니면 셋이서 즐겁게 지내든가 선택해야지.”
자신과 레나티스를 두고 하는 저열한 비유에 끝내 테오도르는 이를 악물고 카르오 대공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카르오 대공은 그런 테오도르를 보며 싱긋이 웃었다.
‘눈빛은 제법 쓸만하다만, 아직 어리긴 어려.’
불현듯, 대공의 머릿속에 저 먼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작은 손에는 그보다 더 작은 어린 새를 받쳐 들고, 어린 테오도르는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새가 다쳤다고 했나, 죽었다고 했나?’
그는 테오도르가 정원에서 주워왔던 그 어린 새가 왜 그렇게 됐는지, 그 뒤로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는 무슨 병균이 있을지 모를 더러운 새를 만지지도 않았고, 우는 테오도르를 달래주지도 않았으니까.
카르오 대공은 그저 인상을 찌푸렸고, 정원 산책 중에 우연히 마주친 아들을 그대로 지나쳤다. 아무런 위로도, 조언해주지 않았다.
다만,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유모에게 넌지시 시선을 보내 눈앞에서 테오도르를 치우게 했을 뿐이었다.
다행히 눈치 빠른 유모는 얼른 테오도르를 안아 들었고, 그는 다시 산책을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있었던 사소한 사건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방금 그 사건이 생각나기 전까지는.
“마음에 둔 영애가 따로 없다면,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마.”
대공은 갑자기 과거의 기억을 지워내며 말했다. 별 쓸데없는 기억을 오래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거기다가 어리고 여리고 쓸모없이 징징대는 어린애보다야, 반항적이긴 해도 쓸모있는 이쪽이 훨씬 나았다. 힘들게 마녀를 찾은 보람이 있었다.
“만약에 제가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테오도르의 이번 말만큼은 카르오 대공의 허를 찔렀다. 제가 알기론 테오도르가 따로 만나는 영애는 없었다.
지난번에 대공비가 제 며느릿감으로 점찍어둔 영애를 몇 번 만난 것은 알았지만, 그 영애는 갑작스럽게 수도원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그것도 테오도르가 그 백작 가를 찾아간 직후에 서둘러서.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요?”
“네가 그렇다면…….”
카르오 대공은 뭔가 생각하는 척을 했다.
“네 신혼 침대는 큰 것으로 준비해야겠구나. 아무래도 셋이서 즐기려면 제법 큰 침대가 필요할 테니.”
생각이 아니라, 생각하는 척이었다. 애초에 테오도르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 약혼의 말을 꺼내러 온 것 역시도 테오도르의 의견을 존중하는 척을 하러 온 것일 뿐, 아들의 의견을 존중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약혼식 당일에 본인을 불러내면 방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겠다고 버티기라도 할까 봐 미리 언질을 줬을 뿐이었다.
설사 일이 그렇게 되면 테오도르를 끌어내서라도 약혼식은 진행되겠지만.
“그리고 아까 그자는 내가 처리하도록 하마.”
이제 용건을 끝낸 카르오 대공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몸을 틀어 서재를 나가려는 찰나에 카르오 대공은 잊고 있던 일이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네 치료제를 보호하는 것도 부모의 의무이니 말이다.”
퍽 자상한 아버지였다.
* * *
“그자는 어쨌지?”
서재에서 나온 카르오 대공이 복도를 걸으며 시종에게 말을 툭 내던졌다.
“말씀하신 대로 저택에서 치웠습니다.”
대공을 모신지 8년이 넘은 시종은 대공의 말을 그렇게 해석했다. 저택에 어울리지 않는 자이니, 저택에서 치우라고.
“쫓겨난 뒤에도 정문에서 소란을 피워 문지기에게 몇 대 맞았습니다. 그 후에야 저택 앞을 떠났습니다.”
“지금은?”
“네?”
시종이 되묻자, 카르오 대공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시종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시종은 더욱 당황했다. 치우라셔서 치웠다. 그런데 치운 쓰레기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를 대공이 왜 묻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멍청함에 화가 난다는 표정을 짓는 이유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그자가 어디 있는지 찾아.”
“네, 알겠습니다.”
시종은 얼른 대답했다. 뭔지 몰라도 자신이 대공의 마음에 들지 못하게 일을 처리한 죄는 컸다.
이다음 명령은 반드시 그의 성에 차게 수행해야 했다.
“은밀하게 뒤를 쫓다가, 조용히 처리해.”
“처리라고 말씀하심은……?”
이번에는 그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시종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시는 내 눈에 띄지 않도록 하라는 말이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확실하게.”
그 말을 하는 동안 대공의 걷는 속도는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표정에도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저 평이하고 사사로운 심부름을 시키는 것 같은 말투였다.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시종은 대공이 자신에게 지시한 것이 그 남자를 이 저택에서만 치우라는 것이 아니라 영영 이 지상에서 치우라는 말임을 알아들었다.
그자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든, 이제 죽음 목숨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