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70
나는 활시위를 팽팽하게 유지한 채, 인스트에게 배운 대로 목표물을 겨냥했다. 맞출 수도 있었고, 맞추지 못할 수도 있었다. 지금의 내 실력은 그 정도였다.
하지만 내 의지로 활을 겨눌 수는 있었다.
“나는 이미 예전에 당신보다 훨씬 힘이 세졌어. 내가 엉겁결에 당신의 주먹질을 막은 적이 있다는 걸 당신도 알 거야. 하지만 그 이후로 더는 막지 못했던 건, 그날 내가 당신의 주먹을 막았다는 이유로 나와 언니가 더 심하게 맞았기 때문이었어.”
20살의 생일날. 내가 갑자기 깨닫게 된 사실들은 피폐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내 현실 역시 그보다 나을 게 없었다.
그날 내가 깨달은 것은, 이 세계가 소설 속 세계라는 것뿐만이 아니라 내가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이 무서웠어. 내가 당신보다 훨씬 힘이 세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맞서 싸우지 못한 건, 당신이 두려워서였어.”
나는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어깨를 좀 더 활짝 열고, 언제든 활을 쏠 수 있도록 배에도 힘을 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것은 나였다.
“나는 내 힘으로 돈을 벌고, 내가 재능을 가진 일을 찾았고, 나를 믿어주는 사람도 있고, 내가 지켜주고 싶은 사람도 생겼어.”
언제든 화살을 놓을 수 있는 사람은 나였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당신이 두렵지 않아.”
금방이라도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아버지는 눈을 부릅떴다. 그가 윗입술을 씰룩거리자 누런 이가 보였다.
나는 살짝 화살 끝을 틀어 그쪽으로 조준을 바꾸었다.
“이 망할 년이 키워준 은공도 모르고, 이 아비에게 활을 겨눠? 돈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어. 내가 오늘 당장 네 다리 몽둥이를 부러트려서 버르장머리를 고쳐주지!”
아버지는 거칠게 테오도르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나를 향해서 성난 발걸음을 내디뎠다.
‘두렵지 않아.’
발을 단단히 디디고.
‘무섭지 않아.’
배에 단단히 힘을 주고.
‘나는 할 수 있어.’
갑자기 손끝이 떨려왔다.
분명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분명 나는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내게로 다가오는 아버지의 모습이 점점 커지자 새끼발가락 어딘가에 남아 있던 겁쟁이 레나티스가 슬금슬금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그 순간, 테오도르와 눈이 마주쳤다.
테오도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온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테오도르의 보라색 눈에서 선명한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믿음.’
테오도르는 무한한 신뢰와 무한한 믿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본 순간, 흔들리던 다리가 다시 단단히 섰다.
테오도르에게서 다시 아버지로 시선을 돌렸지만, 테오도르가 나를 여전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은 내 가족이 아니야.”
내 피안에 아버지의 피가 흐르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활시위를 놓았다.
그야말로 쏜살같이 화살은 내 손을 떠났다.
“으어어엌!”
아버지는 마치 끌려 나가는 돼지 같은 소리를 냈다. 누가 들으면 당장 돼지 멱이라도 따는 줄 알 것 같은 소리였다.
“거봐. 귀를 맞으면 사람은 전의를 상실하게 되어 있다고.”
인스트의 목소리가 흘러가듯 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쪽을 쳐다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자신의 오른쪽 귀를 감싸고 있는 아버지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늘 술잔을 움켜쥐고 있던 손에서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빗나갔어.’
마지막에 내가 화살 끝을 어디에 겨누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누런 이였는지, 그가 말할 때마다 징그럽게 움직이던 목울대였는지, 그게 아니면 희번덕하게 나를 쳐다보던 두 눈의 사이였는지.
하지만 내가 맞춘 것은 그의 귀였다.
어쨌든, 나는 아버지를 쏘았다.
“이 마, 망할 년이! 감히 제 아비를 죽이려고 들어?”
귀에서 흘러나오는 피만큼이나 붉은 핏발이 선 눈으로 아버지가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겁나지 않았다.
이제껏 내가 그를 무서워했던 것이 모두 꿈이었던 것처럼 나는 아버지가 무섭지 않았다. 그저 침착하게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학대라는 기나긴 악몽에서 나는 비로소 깨어났다.
“그래. 애초에 아스텔라와는 달리 못생기고, 되바라진 네년이 내 딸이라는 것도 의심스러웠어. 넌 그 창녀 같은 년의 딸이지 내 딸이 아닌 게 분명해.”
“어머니를 모독하지 마!”
뜻밖이었다.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게.
나는 이제껏 아스텔라 언니가 내 엄마라고 여기며 살았다.
얼굴도 모르는 엄마에게는 아무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버지의 입에서 엄마에 대한 욕이 흘러나오자 그만 발끈해서 소리치고 말았다.
“모독? 모독을 당한 건 나야! 틀림없이 어느 놈팡이와 배가 맞아서 생긴 너를 이제껏 먹이고 재워준 내가 병신같이 당한 거지! 그래, 꼴에 애들 엄마라고 그 더러운 행실을 너희들에게 말하지 않은 내가 병신인 거지.”
비웃음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아버지는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비웃음이 나를 향한 것인지, 자신을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네 어미가 어떤 년인지, 사실은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 줄까?”
여전히 아버지의 귀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양손에는 자신의 피가 묻은 채,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걸어오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로테스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손에 들린 활을 꾹 쥐었다. 화살이 없으니 활을 쏠 수는 없었지만, 이걸로 아버지가 다가온다면 얼굴을 후려칠 수는 있었다.
장담하건대, 내 힘이라면 충분히 아버지를 기절시킬 수 있었다.
“네 어미란 년은, 젖먹이였던 널 내팽개치고 저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고 어린애를 유혹해……!”
“무슨 소란이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새로운 목소리에 아버지의 말이 끊겼다.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아, 모든 사람은 아니었다. 인스트만은 자신의 검을 잡은 채, 여전히 아버지를 주시하고 있었다. 언제든 아버지가 허튼짓하면 그를 벨 기세였다.
과연 기사다운 집중력과 몸가짐이었다.
‘카르오 대공?’
놀랍게도 갑자기 들린 목소리의 주인공은 카르오 대공이었다.
그는 응접실의 문에 서서 인상을 찌푸린 채,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시종과 호위 기사가 줄줄이 대기 중이었다.
“어, 어엇, 엇?”
“…….”
아버지 역시 놀란 듯, 이상한 소리를 내며 카르오 대공을 향해서 한 발짝 다가섰다.
피 흘리는 수상한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당연히 카르오 대공은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이 저택에 어울리지 않는 자가 있군.”
별다른 지시도, 제스쳐도 없었다. 그저 카르오 대공은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문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다 알아들은 그의 시종과 호위 기사들은 순식간에 앞으로 달려 나와 아버지를 붙들었다.
“아, 아니! 잠깐!”
“시끄럽군.”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르오 대공의 말 한마디에 시종이 자신의 타이를 풀어내 아버지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 읍읍!”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아버지는 입이 막히고도 말을 하고 싶어 했다. 다급하게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서 자기를 좀 구해달라는 의사가 읽혔다.
당연히 나는 그의 구조요청을 무시했다.
십여 년간, 내가 제발 그만 때리라고, 살려달라고 말했을 때, 그가 나를 외면하였듯이.
그러자 아버지는 온몸을 버둥거리며 카르오 대공을 쳐다보았다. 대공이 명령을 거두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가 아버지에게서 거둔 것은 명령이 아니라 시선이었다. 더불어 이미 그의 관심사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대공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테오도르를 쳐다보고 있었다.
“별채라고는 하나, 엄연히 카르오 저택의 일부이다. 대체 저택에 뭘 끌어들이는 것이냐?”
카르오 대공은 낮은 목소리로 테오도르를 질책했다.
“…….”
엄밀히 말하자면 카르오 저택에 아버지를 끌어들인 것은 나였으니, 테오도르의 잘못은 없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그저 묵묵히 대공의 질책을 받아냈다.
제 잘못이라고 나서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괜히 일이 커질 것 같아서 나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니, 왜 내 차례야! 가만히 있었는데!’
가만히 있는 와중에, 갑작스럽게 카르오 대공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깜짝 놀라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주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이 응접실에 감돌았다.
“활이 오래되어서 나무가 삭은 모양이군.”
바닥을 바라보는 와중에 카르오 대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말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내가 든 활을 쳐다보았다.
삭은 것치고는 너무 멀쩡한데? 활도 아주 잘 쏴졌고 말이야. 줄은 좀 느슨한 감이 있어서 평소보다 힘을 더 주고 끝까지 당겨야 하긴 했지만, 활은 멀쩡했다.
“테오도르. 네게 할 말이 있어서 별채에 온 것이니 서재로 따라오거라.”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온한 카르오 대공의 말로 소란이 끝이 났다.
그리고 나와 아버지의 인연도 이것으로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