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69화 (69/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69

세 사람이었다.

열린 응접실의 문으로 테오도르와 인스트, 그리고 오르디가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조금 전 들린 목소리의 주인공인 오르디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와 아버지를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고 있었고, 인스트는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아버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선 테오도르는 싸늘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힐끗 본 뒤에 바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흐트러진 내 머리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언니가 찾아왔다고 하지 않았나?”

“뭔가 소통의 오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문지기에게 듣기론 레나티스 양의 가족이고, 신분증상 그라티아임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오르디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테오도르에게 말했다.

그러자 인스트는 아버지가 침입자라고 단정한 듯, 슬며시 자신의 손을 허리에 찬 검집으로 향했다.

“오, 오해하지 마십시오!”

돌아가는 분위기가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짐작한 아버지가 얼른 나섰다. 정말이지 저럴 때는 행동이 잽쌌다.

“아, 그…… 나는, 아니, 저는 이 애의 아비올시다.”

나름대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어울리지 않게 예의를 차리며 아버지가 말했다. 딱 봐도 높은 신분에, 돈이 있어 보이는 세 사람이었기에 태도가 돌변한 것이었다.

거기다가 지금은 술에 취해 있지 않으니, 아버지도 제법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했다.

점잖은 세 사람이 보기에는 가당찮은 예의 바름이었겠지만, 적어도 아버지에게는 저게 최선을 다한 것임을 나는 알았다.

“레나티스의 아버지?”

테오도르가 별로 어려울 것도, 이해할 것도 없는 단어를 굳이 되짚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내가 처음 보는 테오도르의 싸늘한 표정과 눈빛이었다.

광증의 테오도르도 저런 표정은 아니었다. 호의라곤 없었던 나와의 첫 만남에서도 저런 눈빛은 아니었다.

마치 반쯤 잘린 채 꿈틀거리는 징그러운 벌레라도 보듯이 하찮음과 혐오감이 동시에 엿보이는 테오도르의 눈빛에 나까지 흠칫했는데, 아버지가 괜찮을 리 없었다.

그는 눈을 굴리며, 초조한 듯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 개망나니 아버지?”

한쪽 눈썹을 위로 치켜올리며, 테오도르가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물었다.

테오도르의 단어 선택에 아버지는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도 귀족적인 테오도르의 입에서 욕설이나 다름없는 단어가 나와서 당황한 것인지, 그가 자신의 별명을 알고 있어서 당황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아버지는 당황하지 않은 척을 하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저는 이 애가 걱정돼서 보러 온 것뿐입니다. 보시다시피 아직 어린애인데 부모와 떨어져서 멀리 일을 하러 왔으니, 걱정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아버지가 날 걱정한다고? 차라리 뒷산의 몬스터가 내 걱정을 한다는 말이 더 진실하게 들릴 거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 애는 아직 어린애인데 어떻게 여기에 고용돼서 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미성년자를 부모동의 없이 고용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심지어 이 애는 가출한 애입니다.”

아버지가 눈을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그제야 나는 그가 당당하게 자신이 내 가족임을 밝히고 정문으로 들어온 이유를 알았다.

그냥 내게서 돈을 갈취하려고 했다면, 따로 나를 불러내면 될 일이었다.

자기 신분을 증명하고, 여러 사람과 마주치고, 귀찮은 설명을 더 하는 것이 아니라 간단하게 언니를 빌미로 나를 불러내고, 협박하고, 갈취하는 것이 아버지의 스타일에 더 알맞았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카르오 저택으로 들어와, 굳이 소란을 피운 데에는 바로 저런 꿍꿍이가 있었던 것이었다.

“하…….”

어쩔 수 없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시선이 내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그저 쓴웃음만 나왔다.

“난 20살이에요. 20살이 된 지 벌써 두 달이 넘었어요. 아버지 허락 따위 없어도 되는 성인이라고요.”

아버지의 눈에 당황의 빛이 스쳐 지나가더니, 몇 번이나 눈을 끔벅였다.

나는 그가 그냥 협박을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내가 정말로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은 19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아니, 그의 생각엔 내 나이는 19살도 아닐지도 몰랐다.

“어떻게 자기 자식의 나이도, 생일도 모르는 부모가 있어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뇌도 취해버린 것 아녜요?”

“다, 닥쳐! 어디 건방지게 아버지 하는 말씀에 꼬박꼬박 말대꾸야?”

제 생각과 다르게 일이 흘러가자 얼굴이 벌게진 아버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참으로 바보 같았다.

“나는 네 아비야. 네가 이렇게 좋은 집에 일하게 된 것도 다 내가 널 이만큼 키워줘서지! 그러니까, 나는 네가 번 돈에 공정한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야!”

“당신이 언제 날 키웠어요? 날 키워준 건 언니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이년이!”

언제나 와 똑같았다.

아버지의 횡포에 견디다 못한 내가 대들고, 아버지는 손을 치켜들었다.

“듣던 대로 손버릇이 나쁘군.”

하지만 여느 때와 다른 점은, 나를 막아준 사람이 언니가 아니라 테오도르라는 것이었다.

그는 치켜 올라간 아버지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테오도르가 별로 힘을 세게 준 것 같지도 않은데, 아버지는 옴짝달싹을 못 했다.

“이건 되먹지 못한 딸을 아비가 교육하는 것입니다. 가족의 일이니, 귀족님이시더라도 간섭하지 마십시오.”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인지 아버지는 감히 테오도르에게도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싫다면?”

테오도르의 짧은 말에 안 그래도 붉었던 아버지의 얼굴이 더욱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거기다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이마에 핏줄이 불뚝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아버지의 저 얼굴을 알았다. 지난 20년 동안 나도 몇 번 보지 못한, 아버지가 최고로 화났을 때의 표정이었다.

내가 아버지의 돈을 몰래 훔쳐서 밀과 감자를 샀을 때와 우락부락한 남자가 외상 술값을 받으러 집에 찾아왔을 때 아버지가 지붕 위에 숨어있다는 것을 내가 알려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보았던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다리와 팔이 부러졌었다.

‘테오도르!’

나는 태연한 얼굴로 아버지를 막아선 테오도르에 대한 걱정에 심장이 뛰었다.

테오도르는 귀하게 자란 귀족 도련님이었다. 길에서 시비 한번 붙은 적 없고, 싸움 한번 해본 적이 없을 사람이었다.

만약 위험한 일이 있다 해도 그에게는 호위 기사인 인스트가 있었다.

그에 반해서 우리 아버지는 술집에서 예사로 싸움이 붙었고, 화가 나면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기보다 덩치가 크고 싸움 잘하는 사람에게도 제가 신경을 거슬리게 하면 앞뒤 재지 않고 덤비는, 그야말로 개망나니 미친개였다.

심지어 귀족이라고는 그다지 뵙지도 못하고 살았던 시골 사람이었다.

귀족이라는 것이 얼마나 높은 위치에 권력을 가졌는지 똑바로 아는 머리를 가지고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내가……!’

주먹이 꾹 쥐어졌다.

내가 뭐라도 해야 했다.

당장 테오도르에게 달려가려 발을 내딛는데,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저게 있으면!’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미 나는 너무 많은 시간을 망설여왔다.

“물러서.”

내 입술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너무나 낮고 단호해서 나마저도 내 목소리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테오도르에게서 떨어져.”

하지만 나는 그 이질적인 목소리로 다시 명령했다.

“당장.”

나는 벽에 걸려있는 활을 떼어내고, 말라붙은 피가 있는 화살을 마저 떼어내, 그것으로 아버지를 겨누었다.

놀란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아버지에게 무기를 겨눈 패륜아라고 불려도 상관없었다. 천륜을 어겼다며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해도 괜찮았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아버지가 테오도르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었다. 나에게 했던 것처럼.

“저게 미쳤나! 감히 네가 나한테 명령을 내려? 그까짓 장식품을로 나한테 겨눈다고 네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처음에는 놀라서 얼어붙은 것 같았던 아버지는 이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길들어진 본능이 내 손을 움찔하게 했지만, 나는 힘주어 더욱 팽팽하게 시위를 겨눴다.

“테오도르에게 손끝 하나라도 댄다면, 참지 않겠어.”

“뭐?”

“그리고, 당신이 나한테 손대는 것도 더는 참지 않겠어.”

나는 무서웠다.

그리고 두려웠다.

세상의 그 모든 것보다도, 나는 아버지가 무서웠다.

그가 인상을 쓰면,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손을 들면 눈을 감게 되었다. 고통이 느껴지면, 이를 악물었다.

나는 그랬었다.

“더는 당신을 참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