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68
응접실은 지난번에 구경했던 그대로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엄청 유명한 어쩌고저쩌고 화가가 그린 그림이나 저기 바다 건너의 무슨 무슨 나라에서 온 귀한 화병, 진짜 금으로 만들었다는 카르오 대공가의 선대 누구누구 님의 황금 마스크와 그가 잡았다는 거대한 수사슴의 헌팅 트로피, 그 사슴을 잡았다는 커다란 활과 피 묻은 화살까지.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구경할 생각도, 의자에 앉을 생각도 전혀 하지 못했다.
드디어 언니를 만난다는 들뜸과 설렘에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처럼 계속 응접실을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저 혼자 조용히 만날 수 있을까요?’
그게 테오도르에게 말한 나의 조건 아닌 조건이었다.
‘저희 언니는 저와는 다르게 수줍음이 많거든요. 낯선 사람이 있으면 말을 잘하지 못해요. 특히나 테오도르 님같은 귀족은 만나본 적도 없는데, 완전히 얼어붙고 말 거예요.’
분명 언니는 나보다는 내성적인 타입이긴 했지만, 낯선 사람이 있다고 말도 못 한다거나, 얼어붙는 정도는 아니었다.
시장에서 흥정도 곧잘 했고, 일할 때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싹싹하게 굴었다.
특히나 내가 어렸을 때, 배고픔에 못 이겨 울음을 터트리면 동네를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구걸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던 언니였다.
하지만 혹시나 테오도르가 날 따라와서 언니를 만나게 될까 봐 나는 그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
아주 다행히도, 테오도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불퉁한 표정이었긴 하지만, 그건 오르디가 들어올 때부터 그랬었다.
‘먼저 언니를 만나고, 나중에 테오도르랑 다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어.’
끝맺지 못한 대화가 신경이 쓰였다. 특히나 테오도르가 자기 마음의 어두운 부분을 오픈한 것이 처음이라 더욱 그랬다.
‘어쩌면 그런 마음속의 어두운 부분을 없애 나가는 게 진짜 힐링일 수도 있어. 테오도르가 피폐물 남주가 된 근원적인 원인을 파악하면……!’
복잡한 머릿속을 오가는 생각들을 하나씩 정리하는 중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생각은 올스톱이 되었다.
더불어 번잡하게 응접실을 오가던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거의 휙 소리가 날 정도 몸을 틀어 응접실의 입구를 쳐다보았다.
“레나티스!”
“!!”
그리고 그곳에서 보인 얼굴에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 망할 년!”
욕을 내뱉은 쉰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연히 언니가 아니었다. 아스텔라 언니가 저렇게 희끗희끗한 새치와 불룩한 배, 술주정뱅이의 붉은 코를 가졌을 리 없었으니까.
오르디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날 찾아온 사람은 내 가족이긴 했다.
“아버지…….”
술주정뱅이 개망나니 아버지의 피가 내 안에 흐르고 있었다.
불행히도.
“시골 촌년이 출세했군? 수도에 이런 엄청난 집에서 일하고 말이야. 저택이 얼마나 큰지 입구에서 여기까지 오는데도 아주 오지게 걸었어.”
전에는 매일 같이 들었지만, 여기에 온 뒤로 듣지 못했던 걸걸한 목소리였고 이 저택에서 들어보지 못했던 비속어였다.
오랜만에 들었다고 저따위 목소리와 비속어가 그리울 리 없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네가 편지를 썼잖아.”
아버지는 나를 보며 히죽 웃었다. 나는 그가 언제 그런 웃음을 짓는지 알고 있었다.
아스텔라 언니가 숨겨둔 돈을 찾았을 때, 혹은 숨겨둔 술을 찾았을 때 짓는 미소였다.
“날 그렇게 방에 가두고 도망간 딸년이 수도의 훌륭하신 귀족님의 저택에서 좋은 사람들과 편하게 일하고 있다잖아? 내가 와보지 않을 수가 없지.”
그는 내가 아스텔라 언니에게 적었던 편지의 내용을 읊어댔다.
“내가 언니한테 보낸 편지를 빼돌린 거예요?”
“빼돌렸다니? 읽기만 하고 그 멍청한 랑시드 여편네에게 돌려줬지. 꼭 네 언니에게 편지를 전해주라고, 그리고 답장을 받으면 답장도 꼭 내게 보여달라고 당부하면서 말이야. 그래야 네 언니도 내가 찾을 수 있지.”
그렇게 말하며 아버지는 히죽 웃었다. 자신을 버리고 간 두 딸을 잡아낼 생각에 즐거운 듯했다.
“지금 여기 없는 네 언니 이야기는 됐고, 네 이야기를 해야지. 자, 내놔 봐.”
“뭘요?”
“뭐긴? 네가 편지에 썼잖아. 월급도 많이 받는다고. 뭐, 당연히 이런 훌륭한 저택에서 일하니 돈을 많이 받겠지.”
화려한 응접실을 둘러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가출한 지 벌써 두 달이나 지났으니, 적어도 두 달 치 월급은 받았겠지. 아직 네가 이번 달 월급을 못 받았다면, 아비가 된 도리로 네가 정당한 월급을 빨리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도 있고.”
아버지는 또 히죽 웃었다. 자기 손에 돈이 들어올 생각을 하니 즐거운 모양이었다.
“자, 빨리 내놔. 그럼 네가 내 뒤통수를 치고 가출한 건 눈감아 줄 테니까.”
맡겨놓은 돈을 되찾는 것처럼 아버지는 손을 내밀었다. 언니와 내가 힘들게 일하고 돌아오면 으레 그랬듯이.
“싫어요.”
아버지가 손을 내민 채 내게 한 걸음 다가오자,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뭐?”
아버지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마치 자기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싫다고요.”
월급은 당연히 이미 받았다. 한 푼도 쓰지 않은 내 월급은 손수건에 곱게 싸여 옷장 속에 고이고이 모셔져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버지에게 고스란히 가져다 바치기 위해서 거기에 있는 게 아니었다.
테오도르를 다 고쳐주고 나서, 언니와 다시 만나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소중한 돈이었다.
“싫어?”
아버지는 눈을 희번덕 뜨며, 내 말꼬리를 잡았다. 그 눈빛에 나도 모르게 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레나티스, 이 망할 년. 넌 원래부터 건방진 년이긴 했지만, 떨어져 있는 동안 더 버르장머리가 없어진 모양이야. 어디 감히 하늘 같은 아버지에게 싫다고 말해? 그리고 그따위로 눈깔을 뜨는 법은 어디서 배웠어?”
어느새 미소를 싹 지우고, 위협적으로 눈을 부릅뜨며 아버지가 내 쪽으로 한걸음 다가왔다.
어릴 적부터 항상 보던 바로 그 표정이었고, 걸음걸이였다.
나를 때리려고 다가오는.
‘무서워!’
도망치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언니를 소리쳐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내 입은 꾹 다물어져서 벌어질 줄 몰랐고, 다리는 그대로 굳어버린 듯 움직일 줄 몰랐다. 학습된 두려움이 나를 그 자리에서 얼어붙게 했다.
이다음에 무슨 상황이 펼쳐질지 너무도 날 아는 나였기에, 무서웠다.
저 두꺼운 손이 내 뺨을 때리겠지. 저 큰 주먹이 내 어깨를 치겠지. 저 큰 발이 나를 마구 차겠지.
늘 그랬듯이.
맞은 나는 바닥에 나뒹굴고,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겠지.
늘 그랬듯이.
“아악!”
커다란 손이 내 쪽을 향해오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반항적으로 쳐다본다고 시비가 걸렸던 눈은 질끈 감아버렸다.
대신 열린 것은 입이었고, 터져 나온 것은 비명이었다.
마치 몽둥이로 관자놀이를 후려치는 것 같은 힘에 내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지만, 미리 맞을 것을 알고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고 있었던 덕분에 간신히 넘어지지는 않을 수 있었다.
과연 그게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또 뭐야?”
평소라면 욕설이 날라 와야 했다. 하지만 거친 목소리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돌아갔던 얼굴을 다시 돌리고 눈을 뜨자,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화가 난 것과는 조금 다른 표정이었다.
뭔가 못 볼 것이라도 본 것 같은, 그게 아니면 이상한 것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너…….”
그리고 이내 그마저도 일그러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흡사 더러운 것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어린 것이 벌써 더러운 짓거리나 하고 다녀?”
아까보다 더 큰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더 큰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또 맞을 거야!’
그가 무엇을 보고 그러는 것인지 짐작하기도 전에, 들어 올려진 아버지의 팔을 보며 맞을 거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내 주먹의 두 배는 됨 직한 저 주먹이 내 얼굴로, 어깨로, 배로, 날아올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을 보지 않기 위해서 눈을 질끈 감는 것밖에 없었다.
무서움이 나를 얼어붙게 했다.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막 내게 날아오려던 아버지의 주먹은 허공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내가 아니라 문 쪽을 향해서 돌아가 있었다.
얼른 나도 그쪽을 쳐다보자, 내가 들어와서 분명히 닫았던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실루엣이 그곳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