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66
“너…….”
인스트는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뻐끔거리며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던 인스트는 결국 입을 다물어버렸다.
“일단, 오늘은 쉬는 게 좋겠네.”
그리고 겨우 한 말은 그것이었다. 원래 그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닌 것 같았지만.
“……네.”
나는 대답과 함께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바로 뒤를 돌아 다시 내 방으로 뛰어가려고 했다.
“레나티스!”
인스트가 손을 내밀어 내 손목을 잡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건, 그러니까, 그…….”
인스트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마도 아까 하려다가 못한 말을 하려는 결심은 했지만, 아직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그 치료인 건가?”
인스트가 골라낸 단어는 그것이었다. 치료.
광증을 낫게 하는 치료.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건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건 치료였다고. 필요한 행위였다고.
“혹시…….”
인스트는 뭔가 더 물으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적당한 단어를 골라내지 못했는지 몇 번이나 입술만 달싹일 뿐, 제 안에 있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니야. 오늘은 그만 쉬도록 해.”
결국, 인스트는 내 손을 놓았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거의 내 방으로 도망치듯 달려갔다.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고, 마주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지도 않았다.
* * *
“오늘 간식은 뭐지?”
세상에서 제일 거만한 슬라임이 물었다.
“공기.”
비루한 집사가 대답했다.
“무슨 되먹지 않는 소리야?!”
당연히 슬라임은 노했다.
“어쩔 수 없어. 내가 오늘 방에서 한 걸음도 못 나갔단 말이야.”
힘없이 몸을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먹은 게 없어서 힘도 없었다.
시간은 벌써 점심때이지만, 나는 아침은 물론이고 점심도 아직 먹지 못한 상태였다. 물론, 간식도.
바깥 어딘가에서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침이 꼴깍 넘어갔지만, 그야말로 내게는 먼 그림일 뿐이었다.
인스트가 해준 것처럼 수건을 그대로 감고 식당에 갈까도 생각했지만, 이상할 것이 뻔했다.
거기다가 가장 문제는, 그렇게 목은 가린다고 쳐도 귀 언저리에 있는 것 하나와 목과 턱의 경계선쯤에 있는 하나는 가릴 수가 없다는 데에 있었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불쑥, 스기엔이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투명한 몸체 너머로 내가 나갈 수 없는 방문이 보였다.
“목에 이 멍들은 뭐야? 또 누구한테 맞았어?”
“맞은 건 아니야.”
스기엔은 내 목에 있는 키스 마크들이 멍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긴, 키스 마크가 모르는 몬스터가 보기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가만, 나도 그냥 나가서 멍이라고 우길까? 넘어져서 굴렀다고 하면…….
“안돼. 상대는 사람이라고.”
순진한 슬라임이 아닌 알 것 다 아는 사람을 상대로 그게 통할 리가 없었다.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아주 잠시 괜찮은 계획이라고 생각했던 계획을 접었다.
“무슨 소리야?”
내 중얼거림을 들은 스기엔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맞은 것 아닌 멍은 뭔데?”
“그저 작은 사고가 있었어.”
“넘어지기라도 한 거야? 아니면, 뭐에 부딪혔어.”
“응. 부딪혔어.”
입술에 부딪혔지.
“칠칠하지 못하게 왜 다치고 그래? 그래서, 아파서 이러고 있는 거야?”
“응. 맞아.”
“그럼 오늘 온종일 아무것도 안 먹고 이러고 누워만 있었어?”
“응. 그래.”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기력이 없어서 그런지 만사가 귀찮았다.
잠시 그렇게 누워 있노라니, 조용했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바로 방문이 보였다.
“뭐야? 먹을 것 없다고 바로 그렇게 가버린 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스기엔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아~ 이래서 머리카락 없는 짐승을 거두는 게 아니라고 했나?”
뭔가 좀 다른 것 같긴 했지만, 내 머릿속에 있는 격언을 떠올렸다.
“하아~. 언제까지 이러고 있지?”
오래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계속 이러고 있다가는 아사할 것 같았으니까.
“손수건을 스카프처럼 목에 둘러서 가리면 괜찮지 않을까?”
나는 벌떡 일어나서 손수건을 접어서 목에 둘러보았지만, 완벽하게 가려지지는 않았다.
아무리 넓게 손수건을 펼쳐도, 어떻게든 삐져나가는 키스 마크가 있었다. 거기다가 귀 언저리에 있는 것은 아예 손수건에 닿지도 않았다.
“하아……. 이렇게 여기서 굶어 죽는 엔딩인건가?”
이왕이면 몸이라도 편하게 죽지 싶어서 침대에 팔을 벌리고 누웠다. 침대에 드리워진 캐노피를 향해 깊은 한숨을 내쉬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으아와와앗! 안에 사람 있어요!”
나는 다급하게 이불 속에 숨으며 그렇게 외쳤다.
누군가에게 이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방에 처박혀 있는 건데, 누가 들어와서 이 꼴을 보게 되면 아무 의미가 없잖아!
“안에 있는 것 알아.”
“테오도르 님?”
뜻밖의 목소리에 이불 속에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가 들린 쪽도 복도의 문이 아니었다.
연결된 커넥팅룸 쪽의 문이 열리고, 테오도르의 얼굴이 보였다. 동시에 아까 은은하게 풍기던 맛있던 냄새가 더욱 강렬하게 내 코를 덮쳐왔다.
“식사를 차려뒀어. 아직 점심 전이지?”
그 소리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홀린 듯이 테오도르를 지나쳐서 옆 방으로 건너갔다.
테이블에는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크림 스튜와 샐러드, 약간의 과일과 함께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이 차려져 있었다.
“그거…… 내가 그런 거겠지?”
방문을 닫고 내 쪽으로 다가온 테오도르가 물었다.
“아……. 하하.”
테오도르가 말하는 ‘그런 거’라는 것이 키스 마크라는 것을 알았다. 역시나 손수건으로 다 가려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테오도르가 추측형으로 묻는 것을 봐선 그는 또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테오도르 역시 내 맞은편에 앉았다.
“아파?”
“아프진 않아요.”
마크를 남긴 당사자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제의 일이 마치 나 혼자만의 환상인 것만 같았다.
씁쓸한 마음에 나는 급하게 스푼을 들었고, 테오도르는 조용히 빵을 뜯었다. 잠깐씩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음식을 씹는 소리만 들렸다.
“감사합니다.”
이미 빈 접시가 되어버린 내 접시 위에 빵이 놓아지자 저절로 그 말이 나왔다.
“아침에 네 생각을 했어.”
우물우물 빵을 씹으며, 테오도르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눈은 후식 접시를 보고 있었다.
앗! 스기엔이 좋아하는 살구가 있네? 테오도르 몰래 이걸 숨겨놨다가 주면 좋을 텐데?
나는 포크로 살구를 집는 척하다가 테이블에 떨어뜨리고, 그게 데굴데굴 굴러가면 손으로 잡아서 그대로 주머니에 쏙 넣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화가 나더라고.”
“네?”
포크로 살구를 건져 올리던 나는 테오도르의 말에 당황하며 포크질을 멈췄다.
포크 위에 반쯤 올려져 있던 살구는 내 의도대로 아래로 떨어졌고, 테이블을 데굴데굴 굴러가기 시작했다.
“어젯밤 일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나에게 화가 났다고 했어.”
동그란 살구는 아직도 굴러가고 있었다.
데굴데굴, 데굴데굴.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또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불명확한 것이 몹시 불쾌해.”
살구는 이제 거의 다 굴러갔다. 테이블 끝에 다다른 그것은 이제 떨어지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정확하게,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알고 싶어졌어.”
툭.
마침내 모서리 끝에 간당간당하게 걸려 있던 살구는 아래로 떨어졌다.
“네가 도와주겠지?”
테오도르의 손아귀 안으로.
“아, 저, 그게…….”
나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어젯밤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고? 그럴 수 있었다.
기억이 없는 상황이 불쾌하다고? 물론, 그것도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기억을 되살리는 일을 내가 도와야 한다는 것은……, 그럴 수 없었다.
“제가 설명해 드리기에는 조금 곤란한데요.”
“말로 설명이 어렵다?”
“네.”
“왜?”
“그게, 여러 가지 상황상,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에는…… 좀 상황이 그렇거든요. 하지만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제가 음…… 테오도르 님께 제 체액을 전달해드렸고, 그래서 테오도르 님이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되신 거죠. 네, 그렇습니다.”
“그건 알아. 이론적으로 그렇게 알고 있으니까.”
드르륵.
의자를 끄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나는 이제껏 맹세코 테오도르가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앉을 때, 의자를 끄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분명 방금 그 소리는 교묘하게 계산된 행동이 분명했다.
내가 고개를 들고 자신을 보게 하려고.
테오도르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손에는 내가 굴린 살구가 아직도 들려 있었다.
“내가 궁금한 건, 실제적인 상황과 구체적인 행동이야.”
테오도르는 테이블을 둘러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드문드문 생각이 나더군. 내가 어제 네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는 느릿하게 말을 끌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테오도르의 숨결과 체온이 가까이 느껴졌다.
“그러자, 섰더군.”
은은한 백단향이 살랑살랑 날아와 나를 툭,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