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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63화 (63/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63

“테오도르 님이 어떤 분이냐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인스트가 되물었다. 이미 달리기로 진이 빠진 나는 질문을 던진 뒤에는 이미 잔디에 누운 채였다.

아마 1분 휴식 뒤에는 다시 일어나서 팔굽혀펴기나 스쾃, 혹은 플랭크를 해야 할 테지만, 일단 지금은 최선을 다해서 널브러져 있을 테다!

“그 질문의 출제 의도가 뭐야?”

“의도는 없어요. 그냥 인스트 님이 느끼기에 테오도르 님은 어떤 분이신가 해서요.”

“별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인스트는 팔짱을 끼며 인상을 슬쩍 찌푸렸다. 이제야 테오도르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보는 듯했다.

“내가 지켜야 하는 존재.”

바닥에 누운 나를 쳐다보며 인스트가 내놓은 답은 그것이었다.

때마침 가을바람이 불어와 땀으로 살짝 젖은 인스트의 머리카락을 흔들어놓았다.

“와! 방금 그 대답! 뭔가 멋있어요! 제가 생각했던 대답은 아니었지만요.”

“뭐야? 출제 의도는 없다며?”

“의도는 없었어요. 하지만 인스트 님에게 테오도르 님이 어떤 존재이냐는 질문이 아니라, 테오도르 님이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했던 거란 말이에요.”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한데?”

“글쎄요? 그냥?”

“다른 사람이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뭐가 중요해?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거지.”

인스트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놓인 물을 잡아챘다. 뚜껑을 여는 동안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테오도르 님의 호위 기사가 되기 전에, 나는 모 후작 가문의 기사단에서 수습 기사 생활을 했었어. 거기의 기사단장은 핸드빌이라는 기사였는데, 검술이 아주 끝내줬어. 특히나 마상 대결에서는 진 적이 없었지. 말 타는 솜씨도 아주 끝내줬거든.”

거기까지 말한 인스트는 물을 들이켰다. 목울대가 거세게 아래위로 움직이는 것을 보아, 아주 많이 목이 말랐던 듯했다.

그리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음 말을 기다리며 인스트의 물을 마시는 모습을 참관해야 했다.

“그런데 핸드빌 본인은 뛰어난 기사였지만, 리더쉽은 없었어. 기분파였거든. 훈련은 들쑥날쑥하고, 보좌관은 바뀌기 일쑤였고, 최악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엔 얼차려를 받거나, 걷어차이기가 일쑤였지.”

“인스트 님도 걷어차였어요?”

“아니. 그것도 핸드빌의 최악인 점 중의 하나였거든. 그의 기분에 휘둘리는 사람은 전부 평민 출신의 기사와 수습생들이었어. 나 같은 귀족 출신은 열외였지. 그의 기분은 상대를 봐가면서 조절이 되는 거였거든.”

“비겁한 사람이었네요.”

내 대답에 인스트는 빙긋이 웃었다. 마치 기다렸던 대답이라는 듯이.

“넌 지금 핸드빌을 그렇게 평가했어. 하지만 내가 처음에 말했지. 그는 검술과 마술이 아주 끝내주는 기사였다고. 혹자는 핸드빌을 뛰어난 기사라고 말하고, 혹자는 그를 개차반이라고 평가할 거야. 그리고 혹자는 그를 비겁한 사람이라고 평가할 거고.”

인스트는 입가에 조금 흐른 물을 훔쳐냈다.

“그럼 인스트 님은 어느 혹자인데요?”

“나는 핸드빌은 개새끼라는 평을 내리는 혹자야.”

“왜요? 인스트 님은 그 사람에게 당한 게 없다면서요.”

“그의 행동은 기사도 정신에 어긋나니까.”

대답은 간단했고, 멋있었다.

“그래서 카르오 대공가에서 제의가 왔을 때, 바로 받아들인 거야. 그 기사단을 나오고 싶어서.”

인스트는 물병을 내려놓았고, 말도 끝냈다. 그리고 휴식은 종료되었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인스트 님은 좀 멋있는 것 같아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인스트에게 말했다. 칭찬은 굳이 아낄 필요가 없으니까.

“좀이라니?”

날 보는 인스트의 인상이 슬쩍 찌푸려졌다.

“많이겠지.”

그리고 정색했다.

가을바람도 눈치라는 게 있는지, 아까와는 달리 인스트의 머리카락을 멋있게 휘날려 주지 않았다.

그저 싸늘한 바람만이 인스트와 나 사이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아, 또 반하게 되면 곤란하니, 자제하고 있는 거야?”

“또라뇨? 제가 이전에도 분명히 말씀드렸지만, 저 인스트 님한테 반하지 않았다니까요?”

“그러기는 좀 힘들 텐데?”

“전혀요.”

“그래. 차인 상처가 커서 다시는 반하지 않겠다고 굳은 다짐을 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 제가 좋아하지를 않았는데, 어떻게 왜 차이냐고요!”

“그래, 그래. 알았어.”

인스트는 격려라도 하듯,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게 더 기분 나빴다. 마치, 나를 위로해주려는 것 같아서.

도대체, 좋아하지도 않는 인스트에게 몇 번이나 차인 걸까?

* * *

또 하루가 저물었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눕자, 저 멀리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왔다. 뭐 때문에 우는지 모르는 그 울음을 들으며 나는 생각에 빠졌다.

클레어는 테오도르가 무섭고 어려운 사람이라고 말했다. 인스트는 지켜야 하는 존재라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물어본다면 다 다른 대답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게 테오도르는 …….”

뭔가 단어를 말하고, 문장을 완성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테오도르는 카르오 대공가의 후계자였고, 내가 전생에 읽은 소설의 주인공이었다.

그 소설 속에서는 광기 어린 집착과 조절하지 못하는 분노, 그리고 잔혹한 성정을 가진 남자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테오도르는 달랐다.

그는 무심한 듯 다정했고, 예민했지만 배려 깊었고, 겉은 차가워 보였지만 속은 따뜻했다.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혼란스럽고 여린 눈빛을 한 성인 남자.

내가 본 테오도르는 그러했다. 이 저택의 누구도 보지 못한 테오도르였고, 소설에서 나오지 않은 테오도르를 나는 느꼈다.

“테오도르는…….”

그리고 나는 그런 테오도르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희뿌연 안개 너머의 무언가를 보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어려웠다.

“어?”

깊은 생각에서 퍼뜩 깨어나게 한 것은 바깥에서 들린 소리였다.

뭔가 싶어서 귀를 쫑긋 세우는데 또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을 쳐다보고 있던 고개를 얼른 돌렸다.

복도를 향한 문이 아니라, 옆 방으로 연결된 문 쪽으로.

누군가 노크를 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노크라고 하기에는 너무 일정하지 않았고 단단한 소리도 아니었다.

오히려 누군가가 구조요청을 하는 것처럼 약하지만, 온 힘을 다해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 같은 소리였다.

“쥐 같은 건 아니겠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쩌면 하녀가 방 청소를 하는 중에 방문이 흔들리는 소리일 수도 있었다.

이 방문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잠그지 않고 있었다. 급할 때 문을 여느라 허둥지둥하면 안되니까.

조심스럽게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았다. 혹시나 쥐라면 콱 밟아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앗!”

하지만 문을 열자 그 자리에 있던 것은 쥐가 아니었다. 내 키보다 큰 그림자가 문을 열자마자 스르르 내 쪽으로 쓰러져 내렸다.

“테오도르 님!”

그의 몸을 받치고 있는 손과 기대어진 몸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괜찮으세요?”

얼른 그의 손을 보았지만, 길어진 손톱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이 파들파들 떨리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나는 얼른 고개를 들어 테오도르의 눈을 보려고 애썼다. 그쪽이 더 확실할 것을 알았다.

“괜찮지…… 않으시네요.”

드리운 흑발의 너머로 테오도르의 눈이 선명한 붉은 색인 것을 확인하자, 신음과 함께 그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지금이 바로 그 ‘급할 때’였다.

“레나…… 티스…….”

떨리는 입술에서 내 이름이 불리었다. 번뜩이는 붉은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나의 피. 나의 타액. 나의 체액.

테오도르의 몸이 나의 몸을 원하고 있었다.

“아!”

테오도르의 손이 위로 올라오더니, 내 양팔을 덥석 붙잡았다. 여전히 떨리는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다시 앙다물어졌다.

흔들리는 붉은 눈이 나를 보았고, 그다음에는 내 입술을 보았고, 선명한 붉은 피가 아래에서 흐를 내 목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더 아래까지 내려가려던 시선이 다시 퍼뜩 위로 올라왔다.

다시 눈이 맞춰졌다. 붉은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슬퍼 보여.’

왜인지 몰라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남들은 모두 무섭다고, 불길하다고 여길 그 붉은 눈이 내게는 슬퍼 보였다.

“테오도르 님.”

그의 이름을 부르자, 붉은빛이 짙어졌다가 다시 흐려졌다.

테오도르는 아무도 없는데도 자신의 광증을 억누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 광증이 사그라질지 알고 있으면서도.

‘왜?’

편안해질 수 있으면서도 그 방법을 곧장 취하지 않는 그를 보며 나는 의아했다. 하지만 곧 그 이유를 알았다.

‘다정해서 그래.’

그 방법이라는 것이 나를 다치게 할까 봐, 혹은 부끄럽게 할까 봐, 또 혹은 내가 싫어할까 봐.

그래서 테오도르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 다정한 배려에 나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잘은 모르지만, 머릿속이 어지럽고, 점점 정신이 흐려지고 있을 텐데도, 테오도르는 내 걱정을 해주고 있었다.

“고마워요.”

그래.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 중요할까?

지금 내가 느끼는 것만이 중요할 뿐.

다른 사람의 테오도르가 아니라, 나의 테오도르가 중요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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