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62
지금 내 상태는 거의 얼어붙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야 당연했다. 리타 아주머니가 말한 보자고 한 사람이 무려 카르오 대공비였으니까.
‘이 사람이 테오도르의 엄마…….’
나는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또 눈을 또르르 굴려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전에도 생각했듯, 그녀는 테오도르같이 다 큰 아들이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 젊어 보였고, 너무 예뻤다.
하지만 클레어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테오도르의 생모가 맞았다.
“그래. 일은 힘들지 않아?”
심지어 목소리까지 교양과 우아함이 철철 넘쳤다.
“네. 배려해주신 덕분에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나는 다급히 그녀에게 향했던 시선을 다시 바닥으로 향하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리타 아주머니가 오면서 귀부인을 대할 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귀띔해주신 덕분이었다.
“얼마 전에 어떤 백작 영애에게 아주 흉한 꼴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아, 네.”
“씩씩한 아가씨라 별 탈 없이 넘어간 모양이던데, 계속 이 저택에 있는 것이 불편하지 않겠어?”
“괜찮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씩씩한 편이라서요.”
나는 다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먼 곳에서 왔다고 들었는데, 고향이 그립지는 않아? 두고 온 가족들 생각도 날 텐데. 가족들도 널 보고 싶어 할테고.”
“네. 괜찮습니다. 지금 고향에는 개망나니인 아버지밖에 없어서요. 거의 가출하듯이 나온 거라, 아마 아버지는 절 보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이를 갈고 계실 거예요.”
아, 조금 전에 내가 한 말은 대공비님 앞에서 쓰기에는 너무 저렴한 단어 선택이었을까?
나는 살짝 고개를 들어 대공비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굳은 것 같기는 했지만, 처음 들어올 때부터 그리 따스한 인상은 아니었기에, 확실치는 않았다.
그녀는 확신의 냉미녀 타입이었다.
“듣기론, 테오도르 때문에 다치기도 했다고?”
“아! 처음에 그랬는데, 그것도 다 나았습니다. 괜찮습니다.”
속으로 나는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껏 카르오 대공비의 존재에 대해서도 별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이전번에 잠깐 봤을 때의 인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나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이 집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택은 엄청나게 크고, 본채와 별채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말이다.
‘사실은 테오도르에게 관심이 있는 걸까?’
그럴지도 몰랐다. 그녀는 차갑고 도도해 보이지만, 어쨌든 테오도르의 엄마였으니까.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테오도르만 해도 겉모습은 냉정하기 그지없었고, 소설 속에서도 이런 미친놈이 없다고 생각했을 정도의 인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로 본 테오도르는 너무나 여렸다.
게다가 그의 과거 사연을 듣고 나서는 너무 가여워서 끌어안아 주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쩌면, 테오도르의 엄마니까 테오도르와 같은 과일지도 몰라.’
나는 내 걱정을 해주는 대공비의 모습을 보며 그렇게 추측했다. 어쩌면 그녀는 테오도르처럼 겉모습은 냉정해 보이지만, 속은 아주 따뜻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흐음…….”
작은 한숨이 앞에서 들려와 나는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방금 그 소리를 내가 잘못 들은 것으로 생각될 정도로 카르오 대공비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돈, 좋아하니?”
“네?”
갑작스러운 단어와 질문이 튀어나왔다. 나는 당황스러워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요?”
내 대답에 대공비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 모습에 나는 도리어 더 어리둥절해졌다. 당연한 질문에 당연한 대답이었는데, 왜 저렇게 사람을 비웃는 것 같은 미소를 짓는 걸까?
아, 혹시 이것도 내 편견인 걸까? 저런 분은 내가 무슨 대답을 하면 비웃을 것 같다는 생각을 내가 하고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걸 수도 있었다.
“내가 만약, 네가 원하는 만큼의 돈을 준다면…….”
아주 은밀한 제안을 하는 것처럼, 대공비가 목소리를 낮추고 자세를 살짝 내 쪽으로 기울였다.
어쩐지 압도되는 것 같은 분위기에 나는 긴장해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겠니?”
그녀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대공비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스몄다. 어쩐지 그 미소도 아주 차가워 보였지만, 아마 이것도 내 편견일 것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대공비 님. 제가 테오도르 님을 꼭 낫게 해드릴게요.”
“……뭐?”
“테오도르 님과도 약속을 이미 한걸요. 이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꼭 옆에 있어 드리겠다고요. 광증이 있으실 때는 좀 격해지시긴 하지만, 제가 위험해지지 않고 증상을 완화할 방법도 찾았으니 문제없습니다.”
대공비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마도 그 방법이라는 것이 뭔지 의심스러워서일 텐데, 그게 키스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제가 당신 아들과 아주 진한 키스를 하고 있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귀족 영애는 아니지만, 그게 예절에 어긋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하려는 말 역시 예의에 어긋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면, 아주 조금은 예의에 어긋나도 괜찮을지 몰랐다.
“저도, 테오도르 님을 지켜드리고 싶어요.”
* * *
대공비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은 분인 것 같은데 왜 테오도르랑 사이가 좋지 않을까?”
나를 따로 불러서 잘 지내는지 물어도 봐주고, 넌지시 아들 부탁도 하는 걸 보면 좋은 사람 같았다.
직접적으로 나한테 테오도르를 부탁한 것은 아니었지만, 웃돈까지 주겠다고 말한 것은 다 그런 뜻이 아니었겠느냔 말이다.
“피폐물 옵션이라서 그런가?”
자고로 피폐물 남주중에 가정이 화목한 사람은 없었다.
여주도 마찬가지였긴 하지만, 개중에 아주 가끔 가정이 화목한 여주도 있었다. 그리고 보통은 남주가 그 화목한 가정을 박살 내지.
“그런 점에선 오히려 내 처지가 나을지도 모르겠다. 박살 낼 가정이 없잖아? 엄마는 일찍 돌아가시고, 아빠는 망나니에, 언니랑은 떨어져서 살고 있으니까.”
혼자 중얼거리며 걷던 나는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한 거지?
“뭐야? 나 지금 엄청 자연스럽게 나를 여주에 대입시킨 것 같은데?”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섰다.
분명 내 발로 카르오 저택으로 오면서 내가 믿었던 것 중의 하나는 ‘남주가 절대로 나를 좋아할 리 없다.’였다.
하지만 그 믿음은 지금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고, 그 금을 이어붙여야 하는 나는 자연스럽게 그 금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히려 금이 완전히 가서 온전히 깨어지고 나면 무엇이 나올지 두근두근하는 마음이 있기까지 했다.
“안돼. 정신 차려.”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상대는 19금 피폐물 남주야! 그 상대역이 되었다가는 무슨 엄청난 꼴을 당할지 모른다고!”
……하지만 침대에서 당할 엄청난 꼴은 조금 기대가 되기 도…….
“으아아아악! 정신 차려!”
조금 전은 위험했다. 욕망에 사로잡혀 인생을 잃을 뻔했다.
* * *
“와~ 레나티스! 그 리본 뭐야? 예쁘다아~!”
클레어는 참으로 감사하게도 나를 보자마자 리본을 알아봐 주었다.
“칭찬, 고마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스튜를 한입 떠먹었다. 어쩐지 스튜가 더 맛있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있잖아, 클레어. 혹시 대공비님은 어떤 분이셔?”
“대공비님? 글쎄……. 나도 별로 뵌 적이 없어서 지난번에 내가 아는 건 다 너에게 말해준 것 같은데.”
“다른 건 뭐 없어?”
“나는 처음부터 별채에서만 일했고, 대공비님은 별채에 거의 오지 않으시거든. 아니, 한 번도 오신 적이 없나?”
클레어는 숟가락을 입에 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말은 의외였다. 아들이 여기 사는데 한 번도 별채에 온 적이 없다니?
저택이 심하게 넓은 탓에 본채와 별채와의 거리도 상당하긴 했지만, 그래봤자 저택 안이었다.
이십여 분을 걸으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다. 걷고 싶지 않다면, 마차를 타는 방법도 있었다.
“대공님도 별채에 거의 오지 않으시고.”
“대공님도?”
클레어의 말에 내 눈이 저절로 커졌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들이 사는 집에 전혀 왕래가 없다니…….
“그래서 테오도르 님이 그렇게 어리광이 심한 걸까? 어렸을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아서?”
“응?”
내 중얼거림에 이번에는 클레어의 눈이 커졌다.
“테오도르 님이 뭐가 심하다고?”
“나이에 비해서 약간 어리광이 있으시지 않아? 아! 물론 막 칭얼대신다거나 혀 짧은 소리로 이야기를 하시는 건 아니지만, 뭐랄까…… 행동이 약간 그런 면이 있으시잖아?”
“아니. 전혀.”
클레어는 아주 딱 잘라서 내 말을 부정했다.
“막 별로 아파 보이지 않는데, 아프다고 하시거나…….”
“내가 여기서 일한 지 몇 년이나 됐지만, 테오도르 님은 아프신 적이 없어. 아! 네가 오기 며칠 전부터 심하게 앓으신 적이 있긴 하지만, 그때도 테오도르 님의 입에서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람은 없어.”
물론 그랬을 거다. 그때의 테오도르는 광증으로 대화가 통하는 상태가 아니었을 테니까.
“차를 마실 때, 심심하신지 스몰토크를 걸기도 하시고…….”
“필요할 때가 아니면 전혀 입을 열지도 않으시는 분이신걸? 오히려 매일 식단이 고민이라, 테오도르 님이 제발 뭘 좀 드시고 싶다고 하셨으면 좋겠다고 주방장님이 늘 한탄하셔.”
“상점가에서 뭘 사주시기도 하시고…….”
“얘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테오도르 님은 자기가 필요한 물건도 있는 대로 쓰시는 분이신걸. 아주 가끔 책이나 펜을 사러 상점가에 가시긴 하지만, 애초에 물욕이라는 것이 없는 게 아닐까 싶으신 분이신데.”
숫제 클레어는 별 웃기는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깔깔거리며 웃기까지 했다.
“굉장히 잘생겼고, 멋지긴 하지만, 테오도르 님은…… 음…… 좀 무섭고 어려운 분이시지.”
웃음을 멈춘 클레어는 테오도르에 대해서 그렇게 말했다. 무섭고, 어려운 사람이라고.
그리고 나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아는 테오도르와 클레어가 아는 테오도르가 너무나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