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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59화 (59/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59

“대공비님!”

문이 열리자마자 거의 쓰러지듯 안으로 들어온 플리케는 기다리고 있던 델마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렸다.

델마의 작은 한숨은 그녀의 울음소리에 가려져 들리지도 않았다.

“테오도르 님께서 저를 찾아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플리케의 하소연이 이어지는 동안, 델마는 가끔 고개를 끄덕이고, 드문드문 맞장구를 쳐주기도 했지만, 사실은 듣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내일 하워드 백작가에서 있을 만찬에서 어떤 드레스를 입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원래는 새로 맞춘 레드 드레스를 입을 생각이었다. 그에 어울릴 루비 귀걸이와 목걸이 세트도 이미 정해놓았다.

하지만 문제는 수도의 레드 유행이 이제 슬슬 사그라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공비가 한물간 유행을 아직도 붙잡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 것은 델마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 대공비님께서 어떻게든 해주세요!”

마침내, 플리케의 길고 긴 하소연이 끝난 모양이었다. 델마는 아직 드레스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지만, 크게 상관없었다.

플리케를 보내고 나서 직접 드레스룸에서 고르면 될 터였다.

“이건, 사실 대공비님의 생각과 계획이잖아요. 그러니 대공비님께서 위기에 처한 저를 도와주셔야 하세요.”

델마는 말없이 플리케의 얼룩진 화장과 울어서 붉게 충혈된 눈을 바라보았다.

‘추하네.’

플리케에 대한 델마의 평은 그것이었다. 제법 예쁘장하다고 생각했던 플리케의 지금 모습은 엉망이었다.

실패한 자는, 패배자는, 저렇게 추했다.

“제 생각과 계획이라뇨? 저는 지금 영애께서 무슨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군요.”

그리고 델마는 플리케와 함께 추하게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자신은 항상 우아하고 아름다운 카르오 대공비여야만 했다.

“그야, 저에게 그 하녀를 치워버리면 된다고 말씀하신 것도 대공비님이시고, 며칠 뒤에 별채의 하인들까지 동원해서 대청소를 해야 하겠다고 하신 것도 대공비님이시잖아요. 그러면 별채에 사람이 없어서 그 앙큼한 것을 치워버리기에 수월할 거라고 말씀하신 것도요.”

“네. 제가 그렇게 말하긴 했죠. 하지만 그건 영애가 내게 별채에 사람이 없을 때는 언제인지를 물어보기에 대답을 해드렸을 뿐이지 제가 영애와 무슨 계획을 세웠다거나, 어떤 아이디어를 드렸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요.”

“대공비님!”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전 사실, 플리케 영애를 다시 보고 있어요. 그런 무서운 계획을 진짜 실행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델마는 고운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마치 눈앞에 있는 플리케가 더러운 쓰레기라도 되는 것처럼.

“그, 그럼, 저희가 나누었던 그 대화들은 다 뭔가요? 구체적으로 외부 조경사의 이름을 알려주시고, 언제 대청소를 하겠다고 날짜까지 알려주셨잖아요.”

“그야 그냥 대화였죠. 우리가 항상 케이크가 너무 맛있어서, 홀케이크 한판을 다 먹고 싶다고 말하고, 아주 구체적으로 어느 가게의 케이크라고까지 말하지만, 실제로 케이크를 그렇게 먹지는 않는 것처럼요. 당장 입이야 즐겁겠지만, 그 살을 어떻게 감당하겠어요?”

델마는 생각만으로도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이어트 같은 아주 사소한 문제만이 자신의 것이라는 듯이.

그런 델마의 태도에 플리케의 얼굴은 이미 사색이 되었고, 살짝 벌어진 입술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처음에 그 분홍 머리 하녀에게 당한 것이 분해서 델마에게 하소연했을 때, 플리케가 원한 것은 카르오 저택의 안주인인 델마가 그 하녀를 쫓아내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그럴 권한이 있었다.

하지만 델마가 슬쩍 흘리듯이 말한 것은, 플리케가 직접 그 하녀를 치워버리는 것이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을 대공비께서는 왜 그렇게 어렵게 만드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 플리케는 그것이 달콤한 유혹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자신에게 모욕을 준 그 하녀에게 두고두고 모욕감을 줄 방법을 대공비가 알려준 것이었다.

그 빌어먹을 하녀는 그저 간단하게 해고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었다. 감히 제 주제도 모르고 날뛴 대가를 치러야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납치당해 몹쓸 짓을 당하고, 비참한 인생을 사는 것. 혹은 비참하게 죽는 것.

그 하녀에게 그런 결말이 어울렸다.

플리케에게 그런 생각을 불어넣은 것은 델마였다.

어리석은 세간의 사람들은 마녀의 머리카락을 부적처럼 생각한다든가, 평민 하녀 따위는 없어져도 아무도 모를 것이라든가, 사람 하나 납치해서 죽이는 것이 참으로 간단하고 헐값이라 세상이 참 무섭다는 말 따위를 흘린 것은 델마였다.

당연히 플리케는 자신의 롤모델인 델마의 말을 하나하나 새겨들었다.

직접적으로 델마가 자신에게 지시하거나, 제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귀족 영애의 화법이라는 것은 원래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은근하고, 비유적이며, 에두른 말.

하지만 인제 와서 그 모든 말들이 다 그저 농담이었다니!

“혹시 파블로 백작가와 인연이 있는 수도원이 없다면,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제가 후원하는 수도원에 소개장을 써드릴 수도 있어요.”

“소개장이요?”

“그래요. 아주 조용하고, 괜찮은 곳이랍니다. 수국이 참 예쁘게 피어서 여름이면 꼭 방문하는 곳인데, 내년 여름엔 그곳에서 영애를 만날 수 있겠네요.”

우아한 미소를 띠고, 델마는 말했다. 그리고 플리케의 얼굴은 더욱 하얗게 질렸다.

지금 자신에게 얌전히 수도원에 처박히라고 말하는 건가?

“너무하십니다, 대공비님!”

바들바들 떨고 있던 플리케의 입술이 격앙된 원망의 말을 쏟아냈다.

“알아요.”

하지만 대답하는 델마의 입술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플리케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기질의 싹을 발견한 델마였지만, 그건 그저 싹일 뿐이었다. 자라나지 못하면 그저 잡초와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플리케와는 달리 화려한 꽃을 피워낸 델마는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추천장은 필요 없는 모양이니, 제가 더 도와드릴 것은 없겠네요.”

플리케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델마는 고개를 돌려 차 시중을 들고 있던 하녀를 바라보았다.

“영애께서 이만 가신다니, 배웅해드리도록.”

“대공비님!”

플리케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델마의 명령을 받고 그녀에게 다가가던 하녀는 당황해선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당장.”

하지만 델마의 단호한 말에 입술을 한번 꼭 깨물고는 재빨리 플리케에게 다가가 그녀의 겨드랑이에 자신의 팔을 끼워 넣었다.

“감히 누구에게 더러운 손을 대!”

플리케는 당장 자신의 팔을 빼내며, 바로 하녀의 뺨을 후려쳤다.

“아악!”

하녀는 소리를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고, 델마는 그 꼴을 보며 혀를 찼다.

아직도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플리케를 보며, 델마는 하인을 부르는 종을 흔들었다.

그러자 몇 초 지나지도 않아 방문이 열리고 하인이 들어왔다.

“저걸 치워.”

델마는 턱을 살짝 까닥여 제 앞에 있는 플리케를 가리켰다

“아…… 네.”

일단 대답은 했지만, 하인은 델마가 씩씩대고 있는 플리케와 그 앞에 쓰러진 하녀 중에 어느 것을 말하는 건지 몰라 주춤주춤했다.

“둘 다.”

그리고 델마는 간단하게 그의 고민을 해결해주었다.

하녀가 스스로 일어나 나가고, 하인이 소리를 지르는 플리케를 끌고 나가는 동안, 델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드레스를 골라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다 문득, 델마의 눈에 저 멀리에서 저택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마차 한 대가 눈에 뜨였다.

“저건…….”

델마는 창문가로 다가갔다. 오후의 가을 햇살을 막아주기 위한 레이스 커튼을 살짝 젖히자, 좀 더 확연하게 방금 보았던 마차가 보였다.

카르오의 문장이 찍힌, 테오도르가 사용하는 마차임을 델마는 단박에 알아보았다.

“잘도 돌아다니는구나.”

플리케의 울음과 패악에는 그저 담담하기만 했던 델마의 눈빛이 변했다. 아름다운 녹안이 지독한 증오와 악의로 순식간에 물들었다.

“대체 내 인생에서 언제 사라져 줄 거지?”

당장 저 마차가 뒤집혔으면 좋았을 것이다. 아니면, 오늘 밤에 별채에 큰불이라도 나던가.

그럴 일이 없다는 걸 델마도 잘 알고 있었다.

잘 훈련된 말이 갑자기 날뛸 리도, 많은 하인이 관리하고 사병들이 순찰까지 하는 카르오의 저택에 큰불이 날 리 없었다.

그래서 그런 것이었다. 그 마녀가 사라진다면, 테오도르의 광증을 진정시켜줄 사람이 없을 테니까.

통제할 사람이 없는 테오도르가 미쳐 날뛴다면, 니제르는 분명 테오도르를 사살할 것이다. 과거에 그의 또 다른 아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너만 없으면…….”

내 인생은 완벽할 텐데.

“너만 없으면……”

델마 드 카르오의 단 하나의 오점.

“너만 없으면!”

증오로 얼룩진 목소리와 함께 델마는 커튼을 쥐고 있던 손을 거칠게 휘둘렀다.

하늘하늘한 레이스 커튼은 델마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날카로운 비명을 내며 찢어지고 말았다.

찢어진 커튼 사이로 델마의 차가운 눈이 무섭도록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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